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독당 부위원장과 국민의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조소앙이 12월 20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한독당 제2인자로 독자적 활동을 별로 않고 있던 조소앙은 지난 달 각정당협의회(정협) 움직임을 주도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12월로 접어들며 김구가 이승만 노선 지지를 선언하고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민대)의 통합 방침이 다시 세워지면서 정협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 중단이 한독당 내에 상당한 갈등을 몰고 왔으리라는 것을 정협의 한독당 대표 3인이 12월 9일 당에서 제명된 일로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조소앙이 의장을 맡고 있던 국민의회와 민대의 통합마저 중순에 들어 난관에 봉착했다. 국민의회와 한독당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군정청의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민대 측이 독자행보로 나선 것이었다. 국민의회-민대 통합은 한독당의 정협 포기와 이승만 노선 지지에 대한 보상으로 보이는데, 이승만 측이 상황 변화를 빌미로 배신을 때린 것 같다. 조소앙의 은퇴 선언에는 상심과 울분의 기색이 엿보인다.

 

1. 나는 남북회의의 진행에도, 남한정당회담에도 국의 민대와의 단결에도 실패된 데 상심한다.

2. 나는 민족적 주관관념과 국제적 객관정세로 하여금 서로 절충 조화케 하여 곤란과 지장을 소제하자는 노력에도 실망하게 되었다.

3. 무력과 테러로써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벌써 고대의 누습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암투와 중상으로 정쟁을 도발코자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현대국가로서 용인할 수 없고 분열과 소란은 국제협조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4. 3,000만 동포 총의에 의한 총선거는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을 발휘하는 개막이므로 경선의 내용 및 형식이 군자국 공민의 체면을 유지키 위하여 공민들은 양심과 도덕으로써 투표하기를 요구한다.

5. 입국할 UN위원단 소속국은 수십 년래 우리 독립을 위하여 물심양방의 협조국이었다. 동포는 주인 된 민족의 예모 있는 외교가의 태도로 영접하기를 바란다. 그네들은 협조자요 명령자가 아닌 것이다. 주권독립과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주객의 타협을 힘써야 할 것이다.

6. 나는 이에 각 사회단체기관 신문 및 정당의 간부와 명예직을 사퇴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21일)

 

조소앙의 은퇴 성명 직후 김구가 이승만 노선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김구는 21일과 22일 연거푸 이승만을 만난 후 민대 쪽에서 구성하고 있던 민족대표단에 자신이 관여한 바 없음을 성명으로 발표했다.

 

김구는 성탄절을 앞두고 22일 당면문제에 관한 요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미구에 내조할 UN위원단을 충심으로 환영하는 동시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임무를 완수하도록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도 자주통일정부요,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독립하여 주겠다는 정부도 남북을 통한 총선거에 의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 UN위원단의 임무는 남북총선거를 감시하는 데 있다. 그 감시는 외력의 간섭을 방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의 여하한 간섭이라도 방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동포는 절대로 자유의사에 의하여 투표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국제적 귀빈을 맞이함에 있어 우리 민족의 통일적 의사를 표현하여야 할 것이니 국의와 민대의 합동에 있어 일시적 외부의 장해로써 완료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합동에 대한 결의는 의연히 유효한 것이다. 그런데 일전에 수모(誰某)의 소위인지 민대의 부서며 또 무슨 보조위원단 운운과 수백인의 명단까지 발표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통일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사전 사후에 본인으로서는 주지한 바 없으니 그 현상 위에서는 여하한 책임도 본인은 질 수 없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12월 23일)

 

“민족대표단 구성 주목 - 오는 26일에 최후 결정”

 

UN위원단의 내조(來朝)에 대비하고자 민대와 국의의 합동 문제는 그 세부문제에까지 완전 합의를 보았으나 집회금지로 인하여 동 대회는 일시 보류되어 왔었는데 민대에서는 일방적으로 민족대표단 구성을 추진하여 지난 19일 민족대표단의 부서를 결정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민족진영 내부에 다대한 의구를 사고 오던 중 지난 21·22 양일 동안 김구의 이화장 방문과 동 대표단에 관여한 사실을 부인한 동씨의 22일부 성명을 비롯하여 민의 한민 한독 등 민족진영 중요 정당의 미온적 태도로 인하여 동 대표단은 다소의 동요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간부급의 사표문제까지 대두하고 있어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23일 오전 10시 이화장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입회하에 국의 측 대표 박원달 외 5씨와 민대 측 대표 이윤영 외 4씨가 일당에 모여 회의하였으나 대표 자격문제로 일단 산회하였는데 26일에는 오후 1시부터 이화장에서 양측 대표 각 15명이 출석하여 최후 결정을 짓기로 되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25일)

 

“남북을 통한 총선거에 의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가 우리의 목표라며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12월 1일의 성명서에서 했던 아래 말과 비교해 보자.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에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 더 명백히 규정한다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1947년 12월 23일자 일기)

 

1947년 12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친 10여 일간이 김구와 이승만이 제일 격렬하게 충돌한 기간이었을 것 같다. “영어도 못하는 무식한 놈이...” 욕을 했다든지 흥분해서 멱살을 잡았다든지 하는 일화도 아마 이때의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이 싸움도 며칠 못 갔다. 둘은 다시 의기투합했다. 민대 통합을 이승만이 다시 승인한 것이다.

 

“이, 김 양 영수 주도 하 민족진 대동단결 - 민대 국의 또다시 합동 교섭”

 

유엔위원단의 내조 결정과 소 측의 1948년 초기 미소양군 동시철퇴 제안이 있은 후 국내 정계는 유엔위원단의 내조 찬부 양파와 소 측의 양군동시철퇴 제안의 찬부 양파로 분열되어 양파의 암투가 은연히 계속 중에 있다.

 

즉 남북요인회담과 양군동시철퇴를 주장하던 소위 각정당협의회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내에서는 김구 씨와 조소앙 씨의 관계는 물론 이승만 박사와 김구 씨의 관계도 미묘하게 되어 있었던바 과반 국의 제44차 회의에서 국의와 민대 합동문제에 원칙적으로 합의를 보자 김구 씨의 수차에 긍한 성명으로 양 영수의 관계는 조금도 변동이 없음이 세인에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 후 변천된 국내정세에 따라 지난 12일 개최예정이던 국의와 민대 합동대회는 집회허가문제로 보류되고 지난 13일의 민대 측 제25차 회의에서 구성된 유엔위원단에 협조할 민족대표단과 동 보조위원회에 대하여 김구 씨는 22일 돌연 그 구성경위가 기개인의 행동이라 하여 이와의 무관련성을 표시한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거니와, 이승만 박사와 기타 동 기구 부서에 관계된 일부 위원들조차 동 기구의 협애성을 지적하고 이에 불만의 뜻을 표하고 있던 중 김구 씨는 연일 이승만 박사를 방문하고 국의 민대 합동문제 민족대표단의 재검토문제에 관하여 구수협의한 바 원만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하며, 또 지난 23일 김구 씨를 위시하여 국의 측 대표 박윤진 씨 외 5인 민대 측 대표 이윤영 명제세 외 3씨는 이화장으로 이승만 박사를 방문하고 국의 민대 합동문제를 토의한 결과 양측 간에 타협점이 발견되어 금 26일 다시 이·김 양 영수 주도 하에 민대 국의 양측 상무위원 각 16명씩 참석 하에(장소미정) 국의 민대 합동문제와 최근 물의가 자자한 민족대표단 재검토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토의하리라 하는데, 금반 이·김 양 영수의 원만한 합의로 말미암아 종래 민족진영 내부에서 보이던 약간의 의견대립과 모략적 언행 등은 일소될 것으로 보이며, 금후 민족진영은 대의무규(大義無規)의 입장에서 독립투쟁에 매진할 태세에 있어 금반 회의의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6일)

 

두 기구는 12월 26일 상임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이듬해 1월 8일에 합동대회를 열 것을 결정하고 이것을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28일) 그리고 통합의 구체적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 28일과 29일 계속 회의를 가졌다.

 

“민대 국의 8일 합동대회 - 법통 계승의 원칙문제도 진전”

 

국의와 민대 합동문제에 있어서 지난 26일 연석회의를 열고 의견일치를 보았거니와 다시 구체적 합동절차를 결정키 위하여 28일 상오 10시부터 밤늦도록 경교장에서 국의 측 김여식 외 2명 민대 측 명제세 외 2명이 계속하여 회의를 열고 토의한 결과, 부서문제는 민대 측 주장인 의장은 조소앙을 유임시키고 부의장에 민대 측에서 1명 보완하기로 하고 양측 상임위원의 비율은 반반씩으로 결의가 되었으며, 선거법문제는 국의에서 작성한 원안에 민대도 찬동하였으며 법통계승의 원칙적 문제에까지 진전을 보았다 한다. 그리고 29일에도 상오 10시부터 동 장소에서 이승만 김구 양 영수 출석 하에 양측 대표 30명이 회합하여 작일 결의한 원안을 보고 토의하고 대회준비 절차 문제를 최후적으로 결정하여 1월 8일 대회에 제출키로 되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30일)

 

이승만 세력이 조직한 민족대표자대회가 말인즉 ‘합동’이지만 실질적으로 김구 세력의 국민의회에 흡수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임정 법통 문제까지 동의한다고 하니 김구 측의 큰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소앙은 은퇴 성명 십여 일 만에 복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김구는 남조선 총선거와 남북 총선거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두 사람의 위신 손상은 본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민족사회를 위해 아쉬운 일이었다. 1월 8일 계획했던 성대한 합동대회가 군정청의 집회 불허로 무산되고 초라한 ‘서면합동’ 형식을 취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의 정치적 몰락을 상징한 것 같다.

 

“국의 민대 서면으로 합동”

 

오랫동안 일반의 주목을 끌어오던 국의와 민대 합동대회는 작 8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당국의 집회불허가로 대회는 중지되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7일 석각(夕刻) 김구 씨는 이 박사를 방문하여 합동대회 문제로 숙의하였다는데 동 석상에서 합동은 형식보다 정신적 문제가 더 긴요함을 강조하였다 한다. 그러나 합동 문제를 위요하여 양측 공히 내부에 물의가 분분하였으나 결국 형식적으로라도 합동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대회 중지의 편법으로 8일 하오 2시 반에 독촉국민회 회의실에 양측 준비위원 상임위원 각도 대표 등이 모여 축소대회를 열고 사무적으로 서면합동을 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9일)

 

아무리 맥빠져도 할일은 해야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