도쿄전범재판정(Tokyo War Crimes Tribunal)은 극동국제군사재판정(IMTFE, 극동IMT,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의 일부였다. 도쿄재판이 시작된 1946년 5월 3일자 일기에서 밝힌 것처럼 극동IMT의 재판정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약 50개가 열렸고, 도쿄재판정은 그중 하나였다. 5700여 명으로 추산되는 극동IMT의 기소자 가운데 도쿄재판정에 기소된 것은 28명뿐이었다.

 

그럼에도 도쿄재판정은 국제IMT의 초점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이어 전범재판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 ‘A류’ 전범의 재판이 여기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A급’이라 하여 B급, C급과 등급으로 구분된 것처럼 흔히 이해하는데, ‘class’란 말은 등급이 아니라 종류를 뜻한 것이었다. A류는 평화에 대한 범죄였고, B류와 C류는 인도에 대한 범죄이며 그중 B류는 실행 책임을, C류는 상급자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1946년 5월 3일자 일기에서는 이와 다른 <Wikipedia>의 설명을 옮겨놓았는데, <패배를 껴안고>(존 다우어 지음, 민음사 펴냄) 577-588쪽의 설명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혼란을 일으키는 ‘급’ 대신 ‘류(類)’라는 말을 쓴다.) A류 전범은 ‘평화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것인데, 정책 결정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었고, 일본제국 최고위 인사들이 기소 대상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도쿄재판정의 전범 28인 중 군부 인사가 18명, 정치인이 9명이었고 또 한 사람은 정치철학자였다. 정계, 군부와 함께 전쟁 수행의 주역이었던 재계 인사들은 논란 끝에 제외되었다. 무엇보다 천황 히로히토의 제외가 이 재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기소된 28인의 유무죄를 따지는 것보다 천황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이 재판의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판은 1948년 11월 12일의 판결까지 30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재판 중 죽은 두 사람과 정신이상 진단을 받아 심리에서 제외된 한 사람을 빼고 피고 25인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교수형 판결을 받은 7명은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무기형 판결을 받은 16명 중 복역 중 죽은 세 사람을 뺀 13명은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에 사면을 받아 출감했다. 20년형을 판결 받은 한 사람은 복역 중 죽었고, 한 사람은 7년형 판결을 받았다.

 

1947년 12월 말에는 도조 히데키의 심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대부분을 군부대신(1940-41)과 총리대신(1941-44)으로 지낸 도조는 전쟁의 최대 원흉으로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피고였다. 그런데 도조의 심리 중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변호인의 신문 중 천황의 전쟁 책임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온 것이었다.

 

로건(변호인):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기도(木戶幸一, 내대신)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무언가 진언한 사례를 하나라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도조: 그런 사례는 물론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 지음, 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 669쪽에서 재인용)

 

도조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표준적인 방법으로 토로한 것이었다. 그런데 천황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그 말은 전쟁에 대한 천황의 책임을 인정하는 뜻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수 있기 위해 베드로가 예수를 세 차례 부정한 것과 같이 도조는 천황을 지키기 위해 천황의 권위를 본심과 달리 부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천황이 연루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 실언(?)을 주워 담는 노력을 다우어는 <패배를 껴안고> 418-419쪽에 이렇게 그렸다.

 

전범 재판이 실제로 열리기 전에 SCAP(연합군최고사령부), IPS(전범재판 검찰부) 그리고 일본 관리들은 천황의 기소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피고 중 어느 누구도 천황을 걸고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막후에서 움직였다. 펠러스의 충고를 들은 요나이(米內光政, 총리)는 도조에게 어떤 식으로든 천황을 연루시키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재판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공동 전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궁정 및 일본 정부의 고위층들은 GHQ와 협력하여 전범으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했으며, 이후 스가모 수용소에 구금된 수백 명의 ‘A급’ 전범 혐의자들(이 중 실제로 기소된 사람은 스물여덟 명에 불과했다.)은 천황에게 어떤 책임도 전가되지 않게 하겠다고 자진해서 맹세했다.

 

천황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열심히 이루어졌는지는 1947년 12월 31일에 도조가 순간적으로 합의된 선을 벗어나 천황에게 궁극적 책임이 있음을 시사했을 때 눈앞에 드러났다. 발언이 나오자마자 미국 주도하의 검찰이 증언을 정정하도록 비밀리에 그를 지도한 것이다.

 

도쿄전범재판은 엄격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재판이었다. 한 국가의 정계와 군부 지도자들이 현행 국내법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한 행위에 대해 국가의 책임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전범 피고들의 변호인단은 일본의 대외정책이 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위를 위해 결정된 것이라는 주장에 중점을 두었다. 그 사이의 차이를 엄정하게 판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앞서 진행되었던(1945년 11월~1946년 9월) 뉘른베르크전범재판의 원리를 그대로 베껴온 사실이 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독일의 나치 수뇌부는 하나의 공고한 집단을 이루고 일반 정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범죄적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범죄집단으로서 실체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정은 그와 달랐다.

 

도쿄전범재판에서 피고들의 수백 개 죄목은 55개 소인(訴因)으로 요약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범죄적 공모’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모가 이뤄진 기간이 1928년 1월 1일 이후였다. 그 기간 중에 일본의 정계와 군부에서는 많은 지도자들이 바뀌었고 그들은 대부분 나치 수뇌부와 비교할 때 보통사람들이었다. 그 기간 내내 일본제국의 권력 핵심부에 자리를 지킨 것은 히로히토 한 사람뿐이었다. 도쿄의 피고들이 공직을 맡은 기간을 맞춰보면 그들이 하나의 공모에 꾸준히 참여하는 상황을 상상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천황을 보호한다는 것이 도쿄전범재판 최대의 약점이었다. 1948년 11월 판결이 나올 때 11명의 재판관 중 다섯 명이 별도로 개인 의견서를 발표했는데 그중 웹(Sir William Webb, 오스트레일리아) 재판장과 베르나르(Henri Bernard, 프랑스) 재판관은 천황의 면책을 비판했다. 인도의 팔(Radhabinod Pal) 재판관은 도쿄재판이 위법이며 피고가 전원 무죄라고 주장했다.

 

<히로히토 평전>과 <패배를 껴안고>에서 팔 재판관의 역할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재미있다. 다우어는 <패배를 껴안고> 605쪽에서 “도쿄 군사 재판의 판사 열한 명 중 팔 판사만이 국제법에 조예가 깊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가장 예리했고 기억에 남았던 판사” 둘 중의 하나가 팔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빅스는 거의 정반대 의견을 가졌다.

 

팔은 친추축파 인도 민족주의자인 찬드라 보스(Chandra Bose)를 지지하는 인물로 오래전부터 친일파였다.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를 모두 비난하며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많은 인도 지도자들과 달리, 팔은 일본제국주의를 대놓고 옹호했다. 5월 도쿄에 도착하자 그는 불성실한 태도로 임명을 받아들였으며, 일본에 대한 법적인 제재는 고사하고 일본을 재판할 권리 자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재판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지켜볼 작정이었던 팔은 다른 판사가 어떻게 판결하든 독자적으로 반대 의견을 쓸 생각이었다. (<히로히토 평전> 659쪽)

 

사실관계를 심각하게 오인한 것이 일본의 행위에 대한 팔의 역사적 분석을 그르쳤다. 예를 들면 그는 장작림이 일본 군인에게 암살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고, ‘헐 노트’는 미국의 최후통첩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썼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역사가들마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번 전쟁을 놓고 말하자면, 진주만 공격 직전에 미국 국무부가 일본정부에 보낸 것과 같은 통첩을 받을 경우 모나코왕국이나 룩셈부르크대공국이라도 미국을 향해 무기를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히로히토 평전> 677쪽)

 

찬드라 보세(1897~1945?) 이야기는 이 일기에서도 한 일이 있다.(1946년 9월 19일) 인종차별을 중시하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주장에 호응했던 인도 정치지도자였다. 인도 민족주의자 중에는 보세의 추종자도 적지 않았다. 인도가 아직 정식 독립을 하지 못한 이 시점에서 그런 인물이 인도에서 선택된 배경과 경위가 무척 궁금하다. 이제 곧 인도에서 조선에도 유엔위원회 위원을 파견할 참이니까.

 

<Wikipedia> "Radhabinod Pal" 항목에 도쿄전범재판에 대한 팔의 관점이 설명되어있다.

 

팔은 도쿄재판이 정당한 판결을 내릴 수 없는 재판이라고 믿었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며 안정된 평화에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는 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재판이 패자에 대한 승자의 심판일 뿐이며 복수욕의 충족밖에 가져올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개별 의견서에서 이 재판이 “복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법절차의 엉터리 운용”이라고 비판했다. 팔이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충분히 알면서도 그런 범죄는 B류와 C류 전범으로 충분히 처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오니시 노리미츠는 설명한다. 그는 뿐만 아니라 서양인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이 범죄 목록에서 빠져있고 침략당한 나라의 재판관들이 재판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쿄재판이 승자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것 외에는 아무 소득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믿었다. (필자 번역)

 

도쿄재판에서 승자들만이 주역을 맡고 피해자들이 배제된 데 대한 팔 재판관의 불만에는 다우어도 공감을 표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을 침략하고 점령했지만, 그리고 일본인의 약탈로 인해 사망한 아시아인의 수가 엄청났지만, 열한 명의 판사 중 아시아계는 불과 세 명이었다. 심지어 그 숫자조차 승자의 원래 의도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최초 구상에서는 아홉 명의 판사가 참가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들 중 아시아계는 단 한 명이었다. 바로 중국 대표이다. 팔과 자라닐라(Delfin Jaranilla, 필리핀. <히로히토 평전>에는 ‘하라니야’로 표기됨) 판사는 그들의 나라에서 여론의 동요가 발생한 뒤에 합류했다. 도쿄 군사 재판소는 근본적으로 백인 법정이었다. (...) 특히 정도를 벗어난 부분은 조선인 판사나 검사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수십만의 남녀가 일본의 전쟁 기계에 의해 짐승처럼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패배를 껴안고> 611-612쪽)

 

천황의 면책, 731부대 관계자들과의 거래, 재계 인사들의 기소 제외 등 미국 측의 자의적 운영이 그러지 않아도 좋은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던 도쿄재판의 권위를 망가뜨려버렸다. 일본에서 극우파의 기세가 쉽게 되살아날 수 있는 빌미가 여기서 주어졌다. 야스쿠니 신사에 세워져 있는 라드하비노드 팔 기념비가 이 역설을 말없이 보여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