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영의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인도의 비극"

 

인도가 삼백여 년의 영국의 기반(羈絆)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그러나 종파의 상쟁으로부터는 해탈하지 못하였다. 힌두도 인도인이요 모슬렘도 인도인이다. 이들은 다 같이 영 제국주의와 싸웠고 다 같이 자유 인도를 위하여 싸웠다. 그러나 영 제국이 물러가매 이들은 갈렸다. 드디어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나라로 쪼개진 것이다.

 

아무리 인도와 파키스탄이 우호의 인방(隣邦)이 된다 하여도 이것은 비극인 것을, 두 나라는 서로 피를 흘리며 싸움은 그칠 길이 없다. 서부 판잡에서 피살된 힌두인과 씨크인이 이십만 명이요, 동부 판잡에서 피살된 모슬렘인이 십만 명이라 하니 이들의 종파상쟁이 얼마나 산비(酸鼻)할 참극인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보다 못해 간디 옹은 결사의 단식을 결행하였다. 영 제국과 싸우는 것까지도 이 외적과 싸우는 것까지도 무저항과 비폭력을 설한 이 성웅이 이제 자유로운 인도가 자유롭게 탄생하지 못하고 종파가 갈려 나라는 두 개로 쪼개져, 그리고 서로 치고 죽이는 양을 볼 때에 그 비통한 심경은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바이거니와 싸움을 그치지 아니하면 죽을 것을 선언하고 옹이 단식을 결행한 보도는 확실히 20세기의 일대 비장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인도 민중은 지도자를 아는 민중이다. 옹이 일단 단식을 결행하매 이들은 싸움을 그쳤다. “우리는 다시 싸우지 아니하리다.” 하고 서로 무기를 거두어 옹의 무릎에 바치고 단식 중지를 청하였다. 인도 민중은 지도자의 뜻을 따를 줄 아는 민중이다.

 

하기는 세계의 많은 약소민족이 서로 두 개로 쪼개져서 싸우고 있다. 중국도 두 개요, 희랍도 두 개요, 서반아도 두 개요, 불행하거니와 우리 조선도 이 축에 들어 있다.

 

뭉치면 강하고 갈리면 약하다고 한다. 그런데 약한 자는 약할수록 더 잘 갈리는 습성이 있는 성싶기도 하니 이 습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모르거니와 만약 미국이 남북전쟁을 극복하고 통일하지 못하였다면 오늘의 번영은 없었을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하지만 많은 약소민족들이 두 개로 쪼개져서 서로 싸우고 그래서 더욱더욱 약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서반아도 일찍은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이 강자가 지체가 떨어져서 약화해진 뒤에 싸움이 잦으며 희랍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 하건마는 이 나라의 좌우파는 민주주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폭력과 살상을 거듭하고 있다. 좌는 우의 목을 잘라서 노상에 진열하고 우는 좌의 목을 잘라다가 노상에 진열하는 - 마적시대 만주의 풍경을 오늘 희랍에서 찍어온 사진으로 볼 수 있을 때에 오늘날 약소민족들의 골육상쟁의 참상은 실로 언어에 절한다.

 

불행히 조선도 약소민족이다. 불행히 남북에 갈리고 좌우가 갈려서 싸우고 있다. 서로 죽일 계획까지는 유무 간에 간간이 죽이는 일이 있고 서로 죽여야 할 놈이라는 주장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주저 없이 주장하는 것이 오늘의 조선이다.

 

오늘의 희랍은 결단코 평화스러운 자유의 희랍이 아니다. 아무리 좌우가 서로 목을 잘라도 이건 자꾸만 목을 잘라야 할 조건과 필요를 더욱 양성시키고 조장하는 결과가 될 뿐이지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이 아닐 것쯤을 모를 리 없다.

 

민주주의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중국도 결단코 평화스러운 자유의 중국이 아니다. 지금 조선의 남북과 좌우가 몽상하는 소위 타력의존(他力依存)의 현상을 우리는 중국에서 보고 있다. 국민정부가 미국의 원조를 받고 공산군이 소련의 원조를 받는다. 그래 중국에 무슨 다행이 있는가 말이다.

 

그래도 인도에는 민중이 말을 듣는 지도자가 있다. 칠십팔 세나 된 노옹이 한 번 단식으로서 그 비통한 심정을 표시하였을 때에 아무리 오늘날 나라는 두 개로 쪼개서 세웠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슴 속에는 다 같이 유혈상쟁을 그쳐야 할 것을 깨달아 참극은 중지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어떤가? (<신천지> 제2권 제10호(1947년 11월), <진짜 무궁화>(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176-179쪽)

 

제목에는 ‘비극’이라고 했지만 오기영은 인도를 부러워한다. 간디라는 지도자의 존재 때문이다. 제한된 범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기능적 지도자가 아니라 사회의 통합성을 보장하는 강력한 전인격적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안정된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웅의 자질을 갖춘 사람도 태평한 시대에는 두각을 나타날 기회를 얻기 힘들다. 영웅을 찾고, 지도자를 찾고, 메시아를 찾는 것은 현존하는 질서에 만족할 수 없는 사회다.

 

해방된 조선에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일본 지배자들이 물러갔지만 다른 외국군이 진주했고, 그들이 말로는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러 왔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그 명분에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일본 지배자들보다 의도가 불분명한 외국군이 현실의 중요한 조건들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인은 모든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논어>에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名不正 言不順)”고 한 귀결은 “백성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民無所措手足)”는 것 아닌가.

 

지도자 숭배를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로 보아 비판하기도 하지만, 해방 조선의 상황은 지도자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안정된 정치제도가 갖춰져 있는 사회에서는 구성원 각자가 자기 가치관에 따라 자기 판단을 내리면 그 판단이 제도장치에 수렴되어 대다수가 승복할 만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해방 조선에는 가장 초보적 장치인 투표제도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새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민이 지도자를 필요로 한 것은 각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이전에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강력한 민족주의 지도자가 있다면 투철한 사회주의자라도 그 권위를 받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지금 당장 질서가 세워질 필요에 비하면 사회주의 원리 실현이 조금 늦고 빠른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헤쳐 나가야 할 상황이 복잡하고 과제가 다양한 만큼 해방 조선은 기능적 지도자가 아닌 인격적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인격적 지도자의 가장 손쉬운 판별 기준은 장기간의 자기희생적 투쟁경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박헌영을 지도자로 받든 것도 이 기준에 따라서였다. 1920년대에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던 김철수도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서 가만히 살면서 보니까 박헌영파(경성콤그룹)만 잡혀와. (공산당) 재건운동하다가 잡혀온 것이야. 자꾸 잡혀 와. 우리 파(서울상해 합동파)는, 말을 들으니까 이권운동이야. 양조업도 하고, 정미업도 하고, 뭐 그런 거 저런 거 모두 직업을 얻어가지고, 왜놈한테 얻어서, 아쉬운 소리 하고, (운동 일선에서) 딱 떨어져버려. 박헌영파가 재건운동하다가 자꾸 잡혀와. 그걸 보고 감옥에서, 내가 양심적으로 아무래도 박헌영을 (지도자로) 내세워야지(라고 생각했어.) (김철수, “구술자료 - 정진석 소장본” <지운 김철수> 243쪽,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198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박헌영의 지도자 자격은 좌익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었다. 이북에서 김일성이 투쟁경력을 갖춘 집단의 승인을 받아 지도자로 나선 것은 그의 경력이 항일무장투쟁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도 수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남에서는 두 명의 민족주의자가 주목받았다. 하나는 해방 당시까지 임정 주석 자리에 있던 김구고, 또 하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이었다.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실제 경력에는 의문점이 많았지만 임정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경력이 있었고 ‘미국통’인 그가 미군 점령 하의 이남에서는 유리한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문제점들은 귀국 후 2년 동안 드러날 만큼 드러났다. 그런데 김구마저 완고한 반탁운동으로 권위가 크게 손상된 데다가 조직 확보를 위해 명분을 쉽게 버리고 이승만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오기영은 존경받는 지도자를 가진 인도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