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에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 대표들이 모여 두 기구의 통합 방침을 의논하고 이튿날 아래와 같은 내용의 ‘협상서’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본인 등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 양 영수의 의도를 받들어 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대표하여 대한민국 29년 12월 2일 민족통일총본부 회의실에서 국민의회에의 민대(입의 측을 포함함) 연입에 관하여 협상한 결과 좌기 원칙에 의하여 원만 타결을 득함.

 

1. 우리는 국민의회 의원선거법에 의하여 조속한 기한 내에 자율적으로 총선거를 단행함. 단 UN감시 선거가 우리의 기도에 일치할 시는 우리는 차에 협조할 것이다.

 

2. 제44차 국민의회 임시의회(완전합동회의)는 12월 12일 오후 1시에 속개할 것.

 

3. 전항 회의에 부의사항을 재심하기 위하여 국민의회 한국민족대표자대회에서 각 3명씩 위원을 좌와 여히 선정함

국민의회 측: 최석봉 조상항 신일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측: 명제세 강인순 최규설

 

4. 우를 증하기 위하여 협상서를 2통을 작성하고 기 1통씩을 보관함

 

대한민국 29년 12월 2일

 

국민의회대표: 최석봉 조상항 조대연 이단 이운 신일준 박윤진

한국민족대표자대회대표: 명제세 이윤영 신익희 박순천 강인순 최규설” (<경향신문> 1947년 12월 4일)

 

국민의회는 중경임시정부 의정원의 전통을 이어받은 기구였다. 1946년 2월 1일 결성된 비상국민의회는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심화 과정에서 임정 세력을 중심으로 우익을 결집시킨 기구로서 임정 헌장의 계승을 표방했다. 그러나 2월 14일 김구와 이승만이 지명한 28인으로 구성한 그 최고정무위원회가 출범과 동시에 군정사령관 자문기구인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간판을 달면서 성격이 애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7년 2월 중순 비상국민의회 대의원대회에서 기구 명칭을 ‘국민의회’로 바꾼 것은 우익의 재결집을 노린 조직 강화 시도였다.

 

국민의회 출범 때 가장 중요한 포섭 대상이 독촉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민통)이었다. 두 기구는 이승만의 조직이었는데 이승만의 미국 체류 동안 국민의회 측에서 반탁운동을 명분으로 통합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 통합은 될 듯 말 듯 하다가 안 되고 말았고, 이승만은 4월 하순 귀국 후 자기 조직을 민족대표자대회(민대)로 정비했다.

 

국민의회 측이 이승만의 조직을 통합(흡수)하려고 애쓴 것은 김구의 의지였다. 김구는 한 살 연상이고 임정 선배인 이승만을 “형님”이라 부르며 공식적으로 앞세우는 일방 실제 조직을 장악함으로써 실력 확장을 시도한 것이었다. 자기 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국민의회 주석으로 이승만을 추대함으로써 조직 통합의 계기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47년 9월 16일 국민의회 주석 취임 거부를 성명으로 발표했다. 그에 앞서 있었던 국민의회와 민대의 통합 시도도 물론 수포로 돌아갔다.

 

이승만이 9월 16일 성명에서 주석 취임 거부와 함께 남조선 총선거를 주장한 점이 눈에 띈다. 국민의회의 남조선 총선거 반대 노선이 취임 거부 이유라는 사실을 명시한 것이다.

 

“지난 3월에 조직되었다는 정부에 내가 주석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니 나의 고충을 여러분이 양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남한만으로라도 총선거를 행하여 국회를 세워야 국권 회복의 토대가 생겨서 남북통일을 역도(力圖)할 수 있을 유일한 방식으로 믿는 터이므로 누구나 이 주의와 위반되시는 이가 있다면 나는 합동만을 위하여 이 주의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김 주석은 이에 대하여 이의가 별로 없을 줄을 내가 믿는 터이나 임정을 지켜 오던 몇몇 동지와 갈리기를 차마 못하는 관계로 심리상 고통을 받으시는 중이니 일반 동포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요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문로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무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 민족이 다 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총선거에 대하여 나는 개인적 무슨 욕망을 두지 않는 터이요 또한 나는 자초(自初)로 평민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므로 정부 밖에서 정부를 옹호하는 책임을 자담하는 것이 나의 원하는 바이니 일반 동포는 나의 고충을 양해하기 바란다.” (<경향신문> 1947년 9월 17일 “국민의회 주석을 거부, 남조선 총선거를 주장 - 이 박사 선언발표”)

 

원래 민대가 국민의회와의 통합을 꺼린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의회의 임정 법통 주장에 있었다. 그런데 1947년 7월 중순의 민대 회의에서 통합 논의가 큰 진전을 본 것은 “이승만 박사의 임정추진 지지의 표명을 계기로 의견 상위는 일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7월 15일 국민의회 상무위원회와 민대 교섭위원회가 나란히 열려 합동 방식을 국민의회 강화 쪽으로 결정이 되어 간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향신문> 1947년 7월 16일)

 

이승만이 임정 법통을 지지한다는 것은 김구에 대한 큰 양보였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는 기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통합 교섭이 결국 좌초되고, 바로 이어 이승만이 주석 취임 거부 성명에서 남조선 총선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자와는 합동할 수 없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요구가 무엇이었는지는 자명하다.

 

11월 30일과 12월 1일, 김구는 연일 이승만을 찾아가 만났고, 만난 뒤에는 이승만의 남조선 총선거 주장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12월 1일에는 이승만이 그 동안 참석하지 않던 국민의회 회의장을 찾아갔고, 김구는 그 자리에서도 이승만의 남조선 총선거 주장에 화답했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씨는 1일 국의 제14차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치사를 하였다.

 

이 박사 치사: “우리 민족은 일심이 되어서 국권을 회복하여야 된다. 과거의 모든 관념적 의사는 막론하고 주저 없이 일단(一團)이 되어 우리 힘으로 총선거에 임하기 위하여 제공은 강력하고 철저하게 나가라. 우리 민족간에 외방세력을 이용하여 분열을 일삼는 자가 있는데 배격하고 단결해야 된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온 기회를 잘 포착해서 독립정권을 쥐도록 힘쓰면 우리 두 사람도 그 일을 담보할 터이니 취대사소(取大捨小)하는 정신으로 매진하자.”

 

김구 씨 치사: “이 주석 말씀은 나하고 같은 것이다. 외간에는 주석과 나와 사이를 격리시키려는 분자들이 농간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은 위선 일소시켜야 한다. 말인즉 이 주석은 민대(民代)를 가지고 고집한다고 하나 우리 양인은 절대 합일로 나가는 것이니 민대도 국의도 독립정부가 설 때에는 처소를 가릴 바 아니다. 이 주석은 남조선 단정을 나는 남북통일을 각기 주장한다고 선전하는 자가 있으나 이것은 상위된 선전이다. 이 주석도 ‘정부가 설 때에는 남북을 합한 정치를 위한 일이 어찌 남한만 가질 것인가’ 하고 말씀했다. 여기에 본의 아닌 선전이 외국까지 전파되어 있음은 유감이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3일, “우리 양인은 동상동몽(同床同夢) - 국의서 이-김 두 영수 치사 교환”)

 

이 치사 교환이 있은 다음날 국민의회와 민대 대표들이 모여 통합을 위한 협상서를 작성한 것이다. 노골적인 거래였다. 이승만은 이 거래를 통해 종래 반탁세력 중 남조선 단독선거에 반대해 오던 김구 세력을 잠재웠다. 김구의 ‘투항’에 내부 반발이 있었던 사실은 며칠 후 한독당이 성락훈, 정형택, 김경태 3인을 제명한 조치에서 알아볼 수 있다. (<서울신문> 1947년 12월 9일) 세 사람은 각정당협의회(정협)의 한독당 대표로 참석하던 사람들이었다.

 

김구는 이 거래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두고 보겠지만 민대 통합은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지난 초여름에도 한독당은 미소공위에 대한 경직된 자세 때문에 국민당과 신한민족당 출신 당원들을 잃었다. 이번에도 민대 통합에 대한 집착 때문에 ‘민족주의의 보루’로서 김구의 상징성이 큰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십여 일 전까지 정협을 통해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던 김구의 변신이 이번에는 너무 빨랐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