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정치적 판세가 결정된 1946년 여름
해방공간 3년 중 가장 큰 갈림길이 되는 시점을 짚으라면 1945년 12월을 짚을 것이다. 연합국의 조선 처리 방침이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결정된 것이 이 때다. 그에 촉발되어 서울에서 대규모 반탁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반탁’은 이남 정계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이북에서는 김일성이 공산당의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이남에 비해 훨씬 순조로운 변화의 발판이 마련되고 있었다.
1945년 12월에 세워진 몇 가지 기본조건이 자리를 잡는 데 다시 몇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북에서는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3월에 토지개혁을 실시함에 따라 김일성 지도체제가 확고해졌다. 이남에서는 반대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전 해부터 추진되어 온 통일전선 시도가 반탁운동의 격류 속에 좌초되자 우익은 비상국민회의를 거쳐 민주의원으로 결집하고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함으로써 좌우대립의 전선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모스크바 외상회담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이 역시 반탁운동의 여파 속에 공전을 거듭하다가 5월 초에 무기정회에 들어가고 말았다.
1946년 5월이 되면 상황 전개의 기본 틀이 분명해져 있었다. 미소공위의 정회로 연합국 합의에 따른 조선 독립 추진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었다. 이북에서는 공산당과 임시인민위원회 중심의 개혁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남에서는 좌우대립이 극단화되어 한민당-김구-이승만 극우세력이 외연을 키우고 박헌영의 극좌파가 좌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동안 양쪽에 속하지 않는 중도세력은 극도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틀이 분명해진 만큼 변화의 흐름도 확실해졌다.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 이 책에서 다루는 기간이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 이북의 변화는 단순하고 순탄하게 진행된 반면 이남에서는 여러 주체들이 복잡하게 뒤얽히며 상황을 전개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주로 이남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게 되었다.
이남의 상황 전개에 작용하는 주체로 어떤 세력들이 있었는지 먼저 검토해 본다.
미군정이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1945년 말까지는 미군정 당국자들이 조선 사정도 본국 정책도 파악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모습만을 보였다. 그러다가 1946년 들어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의미 있는 정치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반탁운동을 통해 극우세력이 명확한 실체를 갖게 되었다.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층이 해방에도 불구하고 특권을 유지할 희망을 김구와 이승만 등 해외 지도자들의 영도력에서 찾게 되었기 때문에 극우세력은 막강한 자금력과 함께 군정청과 경찰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극우세력의 강화로 인해 좌익에서 박헌영 극좌노선의 주도권이 굳어졌다. 좌익의 기반은 사회주의적 개혁을 원하는 민심에 있었는데, 극우세력에 당장 대항하기 위한 깃발과 조직력을 박헌영의 공산당만큼 잘 갖춘 다른 좌익세력이 없었다. 여운형의 인민당이 더 큰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1946년 7월 중 박헌영 파의 프락치 공작 앞에 무너지고 만 것은 조직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5월에 들어설 때까지 이남 정국의 시야를 채우고 있던 것은 이 3개 세력이었다. 외래세력인 미군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반탁세력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왼쪽에서는 박헌영 세력이 민전을 중심으로 좌익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라 할 만한 사람들은 극우와 극좌 사이에 끼어 독자적인 조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좌우대립’ 대신 ‘중극(中極)대립’의 좌표계가 필요하다.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5월에 시작되었다. 이 움직임에 참여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가 ‘중간파’라 불리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이 세력 안에서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입장에 섰다. 이 세력은 나중에 분단건국 과정에서 역할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 의미가 후세에 잘 전해지지 못했지만, 당시 조선인의 정치적 염원을 대변한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좌우합작을 작동시킨 동력은 미군정이 일으킨 것이었다. 초기의 미군정은 상황의 정밀한 검토 없이 반공-반소 취향에 따라 단세포적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점령 반년을 넘기면서 정책 인력이 확보됨에 따라 현실적 타당성이 있는 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극우파를 후퇴시키고 중도 우파를 지원함으로써 폭넓은 통일전선 형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의 좌우합작을 성공시키면 극우파는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극좌파를 고립시키는 통일전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미군정의 좌우합작 추진에 우익에서는 폭넓은 호응을 보였다. 식민지시대 기득권층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 극우 반탁세력이 ‘친일파 척결’ 같은 민족적 과제를 ‘반공-반소’의 뒷전으로 돌리는 데 반감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좌우합작에 참여했다. 미군정이 극우파만을 후원하던 태도를 바꾸는 것만 해도 그들에게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좌익의 호응도 만만치 않았다. 박헌영 세력의 종파주의에 대한 비판이 범 좌익뿐 아니라 공산당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좌우합작은 박헌영의 극좌노선을 벗어난 새로운 노선을 열어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조건이 좌익의 참여에 걸림돌이 되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좌익 내에서 ‘배신자’로 몰릴 위험도 있고, 실제로 이용 대상의 ‘들러리’ 신세에 빠질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에 참여하는 중간파의 입장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피동적인 것이었다. 각각의 진영에서 극단파가 기세를 올리며 깃발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소신을 펼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던 ‘힘’ 없는 사람들이 미군정이 만들어준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힘’ 없는 입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들은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대중 집회에서 규탄 받고 벽보로 모욕당했으며 저격에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분단건국의 주역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비운(悲運)의 지사(志士)’로 추모의 대상이 될 뿐, 그 역사적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그들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좌우대립 틀 속에서 ‘중간파’의 이름을 갖게 된 그들이 당시 정치의 진짜 주역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려는 노력 아닌가. 그렇다면 계층의 이익에 집착한 극우파도 자기네 이념에 매달린 극좌파도 진짜 ‘정치’를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인의 염원인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좌우합작에서 길을 찾았다.
그들의 재평가를 위해 ‘좌우대립’ 아닌 ‘중극(中極)대립’의 새로운 틀을 생각한다. 중간파가 갖지 못한 ‘힘’을 극좌와 극우는 외세로부터 얻었다. 중간파가 민심의 지지로부터 얻은 ‘힘’은 외세에 의지한 극단파의 ‘힘’에 압도당했다. ‘중’을 민심의 대표로, ‘극’을 외세의 대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식민지 30여 년을 겪은 뒤의 조선의 민심은 스스로를 표출할 방법을 아직 잘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일본을 대신해 조선을 짓누르는 외세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것이 해방공간 조선의 상황이었다.
좌우합작은 194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가시적 성과를 내놓기 시작한다. 성과가 늦어진 것은 3당 합당을 통한 좌익의 재편 때문에 좌익의 참여가 여의치 않은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는 여름 동안에도 좌우합작위원회는 중도 우파의 새로운 입지를 만들어주었고, 좌익 재편 과정에도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했다.
진짜 위조지폐는 자기네가 무한정 뿌려놓고...
1946년 여름 정치계의 흐름을 크게 좌우한 하나의 움직임이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이었다. 미국은 강력한 반공 분위기를 가진 나라면서도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미군정에도 공산주의나 공산당을 무조건 탄압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노골적 탄압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적산 건물을 당사로 활용하는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정회에 들어갈 무렵부터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좌우합작 추진과 짝을 이루는 책략이었다. 공산당의 힘을 꺾음으로써 공산당 외의 좌익이 좌우합작의 마당으로 나오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공산당에 대한 가장 큰 타격을 준 조치가 ‘정판사사건’ 조작이었다. 공산당이 당사로 쓰던 건물에 해방 전 지카자와(近澤) 인쇄소가 있었다. 일본 항복에서 미군 진주 사이의 20여 일 동안 총독부가 30억 원이라는 거액의 조선은행권을(당시 통화량의 55%에 달함) 발행했다. 인쇄량이 너무 많아 민간 인쇄소까지 징발해야 했고, 지카자와 인쇄소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 그 건물에 입주한 공산당은 지카자와 인쇄소에 ‘정판사’란 간판을 달고 활용했는데, 화폐인쇄에 쓴 평판 등 재료가 남아있었다.
지카자와 때부터 일하던 직원 몇이 정판사에서 계속 일하면서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그중 김창선이란 자가 화폐인쇄용 평판을 들고 나가 위폐단에 팔아먹었고, 5월 4일에 그 위폐단이 검거되었다. 며칠 후 경찰이 정판사를 수색했고, 5월 15일에 정판사사건 수사발표가 군정청에서 나왔다. 공산당 재정-총무부장 이관술과 정판사 사장 박낙종을 위시한 공산당원 십여 명이 3백만 원의 위폐를 찍어 유통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두어 차례 발표 때마다 위폐 발행액이 늘어나 1천수백만 원에 이르렀다.
체포된 자들은 11월 말 유죄판결을 받기에 이르거니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 사건 혐의는 철저한 조작 아니면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공산당 탄압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사건 발표 직후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무기정간 되었다가 결국 폐간에 이르고, 공산당도 이 건물에서 축출 당했다.
정판사사건은 가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할 일이었다. 위폐 범죄에서 제작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유통이다. 널리 유통시킬 길이 없으면 아무리 잘 만든 위폐라도 고작 유흥비로밖에 쓸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찍은 30억 원은 불법으로 찍은 위조지폐였다. 황급하게 찍느라고 품질도 나쁜 것이 많아 당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잘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 위조지폐의 유통능력을 미군정이 보장해주었다. 30억 원 위폐사건의 핵심 공범인 미군정이 1천수백만 원의 공산당 위폐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미군 진주 당시 30억 원의 “붉은 돈”이 누구 손에 있었을까? 밝혀진 것은 극히 일부뿐이다. 예컨대 대표적 친일 사업가 박흥식이 조선비행기회사 투자에 대한 보상 등으로 5천만 원을 받고 유흥사업가 김계조가 댄스홀 만드는 등의 용도로 1천만 원을 받은 일이 그들의 다른 범죄를 수사하던 중에 불거져 나왔다. 30억 원 위폐의 대부분은 좁은 범위의 친일파가 목돈으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위폐에 대한 미군정의 효력 인정은 친일파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면서 조선 경제를 파탄시킨 엄청난 범죄였다.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은 공산당의 위축이라는 기대했던 효과보다 오히려 더 큰 역효과를 불러왔다. 박헌영 일파가 ‘신전술’이란 강경투쟁 노선으로 공산당을 이끌면서 좌익 내 헤게모니 투쟁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그 위에 좌익 3당 합당의 과제가 겹쳐져 좌익 재편 현상이 진행되면서 중도 좌파의 좌우합작 참여가 오랫동안 막혀 있게 된다.
평양으로 옮겨간 좌익 주도권
1946년 상반기를 통해 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의 능력과 위상이 순조롭게 자라나면서 차츰 그 그림자가 이남 좌익의 위에까지 드리우게 되었다. 원래 박헌영이 장악한 서울의 공산당이 ‘당 중앙’이었고, 김일성이 주재하고 있던 것은 그 산하의 ‘북조선분국’이었다. 그런데 북조선분국이 소련의 지원 아래 이북의 통치력을 장악하여 당 중앙의 실력을 압도하게 되면서 ‘북조선공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남의 좌익 중 박헌영의 영도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북조선공산당과의 연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좌익 정당의 합당을 통한 북조선노동당(북로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창당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관계를 대등한 것으로 만드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1946년 7월 초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좌익 합당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볼 때, 모스크바 방문 목적의 적어도 일부는 합당의 필요성을 박헌영에게 납득시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정당의 대중정당화가 당시의 추세였기 때문이다.
합당을 통한 대중정당화가 이북에서는 적절한 과제였다. 중국공산당과의 연계가 강한 신민당(독립동맹)이 지난 반년 동안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잘 유지해 왔기 때문에 잡음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반면 이남에서는 통일전선 전략을 외면해 온 박헌영의 공산당이 외연을 넓히면서 영도력을 유지하는 데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북에서는 신민당의 김두봉이 합당을 제안하고 합당 후에도 위원장을 맡았다. 실력 기준으로 공산당이 주축이었으므로 형식에서 신민당 쪽을 앞세워 모양새를 좋게 만든 것이다. 이남에서도 인민당의 여운형이 합당을 제안하고 합당 후 위원장을 맡을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8월 3일 인민당이 합당 제안서를 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으로 보냈다.
제안 시점에서 예상되는 어려움은 박헌영 공산당의 패권주의가 인민당과 신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제는 공산당 내부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중앙위원 중 원로급 6인이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레닌이 공산당 운영의 원리로 세운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불변의 원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권력은 당 대회를 통한 당원 총의에서 나온다는 ‘민주’ 원칙과 선출된 당 중앙의 영도에 따라야 한다는 ‘집중’ 원칙을 결합한 원리였다.
일제 시대의 탄압 아래서는 당 대회를 열기가 무척 어려웠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두 차례 당 대회는 사실 형식적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공산당 활동이 합법화된 미군정 아래 공산당이 창당(또는 재건) 후 1년 가까이 당 대회를 열지 않은 것은 박헌영의 주도권을 쉽게 지키기 위한 편의주의였다. 그 동안 불만을 품고 있던 원로들이 좌익 합당이라는 큰 고비를 앞두고도 박헌영 지도체제를 그대로 옮겨가려는 태세 앞에 드디어 참지 못하고 당원 총의의 수렴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산당 내 분란으로 박헌영의 입지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역공에 나섰다. 반기를 든 원로 모두에 제명-정권 처분을 내리는 한편 인민당과 신민당의 자기 추종자들에게 지령을 내렸다. 공산당 당적을 감추고 두 당에 잠입해 있던 ‘프락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운형과 백남운이 이끌던 당 지도부는 공산당의 분란을 보고 합당 작업을 보류하고 있었는데 프락치들이 “무조건 합당”을 외치고 나섰다. 박헌영을 최고지도자로 모시는 범 좌익 정당을 즉각 만들자는 것이었다.
박헌영의 주도권에 무리하게 집착하는 남로당이 이남 좌익의 소수파로 전락할 형세였다. 그런데 먼저 북로당을 결성한 김일성 등 이북 지도자들이 박헌영의 손을 들어줬다. 덕분에 박헌영은 ‘벼랑 끝 전술’에 성공하고 공산당에 이어 남로당을 통해 이남 좌익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한편 박헌영의 주도권에 굴복하지 않은 좌익 인사들은 정치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중간파, 역경을 무릅쓰고 일어선 민족주의 진영
좌우합작위원회의 공동대표 김규식과 여운형이 1946년 여름 처했던 입장에서 새로 모습을 나타내는 ‘중간파’의 입지가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중경 임정에서 비주류 대표로 부주석을 맡고 있었던 김규식은 이승만에 이어 조선인 미제 박사 제2호였다. 6세 위의 이승만과 개인적 연분도 적지 않아 “형님”이라 부르는 사이였다.
좌우합작에 나설 것을 이승만이 권하러 왔을 때 김규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님은 대통령 못하면 못살 사람이고 나는 대통담배를 못 피우면 못살 사람이니 나를 대통이나 피우게 내버려 두시오.” 이전투구의 권력투쟁에 나설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설 결심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을 안다. 또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극우세력의 배경인 기득권층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미군정의 반공주의가 얼마나 굳건한 장벽인지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맞서서 민의를 받들러 나서기에 그는 용기가 모자라기보다 너무 냉소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1946년 5월 나무에 올라갔다. 십중팔구 떨어져 짓밟히게 될 줄 알면서. 미군정이 좌우합작 지원에 나선 것을 그나마 모처럼의 기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결국 나무에서 떨어져 짓밟히게 된다.
한편 여운형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는 밝은 성격의 호걸풍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가 큰 명성을 처음 떨친 것은 34세 때인 3-1운동 직후 일본에 가 일본 고관과 명사들 앞에서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당당히 설파한 일이었다. 그는 ‘항일’이 필요 없는 ‘독립’운동가였다. 해방을 앞둔 전쟁 중에도 당당한 자세를 지킨 그에게 총독부는 항복 후 질서 유지를 부탁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운 사람이었다.
좌익의 최고 명망가인 그가 박헌영에게는 도전의 대상이었다. 박헌영은 조직력을 무기로 건준에서, 그리고 민전에서 여운형의 입지를 잠식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일본을 적으로 여기지 않은 것처럼 박헌영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박헌영 세력까지 끌어들여야 진정한 합작이 이뤄진다는 믿음을 갖고 박헌영 측의 무리한 요구까지 다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 때문에 6월에 시작한 좌우합작 움직임이 두 달 동안 정체되기까지 했다.
극우파에게는 돈과 공권력이 있었고 극좌파에게는 조직력이 있었다. 중간파 인물들이 양쪽 극단파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위해서는 궁핍과 매장, 그리고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1946년 5월에 몇 사람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좌우합작 과업에 나섰다. 그들이 길을 만들자 더 많은 사람들이 양쪽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노력은 결국 분단건국을 막고 통일 민족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좌익 우익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민족국가 건설의 길이 쉽게 열릴 것이라고 낙관할 때 그들은 취향에 따라 좌익을 택하고 우익을 택했다. 사회주의 원리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적용되는 것이 좋겠는가, 판단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해방 1년이 되어가도록 민족국가 건설 자체가 갈수록 어렵게 보이자 그들은 좌우의 선택을 접어놓고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에 노력을 집중하러 나선 것이었다.
이북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때 어떤 길을 걷고 있었는가. 이남의 중간파에 상응하는 노선의 집단으로 독립동맹-신민당을 꼽을 수 있다. 김두봉 등 독립동맹 출신 민족주의자들은 소련군이 후원하고 공산당이 제안하는 통일전선에 참여했다. 인민위원회와 남로당 참여를 통해 건국 과정에서 자기 역할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런 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좌우합작을 통해 역할을 스스로 만들러 나선 것이었다.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 아무리 막강한 외세 앞에서라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노력할 여지는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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