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이 저격당한 얼마 후 오기영은 <신천지> 제2권 제8호(1947년 9월)에 실은 글 “정치도(政治道)”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 죽음에 당하여 모든 애증과 시비를 초월하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인정이다. 이 인정은 이미 하나의 윤리요 도덕으로서 생전에 피차 어떠한 원한이나 애증을 가졌던 사이라도 이것을 다 풀어버리고 다만 그 죽음을 아끼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국 옹졸한 인간임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이제 한 정치가가 죽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좌우가 다 같이 죽음을 통석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예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생전의 시비공과를 초월했을 때에 아름다운 예의일 것이지 죽은 이의 입에 말이 없음을 다행히 여겨 저마다 제 소리로 고인을 떠받드는 것은 여기 정치적 의도가 섞였음을 간파할 때에 예의와는 거리가 멀고 요술과는 근사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그러면 아주 까서 말하거니와 적귀(赤鬼)라고까지 하고 여적(呂賊)이라고까지 하던 이들이 그를 갑자기 “우리 편의 애국자”라고 성명하는 것은 무엇이며 기회주의라고 공공연히 경멸하고 심하게는 “인민의 적”으로까지 몰아칠 듯하던 이들이 갑자기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라는 시호를 보내고 상제(근민당)보다 더 서러워하는 복상제가 나타나는 것은 무어냐 말이다.
그가 죽었다고 하여서 그 죽음을 삼팔선으로 하고 갑자기 그의 정치 이념이 달라졌을 까닭은 없다. 하다면 생전에 그를 욕하던 것이 옳았다 할진대 사후의 칭송이 우스운 일이요, 사후의 통석이 옳다 할진대 생전의 경멸이 부당하였던 것일 것이다. 그는 호협하고 너그러운 이였던 분이라 생전의 자신에 대한 포폄에 개의하지 않았듯이 사후의 “비례적인 과공”도 웃고 볼는지 모르나 후일의 사필의 그의 정치적 공과를 논하는 국시(局時)에 그에 대한 시비를 표변하는 이들의 시비도 가릴 것이다.(<진짜 무궁화>(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110-112쪽)
“생전에 그를 욕하던 것이 옳았다 할진대 사후의 칭송이 우스운 일”이라기보다 “사후의 통석이 옳다 할진대 생전의 경멸이 부당하였던 것”이란 말이 더 적절하게 들리는 것은 꼭 내가 여운형을 존경해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극좌와 극우의 그에 대한 비방과 중상 중에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그가 친일파라는 주장. 이 주장이 좌우에서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버치 중위가 좌우합작 사업 기획 단계에서 일본에 사람을 보내 진위를 확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B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55쪽)
생전과 사후의 그를 대하는 태도가 표변했다는 지적은 우익보다 좌익에 해당하는 말이다. 여운형 조난 직후 이승만과 김구의 반응은 예의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이승만은 “몽양의 불행에 내 어찌 기분이 좋을 리 있으리오.” 하는 말로 시작해 “하여간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 정도 논평이 있었다. 김구는 “놀라움을 마지않으며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라며 범인이 신속히 체포되기 바란다고 했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2일)
반면 박헌영이 장악하고 있던 민전의 반응은 요란했다. 오기영이 말한 “상제보다 더 서러워하는 복상제”란 저격 이튿날인 7월 20일 민전 주도로 만들어진 ‘구국대책협의회’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각 정당 단체를 총망라 구국대책위원회 결성”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유지를 끝까지 계승 실현하기 위하여 20일 근로인민당에 모인 민전 산하단체와 그 외의 70여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1) 테러 박멸 (2) 친일파 민족반역자 숙청 (3) 민주경찰 수립 (4) 공위의 추진과 유령단체 제외 등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기로 결정하고 ‘구국대책위원회’를 신진당, 청우당, 민주한독당, 민주동맹, 신한국민당, 좌우합작위원회, 건민회, 사민당, 근로대중당, 민생동맹 등의 각 단체 대표 1명씩이 참가하여 조직하였는데 앞으로 이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바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1일)
그 이튿날인 21일에는 “11개 정당 35개 사회단체를 총망라한 구국대책위원회”의 공동성명이 나왔다. 7개조의 주장이 열거되어 있었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2일)
1. 여운형 선생에 대하여 전 민족적 최대의 조의를 드리기 위하여 민주주의정당 및 사회단체의 인민장으로 할 것
2. 여 선생의 하수자를 즉시 체포할 것을 요구하며 공위 속개 중 일체 반탁테러 파괴에 참가한 (중략) 계열의 일체 테러단을 즉시 해산하고 단원을 일체 검거 엄벌할 것
(제3조는 기사에 빠져 있음)
4. 테러단의 실제적 조종자인 친일파집단을 즉시 해체하고 그 계열을 공위에서 제외할 것
5. 이러한 모든 파괴 시위를 방임하고 무제한의 자유를 허여하여 오늘날 이 중대한 사건을 야기하도록 객관적으로 방조한 경찰의 책임자들을 추궁 파면할 것
6. 군정기관 내에서 일체 친일도당을 즉시 구축할 것
7. 인민의 구국적 자유에 대한 법적 보장을 받아 인민 자신으로서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법률을 수호케 할 것
이 기사에는 제2조 주장 중 “(중략)”으로 표시한 부분의 비난 대상을 가려 놓았고 제3조가 빠져 있다. 가리고 빠트린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이를 반박한 7월 28일의 한민당 성명서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이런 대목이 있다.
이번 여운형씨 사건의 책임을 우리 한국민주당에게 지우려고 하는 음험한 모략에 대하여는 본당으로서는 철저히 항의하는 바이다. (...) 소위 구국대책위원회의 명의로 지난 22일에 미소공동위원회의 미소 양국 수석대표에게 제출한 진정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간과치 못할 사항이 기재되어 있는 것에 언급치 않을 수 없다.
“3. 반탁투쟁위원회의 주동자로서 모스크바삼상결정을 적극 반대하여 왔으며 이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5호 성명에 서명하고 공위에 침입하였고 이번 여 선생을 살해한 테러단의 실제 조종자인 친일원흉 한민당 그 계열을 반드시 공위에게 제외할 것”
구국대책위원회는 여운형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였다. 그 내용이 설령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공산당-남로당의 해묵은 주장을 “물실호기(勿失好機)”라는 듯이 달려드는 꼴이 보기 흉하다. 김규식은 7월 23일 합작위가 구국대책위원회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동아일보> 1947년 7월 24일) 다음날 신한국민당, 신진당과 민중동맹이 구국대책위원회와 관련 없음을 밝히는 공식 성명을 냈다. (<동아일보> 1947년 7월 24일)
여운형의 죽음에 임해 그와 박헌영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며 박헌영의 정치적-인간적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여운형이 피격 당시 갖고 있던 손가방 안에 박헌영이 보낸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1946년 4월 16일에 여운형의 환갑 축하로 쓴 편지였다.
“당신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당신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왔고 조선 노동계급을 위해 용감히 투쟁해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삶과 같은 위대한 생애를 회고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현 정세는 복잡미묘한 성격을 띠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위기에서조차 당신은 현명한 관찰로 우리의 민주독립을 위해 옳은 노선을 보여주셨습니다. (...) 환갑을 맞이하여 건강과 장수를 축원합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316쪽에서 재인용)
극진한 존경과 신뢰를 담은 편지다.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 이런 편지를 보내고 있던 무렵에도 박헌영 추종자들은 여운형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한 정황을 박병엽은 이렇게 증언했다.
김일성이 또 박헌영에게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여운형․백남운․김원봉․홍명희․김창숙․장건상․김성숙 등 좌파 인사들도 만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처음에는 견제 심리에서인지 꺼리는 태도를 보였던 박헌영도 결국 동의했다고 한다. 이 밀담이 계기가 되어 박헌영이 4월 6일 서울로 돌아간 지 열흘 남짓 만에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 이것은 박헌영이 여운형에게도 소련군정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김일성의 제안에 일단 동의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추진시키지 않자 김일성이 여운형의 월북을 위해 직접 사람을 파견한 결과였다.
보기 좋은 편지는 보내면서도 여운형이 북쪽과 접촉을 가지는 것은 꺼렸다는 이야기다. 이후 좌우합작의 진행을 놓고도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여운형을 나쁘게 이야기한 사실을 박병엽은 일관되게 증언했다.
1946년 6월 29일의 협의회에서 좌우합작문제도 논의되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여운형이 야심가여서 자신의 지위가 약해지니까 미국을 등에 업고 새 국면을 주도해나가려고 한다는 것,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판사사건을 근거로 공산당을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 남조선민전을 분열시키려고 여운형을 끌어들여 단독정부 수립의 정치적 기초를 마련하려고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운형의 태도는 아무리 좋게 보아야 미국의 전략에 말려들어 이용당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박헌영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헌영은 회의에서 미국이 이용하고 있는 좌우합작운동을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북조선공산당 상무위원들 가운데 박헌영과 같은 의견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박헌영이 이런 입장을 표명하자 김일성은 여운형의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빼고 신문을 보니까 여운형이 미국의 입장을 좇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넌지시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그것은 김일성 동지가 여운형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여운형은 대중 앞에 나서 선동하기를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이며 부르조아 민주주의자이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째로 부르조아 민주주의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면서 여운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여운형이 피격 당시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는 이런 내용의 메모도 나왔다고 한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263-264쪽)
“인민당의 전술 계획”
1. 우리는 남조선에서 합작추진 우익을 반대하는 반동적 요소를 좌우익 합작과정에서 평화적 전투를 통해 저지해야 한다. 우리는 소극적인 반탁진영이 반동적 지도자와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켜야만 한다.
2. 우리는 공위 휴회 전에 미국대표가 그들의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3. 우리는 북조선과 남조선의 통일이라는 관점 하에서 우익이 반 북조선적 견해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북조선에서 수행된 모든 민주건설들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946년 7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메모의 제1항에서 중도 우익이 극우파가 장악한 반탁진영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을 제시한 것이 눈에 띈다. 미소공위 성공을 바라는 중도 우익이 김구-이승만 영수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좌우합작의 길을 만드는 데 좌익의 호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익의 분열에서 바라는 효과를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공산당이 좌익의 ‘본산(本山)’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인민당의 역할을 공산당에 대해 보조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남로당이 세워진 뒤 그가 남로당에 대항하던 사로당을 해체시키고 근민당을 창당한 것도 이 관점을 지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남로당이 이남 좌익을 위한 첫 배라 보고, 그 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해 두 번째 배로 근민당을 만든 것이었다.
이 메모의 제2항과 제3항에도 그의 투철한 ‘전략마인드’가 비쳐 보인다. 그에 비하면 박헌영은 ‘전술마인드’를 벗어나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던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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