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 쌀값이 12월 15일부터 소두 한 말에 120원에서 140원으로 올랐다.(<경향신문> 1947년 12월 11일) <경향신문> 1947년 3월 22일자 기사 “쌀값은 저락되어 좋으나 올라만 가는 찬값에 두통”에서 “최근 원활히 배급이 계속됨에 따라 600원이나 하던 쌀이 소두 한 말에 450원 정도로 폭락되고 있”다고 한 데 비춰보면 서민생활의 배급에 대한 의존도를 알아볼 수 있다. 시중 가격은 배급 가격의 4~5배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배급 분량이 적은데다 그 분량이나마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5월 중순에 배급이 1작 줄어들자 시중 쌀값이 도로 600원대로 뛰었다.

 

“모리배 말 듣지 마라 - 신곡기까지 배급 쌀 확보 - 생필품관리원서 일반에 주의”

 

한 동안 잠잠하던 시장의 쌀값은 불과 수삼일 동안에 백원이나 껑충 뛰어올라 또 다시 봉급자와 일반 세궁민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면에는 악질모리배 간상배들이 식량 배급량이 1작(勺) 줄어든 것을 기화로 허무맹랑한 풍설을 고의적으로 유포하며 한편으로 쌀 시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당국은 이렇게 국민생활을 좀먹고 위협하는 무리들에 과감한 철퇴를 내리기를 바라거니와 생필품관리원(구 식량영단)에서는 일반 시민에게 신곡기(新穀期)까지 충분히 배급할 식량이 확보되었다고 (...) (<동아일보> 1947년 5월 17일)

 

가을이 되어 미곡수집이 시작될 때 군정청은 그때까지 용인되어 오던 쌀의 소량 반입까지 일체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빚어진 사태를 보도한 <경향신문> 1947년 10월 19일 기사에서 당시 식량 배급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식생활의 안정감을 줘야 곡류의 수집 완수도 용이 - 반입과 매매 금지로 쌀값이 폭동”

 

미곡수집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묵인해오던 묵은쌀 소두 한 말까지도 가져올 수 없음은 물론 수집이 끝날 때까지는 일체의 신구곡 반입과 매매를 금지한다는 헬믹 군정장관대리의 성명이 발표되자 쌀값은 6백원대에서 7백원대로 뛰어오른 동시에 거리에서 그림자조차 감추고 말았다.

 

지금까지 시민들이 배급을 받아온 양은 쌀이 7작에 콩가루를 섞어서 잡곡 1홉8작이었는데 이 배급량을 가지고는 어느 가정을 물론하고 태반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밀시장에서 쌀을 사거나 촌에 가서 가져다 보태어가며 겨우 끼니를 이어왔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눈치 빠른 모리배는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당국의 발표가 나오기도 전부터 쌀값을 올려 순량한 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실정이었다.

 

그나마 월급쟁이들은 대돈변을 내서라도 사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일체의 반입과 매매를 금지하였으니 쌀 7작과 잡곡 1홉8작을 가지고는 도저히 다음 배급날까지 지탱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수집이 끝날 때까지 서너 달 동안을 장차 무엇으로 식량을 보충해야 옳을는지 앞길이 막연타 아니할 수 없는 터로 당국은 모름지기 수집에만 치중하지 말고 시민으로 하여금 식생활의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대책을 세워놓은 다음에야 국민도 안심하고 수집 완수에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세론이 높아가고 있다.

 

1인 1일의 표준 배급량 2홉5작 자체가 작은 것인데 그중 쌀은 7작밖에 안 된다. 같은 분량의 잡곡은 쌀에 비해 영양가가 적다. 게다가 배급이 며칠씩 늦어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배급만 갖고는 식생활에 부족했던 것이다. 정말 배급이 충분했다면 배급가보다 몇 배 비싼 값으로 시장이 형성될 리가 없다. 생존을 위해 시골 친척에게 얻어오거나 비싼 쌀이라도 조금씩 사먹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인데 개인적 소량반입까지 봉쇄하다니...

 

쌀 반입과 매매를 완전히 금지한 행정명령 제8호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다.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모든 방면에서 반대했다. 10월 23일 입법의원에서 지용은 식량행정처장을 출석시켜 질의를 벌였는데, 문답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홍성하 의원: 행정명령 8호를 시행하는 이유와 소량을 반입 금지함에 따르는 영향을 조사했는가?

 

지 처장: 자기는 상부 명령에 의하여 시행할 뿐이고 책임자는 아니니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김규식 의장: 그 말은 실언이니 취소하라. 식량행정처는 단순한 사무기관이 아니고 책임기관이다. 그러니 실언을 취소 않으면 더 질문할 필요가 없다.

 

지 처장: 아까 말은 자기가 최고책임자가 아니라는 말이고 전연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여운홍 의원: 소량반입을 허가함이 어떤가.

 

지 처장: 지난 12일 하루 동안 서울역에만 4,189가마가 반입되었는데 이와 같은 실정에 비추어 반입을 금지치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홍성하 의원: 금지 전에는 4,5백원 하던 것이 금지 발표로 8백원까지 갔으니 일반 시민의 곤란이 극심하다.

 

지 처장: 650원밖에 안 갔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1947년 10월 25일)

 

겨울을 앞두고 미곡수집과 식량배급이 중대 과제로 떠올라 10월 29일부터 입법의원과 군정청이 함께 긴급식량회의를 몇 차례 열고, 미국인 고문들이 참여하는 식량소위원회도 운영했다. 11월 21일 제6차 소위원회 뒤에는 쌀 소량반입 금지 해제 전망이 보도되었다.

 

“금지 중이던 쌀 소량반입 불일내로 용인될 듯”

 

(...) 최초 미인 고문 측에서는 소량반입이 수집에 많은 지장을 줄 것이라 하여 반입 금지를 고수하는 편이었으나 입의 측 위원이 2홉5작 배급이 확보되지 못한 현상에 있어서 소량반입 금지는 도시인의 소동을 유발할 우려까지도 있다고 말하고 충북에서는 벌써 백퍼센트를 수집하였다고 하니 소량반입이 수집에 큰 지장을 줄 것이 아니라고 말한바 미인 측에서도 그 뜻을 양해하고 헬믹 대장과 상의하여 반드시 소량반입을 허용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언약하였는데 불일간 이에 관한 성명서나 혹은 담화가 발표될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23일)

 

소량반입 허용에는 모든 조선인이 찬성하고 있었으니 지용은 처장을 비롯한 조선인 관리들이 이에 반대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번스와 힐 등 미국인 고문들도 그 뜻을 양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헬믹 군정장관대리나 그 윗선에서 꿈쩍 않고 있었던 것이다. 12월 17일에 이르러 안재홍 민정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미곡수집의 순조로움을 발표하고 며칠 내에 소량반입이 풀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8일)

 

그러나 민정장관까지 나서도 조선인의 의견은 통할 수 없었다. 딘 군정장관이 연말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식량 소량반입 해금 문제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반입하게 허가해서 일반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떠한 행동을 취할 때에도 조선인의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관점에 두고 생각한다. 지금 조선에는 소량의 미곡밖에 없다. 이번 연말연시에 반입을 허락하면 비싼 값으로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사서 소비하게 되고 보릿고개에는 더 곤란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신중 조사 고려한 결과 될 수 있는 대로 보류하고 완전수집이 되어 식량정책에 과오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

 

어린애가 좋아한다고 마취제 같은 것을 준다면 부모 된 사람은 맘 놓고 밤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구라파에 있을 때도 같은 경험을 한 일이 있는데 자유매매를 허락하면 식량기근이 올 것 같아서 통제한 일이 있다. 무기 화약 같은 것도 같은 입장에서 통제했다. 식량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 무기이다. 백퍼센트 수집되기 전에는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을 실례를 들어 말한 것이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28일)

 

그런데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12월 26일 현재 미곡수집량은 474만 석으로 목표의 92퍼센트에 도달해 있었다. 수집 계획은 1월 말까지이므로 수집이 대단히 순조로웠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군정 고위층은 ‘완전수집’이 될 때까지 미곡의 소량반입까지 불허하는 방침을 고집하고 있었다.

 

진주 첫 해 겨울에 미곡정책의 착오로 엄청난 고생을 했던 때문일까? 사실 고생은 조선 백성들이 하지 사령관보다 더 했는데, 지금 배급량도 부족한 채로 미곡반입을 이토록 엄격하게 봉쇄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조선인 관리들을 믿지 못해서 벌세우는 식으로 정책을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남조선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놓고 ‘조선인화’를 했다고 하면서 그 실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다.

 

위에 인용한 몇몇 기사로 1947년 여름 시중 쌀값은 한 가마에 5~6천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쌀을 공출한 농민에게 정부는 어떤 값을 주고 있었는가.

 

“쌀 수집을 강력추진 - 불법 운반과 매매면 압수”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10월 20일부로써 미곡 수집과 운반에 관한 행정명령 제8호를 공포하였다. 이 행정명령 8호는 중앙식량규칙 제6호의 규정을 수행하고 석명하며 미곡의 무허가 불법 운반과 매매를 방지하기 위하여 공포된 것으로 불법으로 운반한 미곡이나 배급소 이외에서 판매하는 미곡은 압수하여 도 식량사무소에 넘기게 되었으며 또 식량규칙 6호에 저촉되는 지금까지의 미곡 운반 또는 매매 허가는 그 양 또는 조건 여하를 막론하고 취소하여 강력한 수집을 기하게 된 것이다.

 

정부 수집의 미곡 가격은 정조 한 가마 660원으로 결정되어 입의에서는 생산비보다 싼 수집가격에 대하여 물의가 많아 그간 물가대책위원회에서 신중 조사 연구하여 오던바 정조 한 가마 660원을 800원으로 함이 적당하다는 것을 결정하고 23일의 분회의에 이를 보고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0월 24일)

 

같은 날 <경향신문>에 그 전날 헬믹 군정장관대리가 기자회견에서 미곡수집 자금에 관한 이야기를 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미곡 한 가마 640원씩 지불하면 539만2천 석에 127억6825만6천 원이 필요하다. 또 정미 운반 불가피한 손실 등의 비용 19억6268만8천 원도 고려하여 총액 147억 3894만4천 원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배급가격은 소두 한 말에 120원인데 정부 수집하는 이것을 배급하여 모두 129억4080만 원을 거두어야 된다. 미곡대금과 비용의 합계와 배급한 판매대금의 차이는 17억9814만4천 원이다. 이 부족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혹은 배급가격을 올림으로써 충당될 것이다.

 

덧셈에서 8백만 원의 착오가 있는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윤곽을 살피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차치해 두고... 1석을 두 가마, 즉 소두 20말로 본다면 539만2천 석의 판매가격은 129억4080만 원이 맞다. 그런데 매입자금 127억6825만6천 원을 539만2천 석으로 나누면 1석에 약 2,368원이다. 한 가마 640원이라면 1석 1,280원인데 갑절 가까운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정하지 않은 벼를 수집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큰 차이는 생길 수 없다. 아무튼 수매가격이 가마에 640원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해둔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2일자에 경기도 재무부 조사라 하여 해방 직후의 물가 변화를 보도한 기사가 있다.(“해방 후 서울 물가 평균 30배로 폭등”) 백미 1등 1백 킬로그램 당 8월 15일 32.70원에서 11월 말 910.1원으로 올라 약 28배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해방 시점에서는 한 가마에 20여 원이었는데, 2년 후에는 6천 원을 넘기고 있다.

 

1947년 12월 9일자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에 실렸다고 세계 각국의 물가지수와 임금지수를 제시한 기사 하나가 <자료대한민국사>에 소개되어 있다. 조사기관이 어디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략의 상황에 맞는 것 같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37년도를 100으로 한 도매물가지수가 미국 171, 영국 178, 프랑스 881, 일본 2,141인데 남조선은 68,641로 이탈리아의 1,911,000에 이어 세계 제2위라고 한다. 한편 임금지수는 미국 210, 영국 166, 프랑스 490, 일본 2,600으로 물가지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남조선은 16,730으로 물가지수의 4분의 1에 불과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보여준다고 한다.

 

1937년을 기준으로 한다고 했는데 1945년까지는 물가지수가 갑절까지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에만 몇 백 배로 올라간 것이다. 쌀값이 300배가량 오른 사실과 맞는다. 해방 후 28개월 동안 통화량은 6배밖에 늘어나지 않았는데 도매물가지수가 이렇게 크게 올라간 까닭이 무엇일까? 해방 당시 통화량은 50억 원을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1947년 12월 15일까지 325억 원을 넘어섰다는 기사가 있다.

 

“조은권 300억 돌파 - 환류자금 전무(全無)에 기인”

 

15일 현재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드디어 325억 원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를 전월 15일에 비하면 65억 원이 증발되며 2개월 전인 10월 15일에 비하면 120억 원이라는 광대한 증발을 시현한 것인데, 작년 연말의 통화동태는 11월과 12월의 차액이 불과 29억 원밖에 안 되었던 사실에 비추어 최근의 통화사정은 실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통화팽창은 추곡수집자금 방출(백억)에 기인하고 있는바 동 자금방출 예정액은 당초 총액의 반액인 60억으로 계정되어 있었으나 금융기능의 가속적 둔화로 인하여 방출자금의 환류가 순조롭지 못한 탓으로 예정 방출액보다 40억 원이나 초과방출하게 된 것이다.

 

작년도 추곡수집자금 방출은 수집자금 총액(80억)의 반액인 40억이었으며 잔액 40억 원은 환류한 예금으로서 조변되었던 것인데 금년도 추곡수집에 있어서는 예금으로 환류한 자금이 전무함으로 인해서 이에 수매대금은 전액 신권발행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방출된 100억 원은 상금 농가에 지불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 각 금융기관에 머물러 있으며 아직 구매화하지 않고 있어 최근의 물가폭등은 세말에는 해마다 생기는 계절적인 현상인데 한편 북조선의 통화개혁의 영향을 받아 환물(換物)운동이 성행하고 있어 계절적인 물가등세를 더욱 더 박차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6일)

 

추곡자금 120억여 원을 풀었는데 그 돈이 예금 등 경로를 통해 금융기관으로 돌아오는 것이 조금도 없어서 방출액 전액을 60퍼센트 통화증가로 메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남조선 경제가 마치 동력이 꺼져버린 기계 같다. 언제고 경제학자의 도움을 얻어 더 파헤쳐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