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받은 편지(신과 구)가 그전 편지들보다 더 반가웠어요. 앞서 편지들은 내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답장을 보낸 거라서 마음이 조금 불안했어요. 아무래도 나이를 생각해서 예절에 얽매이면 답장을 서둘러 쓰게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편지 나누는 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될까봐 걱정한 거죠. 그 정도로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반가운 겁니다.
 
만연히, 노는 기분으로 소식 주고받으며 지냅시다. 그러다 보면 주제를 좁혀서 치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질 때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건 그 때 일이고~
 
이번 더위, 혼났습니다. 엊그제는 완전히 생존에 급급한 상태까지 가서, 프레시안 연재까지 한 차례 펑크 냈어요. 원고가 여의치 않을 때 끄집어낼 디폴트 주제들이 좀 있긴 하지만, 그 날은 디폴트고 뭐고, 생존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체면을 내던져버렸지요.
 
거기서 산행 못하고 지낸다니까 1989년인가, 거기 머물 때 생각이 나서 혼자 잠깐 킥킥거렸어요. 겨울방학에 갔는데, 전혀 겨울 같지는 않고... 산길을 좀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 지도를 보니 멀홀랜드 드라이븐가? 그쪽이 산처럼 보이기에 친구에게 거기 등산 가면 어떨까 물어봤더니... 연민의 눈길로 쳐다보며 꿈 깨라고 하더군요.
 
LA가 어떤 곳인지 파악하라며 권해준 소설이 있었어요. 제목은 <Nowhere City>. 저자 이름은 생각 안 나고.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미국을 결정적으로 싫어하게 만든 책이군요. 사람이 사는 방식을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곳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어요. 초중딩 때는 미국 만화 보면서 미국을 낙원처럼 마음속에 그렸는데... (제일 빠져들었던 책 하나가 어느 통신판매업체의 크리스머스 캐털로그였어요. 어찌나 황홀하던지~ 196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좀 지나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빠져 지냈고. 그때는 자연도 미국 자연이 좋아 보이더라고요.)
 
일전 프레시안에 올린 "가네포" 얘기 잘 읽었어요. 참 좋은 글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주제에 일방적으로 매달리기만 하면 좋은 그림 되기 어렵죠. 주제가 품겨져 있는 풍경을 그리면서 주제가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는 편이 좋죠. 그처럼 다양한 시각에서 주제를 포착하는 솜씨를 보니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데도 좋은 서술방법을 잘 만들어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구 사이의 대반전"! 참 중요한 계기를 만나신 것 같군요. 그 반전을 개인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셨다니, 모든것을 정말 새로운 눈으로 볼 만한 계기가 되었겠습니다.
 
나 자신은 보편적 적용을 가급적 억제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에서 실체를 확인하는 데 주력하고, 확대 적용은 제풀에 이뤄지면 좋고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내 글 쓰기"가 늦어진 까닭 일부는 거기에 있는 듯. 이건 내 방식이 좋다고 절대 말 못하는 점입니다. 그냥 나로서는 다른 수가 없었던 거죠.
 
대학 1학년 때 물리학을 포기하고 사학과로 전과하면서 신구간의 반전이 시작된 셈인데... 그게 잘한 짓인지 오래도록 마음이 편치 못했거든요. 30대 후반 들어 유럽에 가서 "공부는 저 좋아서 하는 짓"이란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편해졌죠. 그 때 어울린 또래 친구들이 '68혁명'을 제대로 겪은 친구들이라서 그 정신을 전해받은 셈입니다.
 
얼마 후 대학을 그만둘 때까지도 더 넓은 곳, 더 새로운 것을 찾는 기류가 내 마음속에 남아있어서 저널리즘 쪽으로 활동하는 데도 작용했지요. 그런데 그 무렵 아버지 일기를 넘겨받아 아버지를 재발견하면서 안쪽으로, 옛것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꾸준해진 셈입니다. 두 가지 경향이 엇갈리는 십여 년 동안 사회활동은 위축되면서 공부 자세가 어느 정도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선생 메일 블로그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미국 민주주의는 석유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는 원자력 민주주의인가?" 덧글 달아놓은 분이 있어 잠깐 웃었습니다. 예전에 서양은 다 같은 서양인 줄 알다가 막상 유럽 가보고 유럽과 미국의 차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던 생각이 납니다. 근대성을 비판하는 내 시각은 대개 미국을 바라보며 구체화한 것인데, 정말 근대성의 문제를 투철하게 겪어내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뜨고 싶어 하는 나라가 있다니... 근대성의 일반적 문제보다 미국을 맹종하는 우리 사회 풍조의 검증을 나는 더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로 생각합니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목디스크도 매일 물리치료 받아 더불어 살 만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객지에서 건강 잘 돌보세요. 나는 메일 늦다고 불평하지 않을 테니까, 혹시 뜸하게 되더라도 조바심치지 마세요.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