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신지요?

꾸준하게 올라오는 <해방일기>는 잘 읽고 있습니다.

내용은 물론이요, 작업을 진행하시는 '태도'를 높이 삽니다.

이번 주 연재를 불발한 저의 게으름과 비교하게도 되고요.

 

전 L.A.에 대해서는 Mike Davis의 분석적인 책들에 많이 의존했는데,

<Nowhere City>도 동부와 견주면서 흥미롭게 접근하네요.

요즘 잠들기 전 침대 맡에서 짬짬이 읽는 중입니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소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목 디스크 물리 치료 얘기도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네요.

저도 목과 어깨가 시원치 않아서,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입문한 지 5년차 입니다. 

몸매 가꾸기용으로 요가를 하는 젊은 여성 사이에서,

몸부림질을 해야 하는 겸연쩍음만 물리칠 수 있다면, 적극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  

 

 

이번에는 고민 상담 좀 해볼까 싶습니다.

생각이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고, 글도 잘 풀리지 않는 요즘이라서요.

 

프레시안 연재 하면서 맺어진 인연이 몇 됩니다.

제가 이 곳에 있으니 대부분 메일로 연락을 하고 지내지요.

그 중에 유일하게 직접 뵌 분이 베이징에 계십니다.

ILO에서 오래 근무하신 국제 관료셨어요.

아시아 여러 나라에 머물며 노사관계를 연구하고 자문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원래는 한겨레 박민희 특파원을 뵈러 나가는 자리였는데,

그 분이 제 글을 눈여겨 읽었노라 하시면서 동석하신 것이죠.

일본에서 박사도 마친 호학형인데다, 실무 경험도 풍부하셔서 제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 방식을 '유능한 학습 조직'이라고 빗댄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헌데 얼마전에 보내오신 편지에서 '복고' 얘기를 하시더군요.

한 구절을 따다 옮기면 이러합니다.

 

"역근대화, 오래된 미래, 그리고 되새김.

 저의 꿈이기도 하나, 그건 우리의 다음 생에서나 가능하겠지요.

 현세에서는 한국현대문학중 유일하게 복고를 꿈꾼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읽으며,

 소쇄원의 달밤 아래 탁주 한잔 하며 이야기 나누면 좋을 듯 합니다. "

 

<황제를 위하여>는 학부 시절 밤을 새워 재미나게 읽었던 소설이라 새삼스러웠습니다.

헌데 '복고'라는 단어가 쉬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내가 읊고 있는 풍월이 복고, 인가....해서요.

 

이번 주에 연재로 쓰던 글은 유가, 에 대해서 였습니다.

동방 고전을 두루 섭렵한 처지는 못되는지라, 주로 요즘 얘기를 하려던 차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유가 사회주의, 유가 헌정주의를 말하는 중국 사상계에 대한 논평이지요.

물론 20세기에도 유가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헌데 대저 '문화 유가'라고 할까,

<대학>의 구절을 빌면 '수신-제가'에 머무는 유가로 쪼그라 든 것 같습니다.

대만, 홍콩, 그리고 미국 등에서 연구했던 유가도 대저 '문화중국'의 일환으로 다루었던 것 같고요.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요즘 주목하던 현상은 '정치 유가'의 부활이었습니다.

'치국-평천하'를 다루는 영역에서 다시 유가가 기세를 펴고 있는 지점이지요.

돌아보면 유가는 인류사의 최장의, 그리고 최강의 정치 철학이었지 싶습니다.

2000년 간을 따져보아도,

1900년은 세계 굴지의 제국을 경영한 최적의 소프트웨어로 검증이 된 것이니까요.

이러한 정치 철학이 쉬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이민족이 중원을 장악해도 결국 중화문명으로 녹아들었듯,

외래 사상이 지배했던 20세기를 마감하고 또 (신)유가로 재구성되지는 않을까.

불교 사상을 흡입하여 신유학이 나왔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5.4 이래 반전통의 전위에 섰던 중국 공산당이,

돌연 '중화문명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국학열'에 일조하는 것도,

지배 이데올로기, 라고 쉬이 비판하고 마는 것은 무언가 모자라 보였습니다.

20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었을 때,

과연 마르크스-레닌을 얼마나 말하게 될까 싶기도 하고요.

유가 사회주의 공화국, 유가 헌정주의가 공연한 말놀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향이 '탈근대'의 징후인가, 하면 또 그것이 간단치 않은 질문 같습니다.

오히려 지구화된 근대성의 산물이지 않나.

근대성이 지구를 석권하면서 생긴 역설적인 현상이,

유럽 중심주의가 폐기했던 여타 문명의 과거/전통의 부활이지 않은가.

이러한 '복고'야말로 지구화된 근대성의 핵심이라고 할까요.

전통과 과거를 원천 삼아 자본주의가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동아시아(유가)도, 남아시아(힌두)도, 서아시아(이슬람)도,

자본주의와의 해후 속에서 전통이 재발견되고 있는 꼴입니다.

유럽은 지방화되었지만, 자본주의는 더더욱 보편화된 것이지요.

그러하다면, 이러한 추세를 탈근대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좌/우파가 공히 타파하려 했던 전통이,

대안적 근대(탈보편주의, 탈서구주의)의 기반처럼 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외부의 도전을 뿌리치되, 그만큼이나 내부의 혁신을 채근했던,

20세기 반체제/반문화 운동과는 결이 다른 지향이지 싶습니다.

분명 탈자본주의도 아니고요.

결국 현재의 지배질서를 추인하는 담론(=문화 보수주의)이라는 혐의가 끊이지 않는 까닭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멈칫, 하게 되는 지점도 여기서입니다.

근대를 상대화하는 것만큼이나, 치열하게 과거/전통을 상대화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이중의 부정과 갱신이 없다면,

반전이라는 구호가 복고에 그치고,

그래서 자칫 '반동'으로 가는 것 아닌가 자문하게 됩니다.  

'대안적 근대'(=지구적 자본주의 하의 다문화주의?)와 '근대의 대안'(=탈근대 문명)은 분명 다를테니까요.

<유가 : 제국의 정치철학>이라는 제목을 꼽아 두고,

여지껏 글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는 '20세기 동아시아'를 평가하는 잣대와도 깊이 연관되지 싶은데,

혹 몇 마디 던져주시면, 번쩍-하고 길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막바지 여름, 건강하게 나시고요.

 

-이병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