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전의 어제 몽양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서 저격 암살당했습니다. 어제 그분의 65주기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해 보니 범행의 배경조차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채로 있군요. 그러나 이 일기에서 지금까지 몇 차례 설명한 정황을 놓고 볼 때 경찰이 개입한 극우파 소행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제 심포지엄의 기조발표를 위해 준비한 글을 올립니다.
민심을 받들던 지혜와 용기
몽양 선생이 향년 62세에 타계한 후 65년이 지났습니다. 선생께서 애써 추구한 가치에서 이 땅의 후손들이 배울 것이 무척 많은데, 그분의 재세 기간보다 더 긴 시간을 지난 지금까지도 그 가치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선생의 행적에 관심을 모은 지 2년밖에 안 되는 제가 여러분 앞에 나서서 그 가치를 논한다는 것이 외람스러운 일입니다만, 한 모퉁이를 밝히는 데는 역할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하게 된 후인 근년의 연구를 집중적으로 섭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양의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늘 저는 ‘정치’의 시각에서 본 몽양의 가치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년 동안 해온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종래 ‘좌우대립’을 축으로 통상 보아 온 해방공간의 정치현상을 ‘중극대립’의 축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시각에서 정치인 여운형의 의미를 부각시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극대립이란 중간파와 극단파의 대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래의 좌우대립 구도에서는 극좌와 극우가 가장 첨예한 대결 상대로 나타나지만, 사실에 있어서 두 극단파 사이에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있었습니다. 극좌는 극우는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어주면서 힘을 합쳐 인민의 염원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중간파 중에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를 구분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경계선은 애매합니다. 해방 당시 일반 조선인이 지지한 정치 원리는 두 가지였습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민주주의는 자유보다 평등에, 정치적 평등보다 경제적 평등에 방점을 두는 사회주의 경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은 민족주의, 좌익은 민주주의를 간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대다수 인민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중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한쪽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두 원리가 함께 실현되기 바랐습니다. 정치인, 지도자의 역할은 두 원리를 함께 살리는 방향으로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할을 떠맡으러 나선 것이 중간파였고, 중간파는 좌우에 관계없이 두 원리를 아울러 받들었습니다.
한 가지 원리에 집착해 다른 원리를 묵살한 것이 극좌와 극우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원리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다른 하나를 살필 줄 모르는 소신파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정신병 증세는 흔한 것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극단파는 하나의 원리를 명분삼아 권력을 추구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정상배와 음모가였습니다.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는 ‘정치’에 뜻을 둔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극좌와 극우가 명분으로 이용한 대표적 이슈가 ‘토지개혁’과 ‘반탁’이었습니다. 먼저 토지개혁을 보자면, 좌익의 이상적 방안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습니다. 그런데 몽양 선생이 참여한 좌우합작위원회가 1946년 10월 발표한 7원칙 중에서 토지개혁 방안은 ‘체감매상 무상분배’였습니다. 무상몰수에 접근하는 효과를 가지되 조선인 지주, 특히 중소지주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효과적 절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민당은 이 방안에 반대하다가 민족주의자와 중간파 성향 인사들의 대거 탈당으로 ‘반동정당’의 본색이 드러났거니와, 공산당-남로당도 ‘무상몰수’를 고집하며 이 방안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화 과정 초기에 민족부르주아지를 포용하는 통일전선 정책을 펼친 데 비해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은 좌익 내의 헤게모니에 집착하여 ‘극좌’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한편 한민당과 이승만-김구 세력은 반탁을 핑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을 몰고 왔습니다. 조선이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의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추축국의 일부를 독립시키면서 신탁통치를 거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연합국 방침이었다는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는 좌우 연립정부를 세워 10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완전한 독립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5년간의 신탁통치도 못 받겠다고 미소공동위원회에 돌을 던지다가 분단건국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반탁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난 것은 <동아일보>의 조작된 ‘오보’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데 소련의 고집으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하는 이 기사에 접한 조선인들은 소련만 잘 설득하면 신탁통치를 거칠 필요가 없겠다는 환상에 빠졌던 것입니다. 몇 주일 후 모스크바회담의 실상이 밝혀지자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을 하더라도 과도임시정부 수립 후에 할 일이라며 반탁운동에서 발을 빼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지했습니다. 대중의 반탁 열기도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극우세력은 조직을 동원한 반탁운동으로 미소공동위원회에 걸림돌을 만들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민심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권력과 이익을 좇은 사람들은 민심을 등졌습니다. 극좌와 극우는 민심을 등지고도 어떻게 행세할 수 있었을까요? 의지할 외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중간파가 말인즉슨 옳았지만 실력이 없었다고. 중간파가 못 가진 실력, 극좌와 극우가 가진 실력이 어떤 힘이었습니까? 외세가 준 힘입니다. 총칼만이 아닙니다. 1945년 8월 15일에서 9월 8일 사이에 총독부는 30억원의 조선은행권을 찍었습니다. 직전 발행고가 55억원이었습니다. 너무 찍을 분량이 많아 민간의 인쇄소까지 동원했습니다. 불량품도 많아서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붉은 돈”이라 부르며 받기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의 효력을 미군정이 보장했습니다. 유통될 시간도 없었던 이 돈이 누구 손에 있었겠습니까? 친일파의 손에 있다가(예컨대 박흥식은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극우파로 퍼져갔습니다. 삐라 붙이는 데, 군중 동원에, 극우신문 운영에, 그리고 테러 조직에 이 돈이 쓰였습니다.
조선의 독립 약속이 있기는 했지만 연합국은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전쟁 공헌이 작았다고나 하지만, 폴란드는 어느 연합국 못지않게 큰 공헌을 한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폴란드는 국토 절반을 소련에게 빼앗기면서 반대쪽 절반을 독일로부터 잘라 받는 칼질을 당하고, 망명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10년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에도 그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 분들이 있었습니다. 좌우합작에 매진한 중간파입니다. 민족주의자로서 그분들은 신탁통치를 감수하더라도 민족통일국가를 이뤄야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분들은 부르주아지를 포용하더라도 농민과 노동자의 기본 입지를 보장하려 했습니다.
그분들이 같은 시대 오스트리아 정치인들보다 못한 것이 아닙니다. 외세의 작용이 오스트리아보다 심중했고, 그에 따라 정상배의 발호가 극성스러웠을 뿐입니다. 목숨을 내걸고 통일건국을 위해 매진했던 몽양 선생의 노력도 그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분단건국 이래 이북은 고사하고 이남의 대한민국도 민심을 묵살하는 반공독재에 수십 년간 시달려야 했습니다. 1987년에 군사독재를 벗어나고도 지금까지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는 정치체제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까닭이 해방공간에서 중간파의 좌절에 비롯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때 만들어진 ‘적대적 공생관계’의 틀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분단건국과 내전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놓고 외인론과 내인론을 말합니다. 저는 해방공간에서 펼쳐진 상황을 살펴보며 외인론에 마음이 쏠립니다. 65년 전에 제 몫을 잘한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뜻을 꺾은 것이 얼른 봐서는 정쟁의 상대자들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극우와 극좌의 정상배와 음모가들은 정상적 상황이라면 사회 주변부에서 어둠 속에 묻혀 있을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활개치고 나라를 망칠 수 있었던 것은 외세의 작용 때문이었습니다.
냉전의 압력에 기대어 민심을 억누르던 독재체제가 20여 년 전 끝난 뒤, 이번에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에 기대어 민심을 휘두르는 엘리트연합 체제가 이 땅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총칼이 아니라 돈의 힘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65년 전에 비하면 외부 압력은 줄어들고 내부 역량은 늘어났는데도 이 사회가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꼴을 몽양 선생이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중간파는 어디 있는가?” 묻지 않으실까요? 65년 전의 중간파는 돈의 힘과 주먹의 힘에 굴하지 않고 민심을 받들기 위해 좌우합작에 매진했습니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현실을 직시하던 그분들의 지혜와 용기가 정쟁의 승패에만 매몰된 이 시대 사람들에게서도 더 많이 나타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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