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박근혜의 몇 차례 언급을 놓고 “역사의식의 결함”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박근혜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대꾸한다. 두 주장이 다 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3단 논법에 의해 이 나라에는 역사의식의 결함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어떤 결함을 가졌는지 일일이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역사의식에 결함이 많을 개연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현대사의 자유로운 연구와 서술이 반공의 굴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의 “결함” 정도가 아니라 현대사의 인식 자체가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1980년경 나오기 시작한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이 당시 청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뚜껑을 열어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6년 <해전사>의 역사의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펴낸 취지에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 <해전사>가 나올 당시의 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기술적 문제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사회의 역사인식은 <해전사>의 출현을 계기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연구의 축적이 아직 충분치 못해서 성장을 뒷받침할 영양 공급이 원활치 못한 데 있다. <해전사>는 읽는 데 대단한 의지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책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새로 자라나는 역사의식이 정치투쟁에 자주 휘말리는 데 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단적인 예다. <해전사> 다음 단계의 담론을 구성할 연구가 많이 수록된 책이다. 그러나 일부 편집자의 정치적 편향성과 지나친 목적의식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역사의식이 진영 논리의 근거로 이용되면서 일부 정치세력에서는 역사의식의 성장 자체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곧 “역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나는 2008년 <뉴라이트 비판> 작업 중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근현대사에 관한 연구자들의 중요 업적을 일반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2009-10년 <망국의 역사> 작업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망국의 역사> 작업을 진행하면서 <해방일기> 작업을 구상했다. 1945년 8월 해방으로부터 1948년 8월 분단건국에 이르기까지 3년간의 사태 진행을 65년의 격차를 두고 일기 형태로 정리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연구자들의 업적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 데 있다. 나는 <해전사>에 대한 보완의 효과를 바랐다. 서로 다른 성향과 서술방법을 가진 여러 분야의 많은 필자를 독자들이 하나하나 직접 상대해야 했던 <해전사>와 달리 한 사람의 내레이터가 독자들을 최근의 주요 연구 성과에 안내해 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과대망상이란 비평을 각오하고 스스로 높여 말하자면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작업성과를 소개해 왔다. 그 성과들 중에는 많은 독자들이 직접 참고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서술이 딱딱한 연구서라서, 발행부수가 너무 적어서, 또는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감안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책들이 있다. 나는 독자들을 대표해서 그중 해방공간을 제대로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뽑아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하나의 그림을 그려왔다.
3년 계획의 작업에서 3년차로 들어서고 있으니 하산 길에서 계곡머리까지 내려온 셈이다. 산행의 보람을 최대한 음미하기 시작할 시점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아쉬움도 많이 남아 있지만, 그만하면 거칠 과정을 제대로 거쳐 왔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독자들에게 소개해주면 좋았을 연구 성과를 빠트린 것이 적지 않음은 분명하다. 참고한 자료 중에도 내 이해력 부족 때문에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러나 능력과 여건의 한계 속에서나마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는 일관해 왔음을 자부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진영 논리를 넘어섬으로써 색안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낀다.
내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없을 수는 물론 없었다. 내란음모죄로 고발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발한 이들의 색맹 증세 때문일 뿐이라고 믿는다. 나는 몇 해째 보수주의자 입장을 표방해 왔고, <해방일기> 작업에서도 굳이 따진다면 보수주의자의 관점을 지켜왔다. 단, ‘열린 보수주의자’의 시야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온 것이다.
박근혜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적기 바라는 것도 보수주의자의 마음이다. 보수주의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그 안에서 인간의 분수를 찾는다. 박근혜는 과거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미래를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것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과거의 경험과 무관한 “멋진 신세계”를 꿈꾸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몫이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너무 황당한 꿈에 빠져들지 않도록 역사를 생각할 것을 권한다. 역사에 얽매이기까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약점과 한계,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을 아주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과거를 가장 크게 상징하는 사람의 하나가 과거를 잊고 미래만 생각하자고 하는 모습은 너무 황당하기만 하다. 그 아버지 박정희 자신은 역사를 나름대로 중요시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본다. 군국주의 일본의 질서를 이 나라에 재현하고 일본제국에 대한 만주국의 역할을 대한민국에서 복원하려 한 것은 아무 역사의식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53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처형당한 조봉암을 생각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적 남북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내세워 이승만과 자유당, 민주당을 모두 두려움에 떨게 한 놀라운 지지를 끌어 모으고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당 바람을 크게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던 조봉암은 선거 몇 달 전 간첩죄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해 7월 2일의 제1심 판결에서 그가 불법무기 소지 등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자 반공청년의 법원난입 사건이 일어났고, 그 후의 2심과 3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조봉암 ‘법살(法殺)’의 주범은 물론 이승만 정권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의 제1야당 민주당의 태도다. 최소한의 법질서를 유린하는 정권의 횡포를 견제할 1차 책임을 가진 것이 제1야당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방관했다. 부작위(不作爲)를 통한 공범이었다.
민주당이 그저 공포심 때문에 몸을 사린 것이라면 ‘공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치 상황은 제1야당이 꼼짝도 못할 정도의 살벌한 공포 분위기가 아니었다. 1956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같은 야당인 진보당(아직 준비위원회 시절이었다.)을 대한 태도를 보면 민주당이 정권 못지않게 진보당을 적대한 사실이 분명하다. (<조봉암과 1950년대 상>(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120-146쪽)
나는 해방공간에서 극좌와 극우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 10년 후 같은 틀의 공생관계가 자유당과 민주당 사이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틀”이라 함은 민심을 외면하는 정치세력들이 왜곡된 정치구조의 혜택을 나눠먹는다는 뜻이다. 해방공간에서 좌우의 극단파가 이런 관계를 통해 통일민족국가에 대한 민중의 염원을 묵살하고 분단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10년 후에도 비슷한 관계가 민심의 실현을 추구하던 조봉암과 진보당의 노력을 좌절시켰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의 비극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은 반성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분단건국의 원인이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채 10년 후 조봉암이 처형당하고 민심이 다시 짓밟힌 것은 아직 민간의 역량이 빈약한 시절의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대적 공생관계의 그림자가 이 사회에서 걷히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식의 결함” 때문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민주당에는 당을 좋은 길로 이끌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기득권 옹호를 위해 분단건국에 앞장섰던 한민당의 뿌리와 이승만 정권 이래 제1야당으로서 반사이익을 누려오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이 또한 민주당에 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실패를 불러온 바로 그 측면이다.
정권을 쥐는 것보다 제1야당 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내 몫 지키기에 더 편안한 길로 여기는 사람들이 민주당의 진로 결정에 상당한 지분을 지키고 있다. 50여 년 전의 민주당이 조봉암과 진보당을 싫어한 것처럼 공생관계의 틀을 위협하는 제3세력(박원순이든 안철수든 통합진보당이든)의 득세를 꺼리는 경향이 민주당에 있다. 정권의 어떤 심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민심의 절반이 ‘무당파’의 자리를 지키는 기이한 현상은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의 전통에 대한 민간의 넓고 깊은 불신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참혹한 몰골을 보이고 있는 지금 의미 있는 제3세력의 자리에 서있는 것은 안철수뿐이다. 안철수에 대한 새누리당의 비방 중에 “기회주의자”란 말은 반갑기까지 하다. 65년 전 민심의 실현을 위해 좌우합작에 나선 중간파가 양쪽에서 듣던 말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반응에 관심이 간다. 안철수와 어떻게든 연대하여 정치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도 민주당의 일각에 있고, 제1야당의 위상을 위협하는 제3세력으로서 안철수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욕심도 다른 일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낙청 교수가 제시하는 ‘2013 체제’ 실현의 첫 번째 열쇠가 민주당의 손에 쥐어져 있다. “역사의식의 결함”이 박근혜만이 아니라 민주당의 것이기도 한 것이 아닌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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