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1947년 12월 중 <한성일보>에 연재하신 글 “삼균주의(三均主義)와 신민주주의”를 읽어봤습니다. 제가 읽은 것은 <민세 안재홍 선집 2> 228-243쪽에 수록된 것인데, 원래의 연재에 약간의 첨삭을 가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더군요.

 

삼균주의는 원래 조소앙 선생이 정리한 것으로 임시정부 시절 한독당 이념으로 채택되고 임정 건국강령에도 채택된 것이죠. 1941년 11월 임정 건국강령에 “삼균주의로써 복국(復國)과 건국을 통해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과 독립ㆍ자주ㆍ균치(均治)를 동시에 실시할 것”이란 대목이 들어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해방 한 달 후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글로 해방 조선의 이념적 지표를 제시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넘게 지난 지금 신민주주의와 삼균주의의 접점과 관계를 밝히신 것이 눈길을 끕니다. 작년 봄 한독당에 합류했다가 1년여 만에 갈라져 나오신 터에 한독당 이념인 삼균주의를 제창하시는 뜻을 설명해 주시지요.

 

안재홍: 지난여름 한독당에서 나온 것은 본의가 아니라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탈당’이 아니라 ‘출당’이었지요.

 

독립건국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념을 세워야 하는데 그를 위한 노력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오랜 기간의 모색을 통해 삼균주의라는 이념을 채택해 놓았고, 그것을 새 국가의 이념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새 이념을 세울 바탕으로서 큰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비록 한독당 당원 자리를 지키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그 훌륭한 가치를 받드는 마음을 표현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쓸 때 나는 삼균주의의 이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 내용을 알게 되면서 내가 생각한 신민족주의, 신민주주의와 통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신민주주의와는 표리(表裏)를 이룬다고 할 만큼 같은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표리관계라 함은 신민주주의의 실천 방안을 담은 것이 바로 삼균주의라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삼균‘주의’라기 보다 삼균‘제도’로 파악하면 이념으로서의 신민주주의와 방안으로서의 삼균제도 사이의 표리관계가 더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이 글의 앞부분에서 65년 후의 사람들도 절실하게 받아들일 내용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부분을 조금 발췌합니다.

 

지력(智力)을 고르게 하고 부력(富力)을 고르게 하고 권력(權力)을 고르게 하는 것이, 이른바 ‘삼균’이다. 지-부-권 셋은 인생생활의 기본요건이니, 이것이 편재(偏在) 독천(獨擅)됨이 없도록 골고루 분배 소유되는 균등사회-공영국가를 만드는 것이 ‘삼균제도’이다.

 

그 윤리적 발동과 행사의 점에서는 지력이 원본적인 것 같지마는, 대중적이요 또 사회적인 제약 기능에서는 부력이 결정적인 조건으로 되어 있다. 현대적 사회에서 일체를 지배하는 것이 부력 즉 경제적 토대인 것이요, 그 위에 정치적 기구 즉 권력체제가 건조되는 것이며, 따라서 지력 즉 교육문화의 제 기능이 결정되는 것이다.

 

고금동서 일체의 사회문제, 인세의 갈등이 모든 불평등에서 기인된 것이거니와, 비록 천태만상으로 움직이는 불평등이란 자도, 그 밑동인즉 실은 부-권-지 셋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불평등을 발본적으로 불식하는 것은 이 삼균제도요, 삼균의 실천을 정강정책으로 하는 곳에 문득 삼균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이 삼균주의의 성립되는 이유이다.

 

삼균제도 혹 삼균주의는 민주주의와 잘 대비되나니, 그는 신민주주의의 기본요소로 된다. 민주주의는 그 발생의 역사가 신권제왕 또는 봉건귀족의 권력독점, 즉 정치적 불평등에 기원한 것인 만큼, 그 당시에 있어서 정인(町人)계급 혹은 상공계급으로서 형성된 자본가계급의 사람들이 그 신흥세력으로서의 권력의 요구 형태로서 성립된 것이요, 삼균주의 그것은 다만 권력 문제에만 그치지 않아, 부와 지에까지 그 명확한 균등을 요청하는 점에서, 독특한 제도인 채 또 주의라고도 규정된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그에 앞서 임시정부에서도 권력의 균등, 즉 정치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교육과 재산의 균등을 그와 나란히 주장한 사실을 살피며, ‘경제민주화’ 얘기가 이 사회에서 왜 이렇게 늦게 나왔는지 이상할 정도입니다. 지력과 재력의 균등을 중시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영국의 의회제도를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프랑스대혁명을 진정한 출발점으로 봅니다. 당시 민주주의혁명의 주체는 재산 없고 교육 못 받은 서민대중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었습니다. 부르주아 계층은 지력과 부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권력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당시의 혁명은 정치권력의 분배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권력이 일단 왕과 귀족의 독점에서 풀려나자 서민대중이 더 큰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력과 부력의 균등이 없는, 권력의 균등만을 내세우는 민주주의로는 제대로 된 균등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인의 고통의 원인은 이민족 지배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더 큰 실제 원인은 불평등에 있었습니다. 일제 통치 이전부터 있던 문제인데 일제 통치 때문에 더 심해진 것이죠. 일제의 퇴각은 민족 해방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불평등의 해소 없이는 진정한 민족 해방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김기협: 그 점은 1920년대 후반의 공산당운동을 비롯한 좌익운동에서 제기해 온 것이죠. 선생님 말씀하시는 “부력의 균등”이란 것이 좌익의 주장과 합치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주장을 하면서 우익을 자처하는 선생님이 좌익과의 차이를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안재홍: 나는 ‘균등’을 말할 때 ‘평등’과 차이를 생각합니다.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점에서는 나도 좌익과 생각이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평등 해소의 목적을 절대적 평등의 실현에 두지 않습니다. 지나친 불평등이 없는, 적절한 균형을 갖추는 균등을 나는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도 공산혁명의 필연성을 역사 속에서 본다고 하는데, 나는 마르크스 역사관을 진정한 역사관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는 공산혁명의 필요성을 전제로 재단된 것입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 속에서는 절대적 평등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비쳐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협력의 성향과 경쟁의 성향이 아울러 있습니다. 지력, 부력, 권력의 불평등이 너무 심하면 불평등을 줄이려는 반발이 저절로 나타나고, 반대로 불평등이 너무 작으면 경쟁을 통해 차이를 늘리는 현상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사적 소유권을 폐지하여 경쟁을 아주 없애고 완전한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불평등에 대한 극단적 반발일 뿐이며,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해방 조선의 상황을 봐도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의 지주 우대정책 등을 통해 부력의 불평등이 너무 커졌고, 그에 따라 지력의 불평등도 심하게 되었습니다. 불평등을 대폭 완화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육수준이 높은 지주 계층을 완전히 배제하고 건국 과업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북의 토지개혁이 너무 급속히 시행된 데 따르는 문제점들이 그 동안 드러나 왔습니다. 인적자원의 손실이 당장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북사람의 거의 절반이 남쪽으로 넘어왔어요. 그들은 특권층이기 이전에 교양인이요, 지식인입니다. 교양인과 지식인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이북의 변화가 민족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소련의 모방을 향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김기협: 이북의 변화가 소련 사회의 모방을 향해 가는 것을 걱정하시는데, 이남에서는 미국 사회의 모방이 그 못지않은 걱정거리 아닙니까? 다수 대중의 만족과 복리라는 면에서는 이북 사정이 이남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 민주주의 원리에서는 그 점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안재홍: 내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함께 제시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극단으로 가면 다 문제가 있어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 그대롭니다. 이남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반탁운동이 반민족적인 단독정부 수립으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를 외면하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민족주의를 외면한 이북의 민주주의는 미풍양속을 저버리는 데서 시작해, 인간의 행복을 묵살하는 길로 나아갈 것이 걱정됩니다.

 

김기협: 며칠 전 장덕수 씨가 암살당했지요. 하지 사령관은 김구 선생의 교사에 의한 것으로 확신하는 모양입니다. 지난 6월 하순 반탁 시위대의 투석사건과 관련해서도 그분과 미군정 사이에서 고초를 겪으셨는데, 이번에도 민정장관 입장이 많이 어려우시겠죠?

 

안재홍: 하지 사령관이 장덕수 씨를 무척 좋아한데다가 김구 선생과 장 씨의 나쁜 사이가 널리 알려져 있어서 어려운 상황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민정장관 역할 아니겠습니까?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군정청이 민족 지도자에게 결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내 최선을 다해야지요.

 

김기협: 그런데 요즘 김구 선생의 행보에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반탁 문제가 사라진 이제 이 박사와 한민당 등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결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조소앙 선생이 나서서 각정당협의회 추진하는 것을 보고 김구 선생의 뜻이 온전한 민족주의로 돌아온 것으로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이 박사의 분단건국 노선을 지지하는 담화를 거푸 발표하시는 것을 보고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한독당을 떠난 것은 반탁운동과 미소공위 때문이었죠. 김구 선생의 지도력을 받들어온 선생님의 자세가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께서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 박사를 만나고 이 박사 노선 지지를 선언하시는 것을 보고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시는가요?

 

안재홍: 나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분의 최근 입장을 나로서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분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