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에 와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쯤 산골 찾아오는 재미를 금년 들어 붙였습니다.
와서 등산이나 뭐 대단한 걸 하는 것 없고, 그냥 쉬는 건데,
자연과 아주 등지지 않고 산다는 걸 확인하는 게 보람이랄까요?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장소 감각'일지 모르겠네요.
장소 감각은 '현실 감각'의 중요한 요소겠지요?
돌아보면, 나는 유럽에 많이 다니던 30대 후반에 그런 감각이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영국, 프랑스 사람들이 영국, 프랑스 사람답게 자기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한국사람, 동아시아사람다운 모습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보여왔는지 생각하게 됐죠.
민두기 교수 얘기를 꺼냈는데...
바로 장소-현실 감각 측면에서 제게 타산지석 노릇을 해주신 분이죠.
오랫만에 그분과의 기억을 마음속에 떠올리니...
그분과 다른 길을 걸음으로써 공부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나이도 어리고 공부도 얕던 그 시절에는 참 뿌리치기 어려운 압력이었는데,
"이건 아니다!" 나자빠진 생각을 하면 내게 꽤 강한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일에서는 그렇게 느낄 일이 별로 없는데.
그분과 헤어지고 자신감이 위축된 상태에서
민영규 선생님과 박영재 선생님을 만나 기운을 좀 추스르고...
그런 뒤 유럽에 가서 물 만난 고기의 심정을 알게 되었답니다.
이제 생각하니 1985년 유럽 처음 갈 때 내 나이가 지금 이 선생 나이랑 비슷했군요.
유럽 생활 시작한 곳은 영국이었어요.
역법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에서 케임브리지의 니덤 연구소에 갔었죠.
거기서 지내는 중 예수회 선교사들 쪽으로 관심이 쏠려
그후로는 방학마다 파리에 가서 제르네 교수 제자들과 어울려 지내게 됐습니다.
당시 내 또래 젊은 프랑스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 CNRS에 적을 두고 있었어요.
"대학의 자리만으로는 프랑스의 학술 전통의 계승발전을 바랄 수 없다!"고 만든 그 기관은
'고급실업자 구호소'라는 별명대로 젊은 연구자들에게 최소한의 지원을 해주는 역할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잡담 중 박봉에 대한 불평을 했어요. 배관공 벌이만큼도 안 된다고.
다른 한 친구의 심드렁한 대꾸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배관공이 벌이는 좋지. 근데 그 친구들이 우리만큼 자기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
아! 공부가 저 좋아서 하는 거란 사실을 어째서 나는 그때까지 모르고 살았지?
대학을 그만두고 신문사에서 객원 일 하던 90년대 중 포스트모더니즘 소문은 들었는데 깊은 관심은 들지 않더군요.
리뷰 살펴보는 데 그치고 책은 펼쳐본 게 없어요.
몇 해 동안 <해외 화제작 기행>을 맡아 공부의 외연을 넓힐 때였지만 포스트모던 쪽으로는 손이 안 갔습니다.
내가 "근대 이후"를 생각하게 된 것은 과학사 공부를 통해서인데,
쟁쟁한 "포스트모던" 담론은 너무 뽀다구가 나서 내 입맛에 안 맞은 셈입니다.
나는 음식도 구수한 걸 좋아하는데, 공부 취향도 좀 촌스러운가봐요.
아무튼 공부가 저 좋아서 하는 거란 사실을 알고 나니 취향에 안 맞는 공부를 억지로 하지 않게 됐어요.
취향대로만 해도 공부할 거 얼마든지 있던데요, 뭐.
이 선생 얘기 듣고 보니 '장소 감각' 문제를 우리 사회, 특히 학술계의 일반적 문제로 생각할 점이 있네요.
제도적 보호가 너무 강해 온실 속 화초처럼 풍토에 맞출 필요가 없는 문제일지?
나 자신 대학 있을 때는 가르치는 일을 '필요악'으로 여기며 무척 싫어했는데,
지금 가르치는 일을 통해 공부의 보람을 느끼게 되기에 이른 생각을 하면,
제도적 보호 때문에 건강한 공부 자세 세우는 데 지장 받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학위논문 얘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더 이야기 나누며 나도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을 키울 욕심이 많이 나지만,
지금은 마음껏 생각에 빠질 여유가 없는 편이라, 한쪽에 접어둘게요.
그냥 쉬다가 떠오른 생각만 몇 자 적어 보냅니다.
LA에 꼭 한 번 가본 것은 겨울이었는데, 여름 날씨는 어떤지? 잘 지내세요.
여기 금년 더위는 장난이 아닌데... 그래도 일에 대한 자신감 덕분인지 마음 편하게 지냅니다.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