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으로 전기요금을 보낸 데 관한 기사 하나가 나왔다.

 

1945년 8월부터 1947년 5월말까지 남조선이 사용한 북조선 전력대금 계산 1억 4,000만원에 해당하는 제 물자는 미주둔군의 책임으로 지불하기로 되어 있던바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에 제4차로 수송한 물품을 도합하여 지불액은 그 반수에 미급하다 한다. 현재 이 사무를 담당한 미인관계에서는 일본 미국 등지에 출장원을 파견하여 물자 수집에 노력 중이라 하며 제5차 공급은 1948년 1월 3일부터 개시하게 되었다 한다. 제4차로 북조선에 지불된 물자는 다음과 같다.

 

전구 267,888개. 전동기 59대. 나(裸)전선 33톤366킬로. 피복전선 291,646미터. 전력케이블 4,827미터. 트럭타이어 265개. 변압기 108개. 휘발유 740드럼. 기관차용 윤활유 583드럼. 터빈유 339드럼. (<동아일보> 1947년 12월 25일)

 

1947년 11월 5일 일기에서 전기 사정을 이야기하던 중 1947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한 대목에 대해 의아한 생각을 적은 일이 있었다. 이런 대목이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 사이의 사용 전기요금 총액은 1억6천만 원으로 계산되며 그 금액 중의 일부(전액의 약 1할)는 지난 9월 하순에 지불되었는데 수자는 1938년의 통화가치를 기준한 액수이기 때문에 현재의 통화가치로 환산하면 실로 750억 원이라는 방대한 금액인데 게다가 전기 관계 부속품의 가격으로 따지면 1938년과 현재와의 사이에는 물품에 있어서는 2천 배 이상의 시세의 차를 내고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750억 원! 황당한 액수다. 이남의 통화량이 1947년 가을 중 약 2천억 원에서 3천억 원으로 늘어나고 있었는데 그 3분의 1 내지 4분의 1이 21.5개월 전기 값이라니! 앞에 올린 기사를 보더라도 그 기간 전기 대금은 1억4천만 원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가.

 

<동아일보>가 한민당 기관지로서 반공 반북에 앞장서는 입장에서 이북과의 관계라면 무조건 나쁘고 힘든 쪽으로 선전하려는 뜻 때문에 750억 원이라는 황당한 숫자를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 사령관을 용공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이승만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미군정의 ‘퍼주기’로 비난하려는 뜻이었을까? 같은 기사 속에 이 금액을 만들어낸 근거로 이런 대목이 있었다.

 

대가 지불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 사이의 사용 전량에 대해서는 1KW당 2전5리(1938년 물가 기준)씩 지불하되 현금 지불이 아니고 반드시 전력시설에 속하는 기재로서 지불하기로 되었으며 1947년 6월 1일부터의 사용량에 대하여는 1KW당 15전(1941년 물가 기준에 의해서 환산)씩 지불하되 역시 전기 물자로서 주기로 남조선과도정부 상무부장 오정수는 지난 5월 17일 평양에서 북조선당국과 협정하였으며 이의 유효기간은 1개년 간으로 정하고 쌍방에서 하등의 이의가 제출되지 않을 시는 동 협정은 그대로 연장하여 다시 1년간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상호 간주할 것을 규정하였다.

 

여기서 단위 ‘KW’는 ‘KW-시’의 혼동인 것 같고 두 번째 괄호 속의 “1941년 물가 기준”은 1947년의 오기인 것 같다. 그리고 협정 날짜 5월 17일도 6월 17일의 착오인 것 같다. 전력공급 협정 직후의 기사로 내용을 확인해본다.

 

“기계, 물자로 지불 - 북조선 전력 대가에 합의”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공급된 전력 대가에 대한 대금지불에 관하여는 6월 13일부터 18일까지 평양에서 남북 양 대표자가 회합하여 상호간의 협정을 보았다고 한다. 상무부장이 발표한 바에는 동 회합에서 미군 당국은 이 기간에 공급된 전력에 대하여는 기계와 물자로 지불하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이 기계는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게 될 물건으로 지불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17일 회합에서 양 대표들은 남조선에 8만 KW까지 증가 공급하는 데도 합의를 보았고 장차 북조선의 발전시설이 지불된 물자로 복구되는 때에는 10만 KW까지 전력을 증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 북조선에서는 남조선에 837,678,737KW를 공급하였는데 그 전력비는 16,334,735원으로 추산되는데 약 6개월 후에 지불될 것이다. 제1차 지불은 8월에 이행하게 될 것으로 그 기계와 기타 물자 중 최소한도 10퍼센트를 교부하게 될 것이다. 1947년 6월 1일부터 1948년 5월 31일까지의 기간 중에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공급할 전력에 대한 협정에 있어서는 매달 1개월을 기준으로 전력을 공급할 것과 남조선 측은 북조선 측의 계산서를 받은 후 1개월 이내에 매달의 전력비를 지불하기로 하였으며 협정이 만기되기 1개월 전에 그 갱신에 대하여 쌍방에서 다른 제의가 없는 한 협정의 기간은 자동적으로 1948년 5월 31일부터 1개년간 연장될 것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22일)

 

이 기사 아래 문단의 ‘KW’도 역시 ‘KW-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1개월 반의 기간은 1만5천여 시간이므로 위 기사의 8억3천여만 KW-시를 이것으로 나누면 평균 약 4만5천 KW가 된다. 평균 송전량으로 보기에 합당한 분량이다.

그 대금이 1천6백여만 원이라면 1KW-시에 약 2전씩이다. 11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말한 2전5리와 큰 차이 없다. 그런데 실제 지불액은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1억4천만 원으로 나와 있다. 1천6백여만 원을 물가상승에 따라 조정한 금액이 1억4천만 원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11월 9일은 대금 지불이 진행 중일 때인데 그 시점에서 “750억 원”을 떠들어댄 <동아일보>의 창작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11월 18일 아침에 약 1시간 반 동안 북쪽으로부터의 송전 중단 사태가 일어났다. 재개 후에도 송전량을 1만5천 KW 줄이고 있다가 이틀 후에야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송전 상황은 금세 다시 불안하게 되었다. 남쪽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송전량이 줄어들 수도 있고 끊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 큰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요즈음 경향각지를 통하여 초저녁과 새벽에 걸쳐 전기가 꺼지어 많은 불편을 느끼고 있는데 이러한 정전은 북조선의 송전이 반감한 관계로 중요 공업지대와 긴급한 여러 곳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전기회사 측에서 부득이 정전하고 있는 때문이다. 즉 18일 정전되었다가 21일에 원상회복한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대한 송전은 그 후 3일 후인 25일부터 다시금 송전량이 반감하여 이래 매일 평균 5만 킬로 정도를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 때문에 경전 관내에 최대 5,000킬로 남전 관내에 제한배전하고 있던바 부족한 전력을 보충키 위하여 영월발전소와 청평수력전기발전소로부터 약 1만7,000킬로를 돌리고 있으나 일반의 전력 절약에 대한 인식이 박약한 관계로 12만 킬로면 족할 전력이 이미 5할이나 더 소비하고 있어 이상과 같이 부득이 지역적으로 정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금후 북조선으로부터 지금과 같이 종전의 최대 10만 킬로가 반감한 5만 킬로 송전이 계속할 여부인데 관계방면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자재 기술관계로 북조선의 발전력이 최대 130만 킬로로부터 현재에는 반감하여 70만 킬로 내외로 감소하고 또한 북조선에서도 남조선 모양으로 전력소비량이 굉장히 많아져 금후의 송전량 증대가 그리 믿어지지 않다고 하는 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남조선당국의 근본적 대책 즉 전원(電源)의 신속한 개발과 엄중한 소비규정이 요청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30일)

 

이 불안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 두 갈래로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선상공회의소는 발전소 건설 등 전력 증산 건의서를 12월 3일 하지 사령관과 딘 군정장관에게 제출했고(<동아일보> 1947년 12월 7일) 군정당국은 절전을 위한 ‘전력소비규칙’을 12월 6일 발표했다. 네온(공동표지용은 제외), 전식등(電飾燈), 광고등(간판등은 제외), 옥외등(공동 교통 작업용은 제외), 전기 목욕탕, 가정용 전열기 일체(병원용은 제외), 가정용 전기냉장고, 가정용 양수펌프 등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이 규칙에 “이 규칙은 외국인을 포함한 전 수요가에 적용함”이란 항목이 붙어 있어 이채롭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6일) 국민정서를 생각해서 붙인 항목이었을까?

 

전력소비규칙은 민정장관의 행정명령 형식으로 발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소비규제가(미국인에게까지 적용되는) 민정장관의 권위로 부족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하지 사령관이 직접 나선다.

 

“전력의 공정분배를 조처”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남조선에 전력의 부족이 극심하고 이 상태가 계속될 상태임을 인정하며 따라서 전력의 공정 적당한 분배의 필요를 인정하여 비상시기 중의 전력사용과 분배를 관리할 권한을 가진 비상시 전력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지령하였는데 이에 관한 행정명령 제9호가 16일 공보부를 통하여 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위원회는 일곱 사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에게는 남조선 각인(개인, 단체, 정부를 포함)에 대하여 전력의 생산 분배 사용에 관계된 일반적 특정적 명령 지시 우선순위와 제한을 발령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7일)

 

비상시전력위원회는 바로 이튿날 비상시전력명령 제1호를 발표했다.

 

“평균 8시간의 계획송전 - 비상시전력명령 1호 발동”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행정명령 제9호로 비상시전력위원회를 설치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은데 17일 동 위원회 위원장 A. C. 워커 씨는 비상시전력명령 제1호를 다음과 같이 발령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19일부터는 시내에 평균 8시간의 계획송전을 하기로 되었으며 일반 전력 사용금지 범위도 발표되었다.

 

1. 전력 사용을 금지하는 범위는 (가) 사무소 공공건축 가정요리점 기타 건물에서 전열의 근원으로 사용, (나) 요리목적으로 사용, (다) 장식 又는 광고용 전광으로 사용 등이고,

 

2. 가정 전광(電光)용 전력은 오전 5~8시 및 오후 5~10시에 한하여 사용하는데 공업전력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에 한하여 사용할 수 있다.

 

3. 각 경찰서장 정부부서 장관 시장 군수 부윤 도사 읍장 및 면장은 소관 인민 전체에게 본령을 즉시 전달해야 된다.

 

4. 이 명령은 1947년 12월 19일부터 시행되는데 위반자는 처벌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9일)

 

가정용 전기는 전등이 꼭 필요한 아침저녁 시간대에만 보내고 그 밖의 시간에는 산업용 전기 공급에 주력하겠다는 ‘계획송전’ 정책이다. 그러나 산업용과 가정용 배전시설이 따로 되어 있지 않은 형편에서 실시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을 경전 업무부장 오기영의 시민에 대한 당부말씀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동안 전력문제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여왔는데 드디어 19일 오전 영시부터 계획 송전을 실시하기로 되었다. 송전시간은 시내 일반 가정에는 매일 평균 8시간을 보내는 매 동리에 따라서는 배전시간 즉 아침 5시부터 8시까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보내는 곳도 있을 것이고, 또 어느 동리에는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이렇게 구역에 따라 보내는 시간이 다른 곳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내에는 낮 전기는 일체 안 보내나 영등포 인천 등 공업지대에는 낮 전기를 보내기로 되었는데 낮 전기의 혜택을 입는 일반가정에서는 적극 협력하는 뜻에서 꺼주기 바란다. 이는 오로지 생산부흥을 위하여 공장지대에 송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여 주기 바란다. 그리고 영등포에서는 각 동리마다 자치반을 조직하여 절전에 협력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8일)

 

비상시전력위원회는 12월 17일의 명령 제1호에 이어 이튿날은 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전력 공급이 평시보다도 줄어들 때 우선 공급 대상을 정한 것이다.

 

“전력의 우선 사용 - 명령 2호로 순위 결정”

 

전기 사용에 관한 중앙청 비상전력위원회의 명령 제1호는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동 위원회에서는 18일 다음과 같이 명령 제2호를 발령하였다.

 

1. 제한운영을 위하여 전력의 필수사용 우선순위를 좌와 여히 선정함.

(가) 제1위 수도, 통신, 탄광, 연탄공장, 병원, 철도, 형무소, 유치장.

(나) 제2위 정미정곡소, 와사(가스)공장, 필수 군용, 경찰용, 해안경비대, 국방경비대용 시설 및 필수 정부활동에 의한 사용.

(다) 제3위 필수 공장, 기업체 및 시설체에 의한 사용, 필수 가정 및 숙사 전광용

 

2. 하기 시설 운용에 필수한 전력은 시간제한 없이 차를 허가함.

수도, 통신, 탄광, 병원, 형무소, 전광신호 스위치, 흡수기 및 필수전광을 위한 철도용, 와사공장, 군사본부 및 운영시설, 경찰,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용 (<경향신문> 1947년 12월 19일)

 

발전선 도입 계획까지 나왔다. 11월 21일자 일기에 소개한 오기영의 수필에 이 발전선이 나온다.

 

심각한 현 남조선 일대의 전력기근을 타개하기 위하여 군정당국에서는 이번 부산, 군산, 인천 등 3항에 2만 킬로 발전선 1척씩을 배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는 바, 17일 미인 기사와 남전 기술자 수 명이 군산에 도착하여 이에 관한 상세한 기사를 하는 한편 남선전기회사 지점에서도 관계서류를 작성하여 가지고 지난 19일 상경하였다 하는데 이 시설이 예정대로 실시되면 남조선의 전력문제는 상당히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조선일보> 1947년 12월 23일)

 

대중이 불편과 불안을 느끼는 문제를 놓고 반공-반북 세력에서 이것이 공산주의자들 소행인 양 선전하고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12월 9일 조선민주당 담화문의 아래 내용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북조선 수력전기는 총 발전량이 140만 킬로와트인데(현재 20만 킬로는 휴전) 그중 수풍댐의 60만 킬로 중 30만 킬로의 발전기는 소련군이 반출해 갔다. 현재의 북조선 총 발전력은 90만 킬로인데 그중 15만 킬로를 만주에 보내고 북조선에서 30만 킬로를 소비하므로 45만 킬로의 남은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립으로 남조선에 송전력을 감전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0일)

 

그러나 당국자들은 이북 측이 고의로 송전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조건과 시설 상태 때문에 부득이한 것이라고 거듭거듭 확인했다. 사실 이남의 발전용량도 최대 20만 KW였지만 실제 생산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북에서는 안정된 대남 송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최선을 다해 전기를 보내주는데도 이남에서는 전기 때문에 난리가 날 지경이었다. 남조선과도정부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주둔군사령관의 명령이 나와야 했다. 이북 당국자들이 이남을 적대하고 있었다면 전기 하나만 해도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전기를 무기화할 뜻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