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민족자주연맹(민련)에서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담화가 나왔다. 민련은 아직 정식 출범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 담화는 엄밀히 말하면 그 준비위원회에서 나온 것이었다.

 

민족자주연맹 선전부에서는 10일 기자단정례회견석상에서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동연맹의 주장은 누차 천명한 바와 같으며 UN위원단도 총회결의 그대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 통일정부수립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확신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12월 1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중간파의 조직 정비를 향한 움직임이 김규식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이 움직임이 ‘민족자주연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구체화한 것은 10월 1일의 일이었다.

 

2삭여 전부터 김규식 박사를 중심으로 태동된 4단체(좌우합작위원회, 민주주의독립전선, 시국대책협의회(시협), 미소공위대책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공협)) 통합 문제는 1일 오후 1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관계 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참석 하에 민족자주연맹으로 발족하기로 되어 그 결성준비대회를 개최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10월 2일)

 

이 대회 개회사에서 김규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년 9월부터 고 여운형 씨와 협력하여 좌우합작을 기도하여왔었는데, 이는 미소공위의 속개와 남북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현재 어떤 정세 하에 처해 있는가? 지난 5월 공위는 재개되었으나 상금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정돈상태에 있으며, 좌-우의 분열은 날로 커져가고 있으며, 그리고 남-북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형 아래 중간진영은 무엇을 할 것인가? 좌-우익의 합작도 중하거니와, 이보다 긴급히 요청되는 것은 우선 중간진영의 단결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진영의 단결조차 얻지 못하면서 어찌 좌우합작을 바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좌우합작은 제2의 과제이고, 우중좌(右中左)의 각층은 각기 진영의 결속을 성취한 후에 이 3자가 한데 뭉치어 숙망의 민족통일을 기하고자 한다.” (<남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72쪽)

 

중앙청 회의실을 이용했다는 사실로 보아 미군정 고위층의 어느 정도 지지를 받은 움직임으로 추정된다.(<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95-96쪽에는 헬믹 군정장관대리가 을지로 입구의 조선화약 건물(지금 을지서적 자리)을 민련 사무실로 제공한 사실이 적혀 있다.) 좌익은 이남에서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었고, 이승만이 이끄는 우익의 기세가 등등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우익은 유엔위원단 오기 전에 남조선 총선거를 시행하라고 미군정을 들볶고 있었다. 극우파의 세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미군정이 중간파 조직을 지원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민련의 추진은 빠르지 않았다. 결성준비대회 후 40여 일이 지난 11월 12일에야 선언 규약 등 초안을 마련했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14일) 그러고도 결성식 일정은 이듬해 1월 17-18일로 늦춰 잡았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28일)

 

민련 결성은 남북지도자회의 추진과 유엔위원회의 활동 대응에 1차 목적을 둔 것이었는데, 유엔위원회 도착이 연초로 예정되어 가고 있던 상황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한독당이 각정당협의회(정협)을 통해 중간파와 함께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고 나오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련에 동조하는 중간파 정당, 단체들이 한독당이 중심이 되는 정협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12월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김구가 이승만의 남조선 총선거 지지로 돌아서자 민련 추진 움직임이 빨라진 사실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12월 2일 민련 준비위원회 정치위원회의에서 ‘유엔위원회 대책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조선일보> 1947년 12월 4일) 그리고 바로 이어 결성식을 12월 20일로 앞당기는 결정이 나왔다. (<조선일보> 1947년 12월 6일)

 

민련 출범을 앞두고 12월 15일 그 동안 중간파의 핵심 거점이던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되었고, 12월 20일 예정대로 민련 결성식이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열렸다. 김규식의 개회사 요지는 1947년 12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우리는 정권 쟁탈이나 지위 획득이나 당파적 싸움이나 사대 맹종을 떠나서 어디까지나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링컨이 말한바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으로써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전심전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며 문명 퇴치와 계몽사업은 본맹의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이다. 책임감과 양심이 풍부한 민족자주적 정신으로 동아 일우에 일개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국가를 건설함에 이바지함이 최대 목적이다. 미-소의 불화나 세계전쟁을 통하여 조선의 출로를 구하려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경향이며 민족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서중석은 민련 결성을 중간파의 확고한 세력화로 해석한다. 1946년 초 반탁운동을 둘러싸고 이남 정치세력은 민주의원 중심의 우익과 민전 중심의 좌익으로 갈라졌는데, 그해 10월 좌우합작 7원칙 발표를 계기로 중간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는 본다. 1947년 들어 중간파의 존재가 분명해지는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좌익과 우익, 중도좌-우파로의 분립은 1947년에 들어와 확연해졌다. 이승만-한민당은 단정 운동을,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펴면서 양 세력이 합작위원회를 맹렬히 공격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 구성에서 김규식 등 합작파가 제외되었다. 더구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 김규식 등의 합작파와 김구-이승만의 반탁운동파는 심한 갈등을 가졌고, 평소 김규식과 함께 미소공위를 지지하였던 안재홍-국민당계와 권태석-신한민족당계가 한독당을 탈당하여 신한국민당, 민주한독당을 만듦으로써 우익의 극우와 중도우파로의 분리는 완성된 감이 있었다. 이와 같이 우익 합작파는 1946년 하반기 이후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7년 하반기에 이들이 중도우파 중심의 통합적 정치조직으로 민련을 만들려고 한 것은 그간의 과정을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남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74-75쪽)

 

민련이 정당 형태를 취하지 않은 것은 김규식이 정당 활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련과 같은 시기에 중간파의 통합정당도 만들어졌다. 1947년 10월 19일 결성된 민주독립당이다. 홍명희가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다가 대표로 선출된 민주독립당에 안재홍·김병로·김호·박용희·이극로·김원용 등이 참여한 것을 보면 중간파를 망라한 정당이었다. 홍명희의 창당대회 개회사를 실은 <서울신문> 1947년 10월 21일자를 구해 보지 못했으므로 <벽초 홍명희 연구>(강영주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 473쪽에 일부 발췌된 내용을 옮겨놓는다.

 

“지금 조선사람으로 독립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독립을 하되 대다수는 민주를 원하고 있으니 민주가 건국이념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면 민주는 미국식 민주냐 소련식 민주냐? 우리는 다대수가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의 발호를 원치 않는다. 만인이 다 자유로웁고 조선 현실에 맞는 적당한 민주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강영주는 민주독립당 창당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도 설명했다.

 

민주독립당의 창당에 대해 당시 중도적 성향의 신문들은 “해방 이후 국내 정계의 거대한 숙제가 실현되었다”든가, 앞으로 우익 정계에는 한국독립당-한국민주당-민주독립당의 “3각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하는 등,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큰 기대를 표명하였다. 반면 좌익측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민주독립당은 중간정당 기치하에 발족한 모양이나 원래 조선과 같은 정세에서는 중간당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적인 논평을 가하였다. (<벽초 홍명희 연구> 471쪽)

 

민주독립당은 민련에 참여한 20여 정당-단체 중 주축이 되었으니, 정당으로서 민주독립당과 협의체로서 민련이 중간파를 나란히 대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상황 전개에서 민주독립당은 큰 역할을 맡지 못했다. 당시 <조선연감>에서 “종래 비조직적이며 지리산만하던 이 층이 과연 얼마나 역량을 발휘할는지는 전혀 미지수”라 한 논평(<벽초 홍명희 연구> 471쪽)에도 얼마간 타당성이 있었겠지만, 단정 반대와 남북협상을 둘러싼 김구와 한독당의 거취에 중간파가 말려든 상황에 더 큰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