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27일자 <경향신문>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정세에 관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스탠리 스윈튼 AP 기자의 분석기사인데 동남아시아 지역이 ‘서남아주(西南亞洲)’로 표시되어 있다. 도입부의 전체적 조망과 끝의 베트남 설명 부분을 옮겨놓는다.

 

“분규 혼란만 계속 - 비운의 면전 불인 인도네시아 우울하다”

 

[싱가폴 26일 발 AP 합동] 고무, 석(錫), 석유 기타 열대지방 원료품의 세계적 산지인 서남아세아 지구는 혁명과 정치적 혼란을 내포한 채 1948년의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새해에 있어서의 이 지구의 공기는 일층 험악화하여 가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여사한 복잡다난한 문제를 앞에 둔 서남아시아 각지의 과거 1년간의 회고와 1948년의 전망에 관하여 AP 기자 스탄레이 스윈톤 씨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과거 1년간의 서남아세아는 혁명과 정치적 불안이 중첩하였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인(和-印) 간의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고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프랑스정부군과 월남정권이 전쟁을 하여 왔으며 섬라(暹羅, 타일랜드)에서는 피분 전 수상 영도 하의 쿠데타가 실행되었고 면전(緬甸, 미얀마)에서는 대규모의 암살사건으로 인하여 정치적 통격(痛擊)은 최고조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말레이 반도 및 보르네오의 자령(自領) 내의 정치형태 개조를 분망히 계속하여 온 것이다.

 

서남아세아는 수 세기 간 섬라국을 제외하면 타국의 식민지로서 신음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사히 비참한 눈물의 역사를 겪어온 이 지구에서는 민족운동이 전개되어 각 민족은 자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여 왔었다. 인도네시아 안남 면전 등은 이러한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서남 각지의 정치적 정세는 현재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불인: 서남아세아에서 가장 투쟁이 격심한 지구는 불인이다. 현재 불란서정부는 당지 혁명정권인 월남정권의 정치적 타협을 거부하고 있다. 월남정부는 안남 민족주의자들이 1945년 불인의 독립을 획득하기 위하여 호지명 박사 영도 하에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 불란서는 월남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현재 10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불인과 불란서 본국과의 증오는 격화하고 있는데 안남인의 저항이 가장 강력한 곳은 교지지나(交趾支那, 코친차이나)이다. 그리고 불란서는 근근 신공격을 개시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1946년 12월 19일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상황 전개를 1946년 12월 28일자 일기에서 살펴보았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언론의 베트남 관계 보도는 거의 끊겨 있었다. <경향신문>의 경우를 보면 전쟁 발발 후 한 달 동안 관련기사가 자주 실렸지만 1947년 2월 이후 연말까지는 겨우 두어 차례 조그만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구한말의 조선인 식자들은 <월남망국사>를 보며 망국의 길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다.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에 함께 속해 있던 비슷한 크기의 나라인 베트남의 운명에서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해방 후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 상황이 수시로 조선 언론에 보도된 것도 약소민족으로서의 공감대가 유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이 일어난 후 베트남 관계 보도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베트남 민족운동은 당시 아시아 민족운동의 사례 중 조선과 비슷한 조건을 많이 가진 경우였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독립전쟁이 지난 1년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대충 살펴보겠다.

 

전쟁 발발 직후 베트남 정부는 3단계 전쟁 계획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여러 해 전부터 호치민이 장려해 온 ‘마오쩌둥 전략’을 담은 것이었다. 제1단계는 방어에 치중하며 산악 요새에서 역량을 키우는 단계다. 제2단계는 요새를 거점으로 적 시설에 기습을 가하는 단계다. 그리고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전면전으로 나서는 것이 제3단계다.

 

1947년 내내 베트남군은 제1단계 전략을 착실히 실행했다. 프랑스군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오지 지역에서 실력 양성에 힘썼다. 이 지연작전은 프랑스 당국을 초조하게 했다. 아직 본국 내에서 전쟁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었지만, 마다가스카르의 저항운동도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서둘러 종결짓지 않으면 곤경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벌써 병력 증원 요청은 본국에서 거부당하고 있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발뤼(Jean-Etienne Valluy) 장군은 1947년 10월 7일 야심적 작전에 나섰다. ‘레아(Lea) 작전’이란 이름의 이 작전은 베트민 사령부가 있던 박칸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동원 가능한 전 병력으로 남북에서 협공해 그 지역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었다. 박칸에 있던 호치민 등 베트민 간부들은 공수부대의 습격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했다고 한다. 공수대원들이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 불이 안 꺼진 담배꽁초도 있었다고 한다.

 

12월 22일까지 계속된 레아 작전이 베트남군에게는 최대의 위기였다. 프랑스군은 베트남군 9천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지 않고 이 위기를 빠져나갔다. 레아 작전의 종결을 고비로 프랑스 본국 상황은 계속해서 인도차이나 당국에 불리한 쪽으로만 변해갔고, 베트민은 전쟁 계획의 제2단계를 선언했다. 듀이커는 <호치민 평전>(정영목 옮김, 푸른숲 펴냄)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610쪽)

 

1948년 1월, 인도차이나공산당 상임위원회는 혁명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반영하여 퇴각을 중심으로 하는 제1단계가 끝났고, 세력 균형의 제2단계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베트민군은 이제 적과 전투를 개시하기로 했다. 당 지도부는 새로운 전략의 하나로 이웃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대중을 조직하여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했다. 베트민 전략가들은 인도차이나의 영토 전역으로 혁명 작전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프랑스군을 분산시키고 그때 드러나는 취약점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추옹 친은 1947년에 쓴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적이 위로부터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아래에서부터 적을 공격한다. 적이 북에서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베트남 중부나 남부, 아니면 캄보디아나 라오스에서 대응한다. 적이 우리의 근거지 한 곳으로 뚫고 들어오면, 우리는 즉시 적의 배나 등을 강하게 공격하고 적의 다리를 자른다. 즉 도로를 파괴한다.”

 

이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1954년까지 계속되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를 겪은 후 제네바회담으로 종결되었다.(1954년 7월 21일) 북위 17도의 ‘임시군사경계선’ 북쪽은 베트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주의공화국이, 남쪽은 프랑스가 세워준 베트남국이 다스리고 있다가 1956년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국과 그 후견자로 나선 미국이 이 조약을 승인하지 않고 총선거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미국이 주역을 맡은 제2차 베트남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제1차 베트남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눈여겨 볼 것이 호치민의 유화적 태도였다. 전쟁 발발 전에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타협을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은 전쟁 발발 후에도 계속되었다. 프랑스 당국이 전쟁 전망을 유리하게 보면서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성과는 없었다. 1947년 5월에 프랑스 당국은 베트남군의 즉각 무장해제와 프랑스군 무제한 주둔의 휴전 조건으로 베트남이 프랑스연합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실질적 항복 요구인 이 조건에 대해 호치민이 이렇게 응답했다고 한다.

 

“프랑스연합에는 겁쟁이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이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겁쟁이가 될 것입니다.” (<호치민 평전> 596쪽)

 

프랑스 측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하면서도 호치민은 제3국 중재를 통한 국제적 해결을 추구하며 중재 역할을 맡을 국가로 미국을 지목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베트남이 “자본주의적 자율 발전을 지지하며, 조국 재건을 위한 외국 자본 유치를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미국의 베트남 정부 승인이 “미국의 위상과 영향력이 높아질 것이며 (...) 동남아시아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설득했다. (<호치민 평전> 595-600쪽)

 

타협을 향한 호치민의 노력이 전쟁을 바로 끝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그의 꾸준한 노력은 프랑스 국내 여론과 미국 등의 국제 여론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베트남인의 신뢰를 얻는 효과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려운 전쟁 상황을 오래 겪는 동안 최고 지도자가 전쟁을 회피하려 애쓰는 자세는 베트남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호치민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김일성의 자세를 이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김일성은 소련 주둔군의 도움을 얻어 순탄하게 지도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혁명기지론에 입각해서 이북 지역의 혁명을 서둘러 완성하고 나서 이남 지역을 ‘해방’시킨다는 전략을 취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앞세워 온건한 노선의 범 좌익을 광범한 기반 위에 세워주는 대신 비타협적인 박헌영 파의 남로당을 지원했다.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전쟁이었다.

 

김일성이 보다 타협적이고 유화적인 노선을 취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호치민에 비해 대결을 불사하는 노선을 걸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호치민에 비해 그의 지도력이 경직된 쪽으로 발전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 차이에는 음미할 여지가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