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여담부터. 오는 9월 7일이면 카터 전 미 대통령이 하나의 신기록을 이룰 것이다. 대통령 퇴임 후 31년 7개월 16일을 채움으로써 미국 대통령 퇴임 후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카터가 깨뜨리게 될 종전 기록은 1933년 3월 4일에 퇴임하고 1964년 10월 20일에 사망한 허버트 후버(1874~1964)의 것이었다.

 

퇴임 기간이 길 뿐 아니라 그 내용이 충실하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재임 중 인기가 형편없다가 퇴임 후의 활동을 높이 평가받는 카터를 “미국 최고의 전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후버도 당대에 그런 평가를 받았다. 트루먼 행정부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걸쳐 행정개혁위원회(후버위원회)를 이끈 업적도 높은 평가를 받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전기 <The Ordeal of Woodrow Wilson>를 쓴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28년 선거에서 58% 득표율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가 1932년 선거에서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한 후버의 굴욕은 무엇보다 대공황에 대한 효과적 대응에 실패한 때문이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통령 출마 전에 행정 경력만을 갖고 있던 그가 격변의 시대를 맞아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을 그 실패의 원인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그가 재임 중 시행한 공황 대책 중 루스벨트 뉴딜 정책의 발판이 되어준 것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루스벨트처럼 ‘시대정신’을 부각시키는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947년에 트루먼 대통령이 후버위원회를 만들어줌으로써 후버가 대통령 시절 발휘하지 못했던 탁월한 행정능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실적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 아이젠하워도 후버위원회를 지속시켰다고 한다. 영욕을 초월한 위상 때문에 어떤 문제에도 당당히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이 시절 후버의 강점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후버의 의회 증언 한 대목이 당시 조선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당당한 소신 표명이었던 것 같다.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대외원조 예산에 관한 증언을 행한 가운데 조선에 관한 이런 내용이 있었다.

 

“소련은 구주의 장애물이며 동시에 조선 통일에 관한 장애물이다. 나는 조선을 여하히 처리해야 할런지에 관하여 건설적 사상을 자아낼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금후 다년간 자치를 행할 수 없다. 조선이 재통일된다 해도 누군가 금후 25년 동안 그들의 정부를 감독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이 분열되어 있는 동안 우리는 조선 문제 해결을 기도할 수 없다. 소련이 그 태도를 유지하는 한 문제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을 자유자족케 할 수 있을 것이나 소련이 북방에 잔류하는 동안 강력한 점령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0일, “조선 25년간 감독론”)

 

이 증언이 알려진 며칠 후 조선을 방문 중이던 미국 언론인단과 조선 기자들의 회견이 있었는데, 후버의 발언에 관한 조선 기자들의 질문에 미국 언론인들의 이런 대답이 있었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5일, “신탁문제 정의-미조 기자단이 담론”)

 

제너리(콜리어 잡지 주필): “후버 씨는 1 시민의 입장에 있다.”

 

패만(밀워키저널 주필): “후버 씨의 말에 조선에서 큰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그 해결은 조선인 자신이 그럴 필

요가 없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다.”

 

쨘슨(UP 부사장): “후버 씨 말은 과장된 말이라고 믿는다.”

 

사법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에 막 다녀온 미군정 사법고문 피글러도 7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후버 발언에 관한 질문을 받자 그 의미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문) 후버 씨가 의회에서 25년간 조선을 감독할 필요가 있다고 언명하였다는데 이러한 조선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여론이 미국 안에 많은가?

(답) 후버 씨가 말한 것은 못 들었고 그러한 말을 하는 미국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3일, “후버 씨의 조선 감독론 미국 내에 찬성자는 없다.”)

 

5년간의 신탁통치도 못 받아들이겠다는 반탁운동이 극성스러운 조선 사회에서 후버 발언에 대한 반응은 모욕감과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이례적으로 후버 발언에 대한 지지가 독촉 선전부에서 나왔다. ‘반공-반소’라면 무슨 소리든지 지지하는 단체였던 모양이다.

 

“미국 전 대통령 허버트 후버 씨가 의회에서 난관문제에 관하여 소련은 구주의 장애물이며 동시에 한국 통일에 장애물이라고 공표한 것은 진상을 파악한 것이다. 우리는 더욱 한국의 실정 특히 북한 암흑정치를 중외에 널리 알려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동아일보> 1947년 7월 23일, “조선 25년 감독 운운은 ‘카’선언 전복을 의미”)

 

후버 발언에 대한 규탄은 여러 방면에서 나왔는데, <자유신문> 7월 25일자 사설 “노(老) 후버의 망언”에 그 논지가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다.

 

(...) 조선에 대한 연합국의 책무는 국제적으로 공약된 막부3상결정에 의하여 이행되어야 할 것이요, 그것에 의하여 연합국의 조선 원조의 한도도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재통일된 후 25년간 조선의 정부를 감독하여야 한다는 것은 조선민족의 자치능력을 모욕한 일대 망언일 뿐 아니라 제국주의적 약소민족 침략을 교사하는 악질적인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제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국가에 대한 민주주의 연합국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전후의 처리는 마땅히 약소민족 해방이란 목표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요, 노 후버의 말과 같이 25년의 사슬을 다시 채우고 그 점령지구의 물자를 원조함으로써 정치적-경제적 벗어날 수 없는 예속을 강요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인 연합국이 “제국주의국가” 아닌 “민주주의국가”였던가? 이것은 일종의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연합국이 전쟁 중 “약소민족 해방”을 약속한 것은 전쟁에 유리한 효과를 바란 전략적 조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세계질서 재편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 해방자의 역할을 계속 선전했지만, 화장실 가기 전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었다. 한편 약소민족 입장에서는 그 속셈을 설령 알더라도 연합국을 민주주의국가, 해방자로 떠받들어야 약속 이행을 바랄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 천사야.” 치켜 올림으로써 상대방의 천사 역할을 바라는 것이었다.

 

후버 발언은 긴 파장을 남기지 않고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 발언에는 깊이 새길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후버는 “1 시민”으로 돌아간 전임 대통령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트루먼 행정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의 하나였다. 대통령 퇴임 후 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는 소소한 전술전략에 개의치 않는 ‘원로’였다. 그의 발언에는 미국의 당시 입장이 외교적 수사(修辭) 없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7월 중순을 지나는 동안 미소공위의 전망은 계속 어두워졌다. 10일, 14일에 이어 16일에 열린 제43차 본회의는 오후 1시 반에서 6시까지, 최장시간 회의를 기록했으나 고대하던 제12호 공동성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날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이 합의가 안 되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했고,(7월 11일자 일기) 밤에는 하지가 이승만을 만났다.(7월 13일자 일기) 여운형은 이 날 미소공위의 진행을 걱정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그가 내놓은 마지막 담화였다.

 

“국제회의란 의견□□로 가다가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지만 필경 이것은 극복되어 결론을 맺는 것이다. 미소공위에서 구두협의 대상문제로 약간 난관에 봉착된 모양인데 이것도 결국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은 적국도 전패국도 아니고 또 조선에 관한 국제공약이 엄존한 이상이 난관은 반드시 극복되고야 말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17일)

 

그런데 이 시점에서 미소공위의 전망을 비관하는 마셜 국무장관의 발언이 전해졌다.

 

[워싱턴 17일발 AP합동]마샬 미 국무장관은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는 공위진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재 공위는 재차 과거에 당면하고 있던 난관에 도달하고 있는데 미 측으로서는 공위 심의로부터 탈퇴할 의사는 없다.”

 

[워싱턴 17일발 INS합동] 마샬 미 국무장관은 조선 문제에 관하여 신문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통일정부 수립을 심의하는 미소공위는 그 진전에 있어서 재차 정돈상태에 도달하였는데 그 결과로서 미국이 즉시 이에 대응할 행동을 취할 계획은 갖지 않고 있다. 미 측이 조선으로부터 철퇴한다는 보도가 있는데 이는 진실이 아니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18일)

 

‘외교적 수사’란 말도 있거니와, 나쁜 것을 직설적으로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이 외교다. 미소공위는 6월 중순까지 더할 수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6월 23일의 준 관제(準 官製) 반탁시위가 악재가 되어 6월 말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보름 후 마셜 국무장관이 비관적 견해를 내놓았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게 보인다. 7월 13일 일기에서 미소공위에 대한 마셜의 태도가 바뀌는 조짐을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조선 내 상황과 관계없이 미국 정책이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