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을 사이에 둔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 암살 중 어느 쪽이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었을까? 여운형은 백주대로상에서 저격당한 반면 장덕수는 해 저문 뒤 찾아온 암살범에게 집에서 총을 맞았다. 그리고 여운형은 전 조선의 좌익 인물 중 가장 비중이 큰 사람의 하나였던 반면 장덕수는 우익의 한 계파인 한민당의 간부일 뿐이었다. 여운형 암살의 충격이 훨씬 더 컸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시 더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장덕수 암살이었다. 적어도 경찰과 <동아일보>의 반응은 그랬다. <동아일보>는 12월 10일 “극형으로 테러 처단에 임하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그 끝부분을 일부 옮겨놓는다.

 

(...) 방금 여론은 이 테러에 대하여 엄벌할 것을 절규하고 있다. 지난 사건의 처결을 들어 특히 사법당국을 논란할 바는 아니라 하지만 (...) 물론 일반적으로는 중형을 하는 것만으로 그 목적을 달할 것은 못 된다 하리라. 그러나 판결의 사회적 작용이라는 점에 상도(想到)하여 볼 때 테러 심리를 억압하는 준엄한 판결의 강행이 절망(切望)되는 바 이 사회적 현실을 파악하고 일반적 사회 심의(心意)를 이해하여 테러 처단에 있어 극형주의로 임할 뿐 아니라 배후관계를 철저히 구명하여 발본색원할 조치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다.

 

암살 후 1주일이 지난 이 시점에서 김구 세력이 암살의 배후로 떠올라 있었던 모양이다. 12월 10일 한민당에서는 ‘민족자멸행위 배후대책위원회’를 열었다. “금후 이 같은 망국적 행위를 근절시키고자 각 애국단체 정당 등의 협조로” 열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1일) 위 사설에서도, 이 회의에서도 ‘배후’에 큰 중점을 둔 것이 김구 세력을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같은 날 경찰에서는 장택상 수도청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수사위원회 구성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12일에 예정되어 있던 국민의회-민대 합동대회도 허가를 받지 못한 까닭이 “국민의회 간부 중에는 이번 사건 관계자가 섞여 있어서 경찰로서는 시에 대하여 동 대회 집합을 추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장택상이 밝혔다.

 

경찰과 <동아일보>가 호들갑을 떤 것은 피해자가 자기 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금후 이 같은 망국적 행위를 근절”시킬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한민당은 김성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인 송진우와 장덕수를 암살로 잃었다. 송진우 죽을 때는 한민당 세력이 확고하지 못했지만, 이제 이승만과 손잡고 단독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폭력 행사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사건의 배후 추궁 과정은 해가 바뀐 뒤 계속 살펴보겠거니와, 김구 세력의 혐의는 분명했다. 한민당을 공격할 동기는 민족주의 세력만이 아니라 좌익에서도 갖고 있던 것이지만 장덕수라는 특정인을 제거할 동기가 좌익 쪽은 크지 않았다. 현직 경관을 범행에 동원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민족주의 세력이라면 친일파로 명성 높은 장덕수의 암살이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범인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 속에 재판 관할권 문제가 묻어 나온다. 12월 10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수사위원회 구성을 발표한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암살범에 대한 형벌이 너무나 현 사회 조리에 맞지 아니한다고 보는데 부장의 견해는?

 

(답) 지난 사건에 대한 사법당국의 처단을 보면 동기론과 증거론에 치중하는 까닭에 현 사회 조리에 맞지 아니한 점이 없지 아니하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특별재판에나 그렇지 아니하면 군정재판에 넘길 계획도 가지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1일)

 

한 달 전 일기에서(1947년 11월 26일) 심판관(판사) 세 사람이 사법권의 자주성에 대한 외부의 침해에 항의하여 사표를 낸 일을 얘기했다. 김두한 등 대한민청원들의 납치살인 혐의에 대해 법원이 경미한 판결을 내리자 군정 수뇌부는 이 사건을 군정재판으로 옮겨 재심케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용무 대법원장의 압력에 반발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진주 후 군정재판으로 사법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7년 4월부터 조선인의 사법주권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특별한 경우 이외의 모든 조선인 재판을 조선인 사법부장이 주관하는 군정청 사법부로 넘겼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포고령 위반’이어서 많은 사건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형편이었다. 남조선의 사법제도는 2중체제로 되어 자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대한민청 사건을 우익 판사들이 너무 가볍게 처리한다고 판단되면 군정재판으로 넘기는,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조병옥이 특별재판, 또는 군정재판에 넘길 계획을 갖고 있다고 나서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경찰 수장인 경무부장은 사건을 어느 법정에서 다룰지 결정하는 위치가 아니다. 사법부 내에서 처리할 경우 사법부장이 결정할 것이고, 사법부 밖의 군정재판으로 가져가는 것은 주둔군사령관이나 군정장관이 결정할 일이었다.

 

조병옥의 군정재판 발언은 하지 사령관의 의중을 대신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가 가장 가까이 대해 온 조선인의 하나였던 장덕수의 죽음에 그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음을 조병옥이 포착한 것이었다. ‘통역정치’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는 12월 27일 이 사건을 엄중히 다루겠다는 뜻을 특별성명으로 발표했다.

 

“군율재판으로 테러범과 배후선동자는 극형에 처할 터 - 장씨 암살사건에 하 중장 성명”

 

장덕수 암살사건이 있은 지 1삭이 지낸 금일에 이르기까지 범행의 전모가 발표되지 않을 뿐더러 동 사건에 대한 기사 게재까지 금지하고 있는 당국의 태도에 대하여 일반은 초조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던 바, 하지중장은 27일 공보부를 통하여 테러사건의 책임자는 물론 공범자 선동자는 군율재판에 회부하여 극형에 처하겠다는 요지 다음과 같은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전 세계의 침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1947년 12월 2일에 장덕수 씨가 잔인하고 냉혹하게 암살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이 중요한 시기에 자기나라 사람의 손에 살해를 당하였다는 사실은 본관은 물론이요 진실로 조선의 장래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 조선국민에게는 특별히 슬픈 일이다.

 

이 비열하고 흉악한 행위와 그 배후관계는 특히 본관의 관심되는 문제였다. 평화와 사회질서를 파괴하여 이때까지 정성스럽게 육성하여 온 민주주의의 질서 있는 과정을 파괴하는 이러한 행위는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 정치적 압력과 조선경찰 및 조선인 검찰관 및 재판관에게 생명까지 위협하면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도록 책동하고 있는 것도 본관이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금차 사건에 있어서나 또는 장래 이러한 모든 종류의 사건에 있어서 그것이 어떠한 정당에 소속하든지 또는 그의 사회적 지위가 여하하던지 불문하고 테러사건의 조장 그 모든 책임자와 공범자 선동자는 군율재판에 회부하여 신속하고 완전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 범죄의 정도에 따라서는 극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8일)

 

조선인 경찰관, 검찰관, 재판관들이 이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하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하지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세력의 정당 소속이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지 않아야 신속하고 완전한 재판이 가능할 것으로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군율재판’에 회부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하지가 말한 ‘군율재판’이란 어떤 법정을 말한 것이었을까? 조병옥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해설했다.

 

(문) 특별위원회까지 조직하고 수사 중이라는 설산 장덕수 씨 사건의 배후관계를 비롯한 사건 전모가 발표되지 못하고 과세하는 것은 유감으로 생각되는데.

 

(답) 수사상 시일이 걸려서 아직 발표되지 못하고 있는데 명년 초에는 그 전모가 발표될 것이다. 군율재판소라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종로경찰서 내에 있는 군정재판소와는 달라서 영남폭동사건을 처결한 특별재판소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8일)

 

실제로 이 사건의 수사는 군정청 사법부가 아니라 미군사령부 직속 군사위원회가 맡았고, 재판은 1948년 3월 2일부터 중앙청 제2회의실에 개설된 특별군사법정에서 진행되었다. 조병옥은 하지의 뜻을 정확히 전달한 것이다. 경무부장 역할은 몰라도 통역 역할은 매우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여운형 암살사건은 군정청 사법부에서 처리하고 장덕수 암살사건은 미군사령부에서 처리하는 차이가 하지 사령관의 자의적 결정에 달린 것이었다. 그런데 사령관까지 나서지 않고도 자의적으로 관할권이 좌우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12월 26일 검찰관 일동이 하지 사령관에게 제출한 건의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당한 외부간섭과 악질적 통역 발호 배격 - 검찰관 일동 건의서 제출”

 

외부세력의 간섭으로 직장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재판소검찰관 일동은 26일 하지사령관에게 다음 요지의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귀국 장교들이 사건의 이해 관계자들 측의 일방적인 의견만을 오신하고 정당한 이유도 없이 간섭을 함은 참으로 우리 검찰관으로 하여금 불쾌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조 말엽에 일부간신들이 왕명을 이용하여 왕과 인민을 이간케 하여 관리와 선량한 인민들에 고초를 주었으며, 그 결과로 일본 침략에 유린되었고 다시 일본의 폭정이 시작되자 악질적인 통역관 때문에 무고한 양민이 무실한 죄로 투옥되고 또 악질 통역자를 매수하여 범죄를 하고도 면죄케 한 일이 허다하므로 양민은 쓰라린 고통을 받아 온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민주이념을 실천하는 이상 전기 왕명과는 천양의 차이가 있는 만큼 각하와 조선민중 사이에는 통역자의 악질적인 감관(感官)이 게재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의 진의가 각하에게 전달 못 되는 것이 조선민중 전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하께서는 일방적인 의견보다는 쌍방의 의견을 들으신 후 처단을 내리시며 더욱 민주주의 건설의 지상명령으로 시민과 관리에 대하여도 삼권분립제도를 골자로 법치주의 원칙 하에서 처결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형사사건의 수사 또는 그 재판에 관하여 비상조치적인 명령을 발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명령을 발하기 전에 당로 책임자의 의견을 청취하실 것이며, 그리고 그 명령은 이유를 명시하여서 직접 당로자에게 명령하여 주시는 동시에 각하의 부하장교에게도 그 취지를 전하여 그 실행의 철저를 기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검찰 또는 재판사무에 대한 미군당국의 이유로 인한 간섭 때문에 조선민중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금후에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각하의 성명서를 급속히 발표하는 동시에 이해성을 비롯한 송재숭 최희춘 등의 사건은 신속히 조선인재판에 회부케 하여 줄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7일)

 

이 사태는 12월 19일 두 검찰관의 사표 제출로 촉발된 것이었다.

 

“두 검찰관 돌연 사임”

 

지난 19일 돌연 지방검찰청 김준식 선우종원 등 양 검찰관이 사표를 제출하여 일반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표 제출 원인은 단순한 개인 사정이 아니라 하며 일전에 담당 문초하여 오던 성북서 순경 이해성을 수회죄로 기소한 사실이 있었다 하는데 그 사건이 군정재판으로 이관되어 종로서에서 무죄 언도를 받았다 하는바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여 그 귀추가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23일)

 

이해성과 송재숭 사건은 11월 28일 서울지방심리원에서 군정재판으로 이관된 것이었다.

 

“외래세력 문제로 사법부의 공기 거익심각(去益深刻)”

 

사법권 내의 외래세력의 견제로 말미암아 급기야 서울고등심리원 3 심판관이 사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동요되고 있는 사법부 내에서는 26일 검찰청 측의 긴급회의가 있었고 27일 오후부터는 또 심리원 측의 회의가 열리고 있어 회의 결과는 그 동안의 외래간섭 사건을 조사하여 상부에 진정키로 되었는데 이 문제가 해결은 되지 않고 그간 서울지방심리원에서 공판에 회부되고 있던 사기한 송재숭 사건과 성북서 경사 이해성의 수회사건 등이 28일 도리어 군정재판으로 이관되어 사법권의 독립자주성 확보를 기하고자 동요된 요즈음 이와 같은 결과에 이르러 금번 발생된 외래세력 문제의 귀추는 자못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29일)

 

정윤환, 김우열, 김윤근, 3인의 고등심리원 심판관이 고등심리원장과 군정장관 앞으로 사표를 제출한 것은 11월 25일의 일이었다. 관할권 침해에 대한 이 심각한 항의를 계기로 판사단과 검사단이 회의를 열어 문제를 살피고 있는 와중에 관할권 침해는 태연히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개 경사가 뇌물 먹은 사건에 어떤 중요성이 있어서 군정재판으로 옮겨야 하겠다는 결정을 누가 내렸을까? 설마 하지 중장이나 딘 소장이나 헬믹 준장은(헬믹은 1947년 12월 10일자로 소장으로 승진했다.) 아니었겠지. 아마 미군의 영관급 간부 한 사람이 청탁을 받아 저지른 짓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정재판이라면 죄 없는 사람도 마구 때려잡는 무서운 곳으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잡범들 풀어주는 온정적인 면도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남조선에서 미군정 군정재판은 이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