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란에 시달리던 전국시대 중국인들은 평화를 가져올 ‘천하 통일’을 염원했고, 진 시황의 통일은 이 염원에 힘입은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진 시황의 통일은 통일천하를 안정된 상태로 이어갈 ‘천하제국’ 체제의 구축에 이르지 못했다.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신하고도 50여 년이 지나서야 오-초 7국의 난을 계기로 제국의 내부가 정비되었다. 그리고 다시 30여 년이 지나 무제 때 동서남북 외이(外夷)들과의 관계를 포괄하는 천하제국의 틀을 세울 수 있었다.


한 무제가 세운 천하제국의 틀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생각을 모으고 있는 참에 막 나온 흥미로운 논문 하나가 눈에 띈다. 양저위(杨泽宇)와 청하이옌(成海燕)의 “대일통(大一统)에서 정통(正統)으로(从“大一统”到“正统”:《史记》《汉书》民族传比较视野中“华夷观”的历史衍变与嬗代整合)“(文山学院学报 32卷 5期). 2019년 10월에 발표된 따끈따끈한 논문이다. 


논문의 내용인즉 <사기>와 <한서>의 외이 열전을 비교할 때, <사기>는 천하를 하나로 보는 ‘대일통’의 관점을 보여주는 데 반해 <한서>는 화이(華夷)의 구분을 엄격하게 보는 ‘정통’의 관점을 보여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150년의 시차를 두고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 사이에 적지 않은 화이관의 차이가 보인다는 것이다.


‘대일통’과 ‘정통’. 오랑캐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두고두고 떠올릴 주제다. 중화제국이 팽창 추세를 보인 당나라, 원나라, 청나라 때는 ‘대일통’이 중시되고 남북조시대의 남조나 송나라, 명나라 때처럼 위축 추세를 보일 때는 ‘정통’이 중시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청조(淸朝)에 저항하던 20세기 초의 중국 혁명가들은 ‘정통’을 내세워 만주족을 배척했지만 공화국이 세워진 신해혁명 이후에는 중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대일통’을 앞세우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인류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 1910-2005)이 1988년 제기한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을 ‘중화민족’ 즉 한족의 정체성에 대한 표준 담론으로 볼 수 있다. 상고시대에 ‘화하(華夏)’가 형성된 이래 주변의 다른 민족을 그 문화적-정치적 구조 안으로 꾸준히 흡수하며 확장해 온 것이 지금의 한족이라는 것이다. 페이샤오퉁은 앞서 소개한 리지(李濟, 1896-1979)와 함께 중국 인류학계의 선구자인데, 서양 학문의 단순한 수입에 그치지 않고 동태적(dynamic) 고찰의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화민족에 대해서도 어떤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으로 정의하는 관점이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사카모토 히로코의 <중국 민족주의의 신화>(양일모-조경란 옮김, 지식의 풍경 펴냄)에 소개된 페이샤오퉁의 일화 중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즈음하여 중국어의 “자먼([입 구 변에 스스로 자]們)”이란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뜻이지만 “워먼(我們)”과는 다르다. “워먼”이 청자(聽者)를 배제한 화자(話者)의 범위만을 가리키는 것과 달리 “자먼”은 화자와 청자를 아우르는 것이다. 중국인은 대일통의 시대에 “자먼”을 생각하고 정통의 시대에 “워먼”을 생각한 것 아닐지.

 

페이샤오퉁
중년기의 리지. 그는 1949년 이후 타이완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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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미르고원 서쪽으로는 바로 가까운 곳까지 페르시아문명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동쪽으로는 자연조건이 척박하고 따라서 인구가 희박한 광대한 타림분지를 지나가야 중국문명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타림분지를 지나는 안정된 통로를 만드는 것이 실크로드의 열쇠였다.


타림분지는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어서 사람이 살 만큼 물 있는 곳이 드물다. 분지의 북쪽으로 천산(天山)산맥 기슭과 남쪽으로 곤륜(崑崙)산맥 기슭을 따라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있는 곳의 오아시스에 마을과 도시가 점점이 형성되어 있었다. 숙소와 식량 등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이 도시들을 잇는 두 개의 띠가 실크로드의 북로와 남로가 되었다.


이 두 개의 길을 통상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부르기도 하는데 혼란스러운 이름이다. 천산산맥의 북쪽과 남쪽을 지나는 길로 들리기 때문이다. 천산산맥 북쪽의 중가리아(Dzungaria) 지역을 지나는 길을 ‘천산북로’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길은 실크로드로서 기능을 발휘한 길이 아니다. 타림분지 남북의 길을 ‘타림 남로’와 ‘타림 북로’로 부르는 편이 좋겠다.


일부 학자들이 ‘초원의 길’이라 부르기도 하는 중가리아 지역은 타림분지보다는 강우량이 많고 따라서 인구도 많다. 그런데 왜 중가리아 아닌 타림분지를 실크로드가 지나가게 되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생각된다.


첫째는 타림분지를 거치는 길이 페르시아문명권 중심부로 가는 데 더 가깝다는 점이다. 분지를 지나 파미르고원만 넘으면 바로 페르가나 계속에 들어설 수 있다. 반면 중가리아를 지나면 끝없는 초원지대일 뿐이다.


둘째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인데, 타림분지 오아시스 도시들의 정착성이 중가리아 초원지대의 유동적인 유목사회에 비해 안정된 조건을 보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인원과 물자의 통과에는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은 통과지역의 세력에 대한 세금이나 선물, 또는 약탈 위험으로 나타난다. 통과 지역이 정착 세력의 장악 하에 있을 때 통관세를 내는 것이 장악 세력이 불확실한 지역에서 약탈의 위험을 겪는 것보다 상인들이 감당하기 쉬운 편 아니었을까?


실크로드를 포함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역사는 그 실제 의미에 비해 연구가 적은 상황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근대역사학 연구가 국민국가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지역에 강력한 국민국가가 근대 들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기록문화가 취약한 지역이어서 체계적 문헌자료가 적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설 무렵에 시작된 고고학 발굴과 연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 역사 연구가 새로운 길을 열어 왔다.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을 배경으로 시작된 이 지역 연구가 2차 대전 후에는 소련과 중국 등 이 지역을 영토로 한 공산권 국가들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이후 국제적 협력 분위기가 자라남에 따라 연구가 더욱 발전하고 있다.


그 성과의 축적에 따라 문헌 연구만으로는 떠올릴 수 없던 과거 이 지역의 여러 가지 모습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그 새로운 성과를 잘 정리해서 보여주는 책 하나가 연전에 나왔다.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문헌을 곁들인 새 역사(The Silk Road, A New History with Documents)>. (류형식 번역으로 2015년 소와당에서 나온 번역판은 이 책의 구판인 듯)


책을 펼치기 전에는 “문헌(documents)”이란 말이 의아했다. 실크로드의 새 역사라면 고고학 연구에 의거한 것일 텐데 문헌이라니? 알고 보니 발굴을 통해 찾아낸 상당량의 문헌이 연구 확장에 활용되어 온 것이었다. 고고학 발굴로 출토되는 문헌은 대개 금석문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종이에 적힌 문헌이 쏟아져 나오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썩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종이가 귀해서 폐기된 각종 문서로 수의(壽衣)를 만든 사례가 많기 때문에 무덤 안의 시신에서 벗겨낸 종이옷에서 온갖 신기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이 연재 중에 이 방면 이야기를 또 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는 이 책에 실린 내용 중 재미있는 것을 더러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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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 무제가 즉위 직후인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 목적이 흉노에 대항하기 위한 월지와의 동맹에 있었다고 <사기> 등 사서에는 적혀 있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사명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을 것 같지 않다. 사마천 등 사가들에게 흉노와의 대결이 워낙 크게 보였기 때문에 서역에 대한 관심을 모두 흉노와의 관계에 종속시킨 것 같다.


중시할 필요가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당시의 정황이란 한나라의 서방 교역 증대였다. 거대한 제국을 향한 정치적 통합은 거대한 시장을 향한 경제적 통합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진 시황의 통일정책에서 도로 건설과 도량형 정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다음 단계의 경제적 통합은 한 무제의 염철(鹽鐵) 전매정책으로 나타났다.


통일 이전에는 변경의 여러 제후국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 오랑캐와 교역을 벌이기도 하고 어느 제후국의 통제도 받지 않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많았다. 그러나 한나라의 치안이 자리 잡는 데 따라 모든 경제활동에 대한 중앙조정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오-초 칠국의 난 때 거상(巨商)들의 지지가 조정의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까지는 천하 형세를 좌우할 만한 재력이 민간에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앞선 시기에 여불위(呂不韋)가 재력을 발판으로 통일 직전의 진나라를 농단한 일도 그 시대 민간자본의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중앙집권의 강화에 따라 재정이 크게 늘어나고 대외교역도 조정의 주도하에 확장될 길이 열렸다. 종래 사방의 외이로부터 중국에 수입되던 물자는 각 방면의 자연조건에서 나온 토산품이 대부분이었다. 외이의 문명-기술 수준이 중국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서쪽에서는 다른 문명권에서 나온 특이한 물품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광대한 사막과 험난한 산악지대 저쪽에 페르시아제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멀고 험한 여정 때문에 엄청난 운송비가 필요했지만 수십 년 평화 속에 한나라 사회의 소비수준이 높아지면서 수요가 갈수록 커졌다.


중국에서 서방으로 향하는 길로 이른바 실크로드가 선택된 것은 지형보다도 길 저쪽에 적합한 교역 상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타림분지의 사막과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을 지나는 길이 지형으로는 매력적일 수 없다. 페르시아제국이 만들어놓은 매력적인 시장이 파미르고원 바로 바깥까지 들어와 있기 때문에 파미르고원을 넘는 길이 뚫린 것이다.


그리스를 공격한 ‘다리우스 대왕’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가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서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발칸반도, 동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걸치는 거대한 제국을 경영했다. 이 제국은 강역 내에 튼튼한 도로망을 건설했고, 그 일부가 실크로드의 서반부를 이루게 된다. 알렉산더가 이 제국을 정복하고 죽은 후 제국의 강역 대부분은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로 넘어갔다가 기원전 130년대에는 한 지방 세력이던 파르티아(Parthia)가 자라나 이란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치는 영역을 차지했다. 아르사케스(Arsacid) 왕조의 파르티아제국이 한 무제 당시 파미르고원 서쪽을 장악하고 있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한나라의 교역 상대였다.


파미르고원 서북쪽으로 펼쳐진 페르가나 계곡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에 걸쳐있는 지역으로 아케메네스 시대에 페르시아문명이 자리 잡고 셀레우코스 시대에 헬레니즘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알렉산더 정복 때 그 이름을 딴 몇 개의 알렉산드리아 중 하나가(Alexandria Eskhata) 이곳에 있었던 사실에서 당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아볼 수 있다. 한 무제 당시에는 파르티아제국의 판도 안에 있었는데 안식(安息)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진 파르티아와 별도로 이곳은 대완(大宛)으로 알려졌다. 장건이 찾아간 대월지가 페르가나 남쪽의 박트리아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장건은 이곳을 거쳐 갔고, 한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교역 상대가 되었다. 장건이 대완을 처음 방문한 지 20여 년 후 무제가 대완에 정벌군을 보내기도 했는데, 군대를 이끈 이광리(李廣利)가 ‘이사(貳師)장군’이란 별명으로 통하게 된 것을 보아도 당시 중국인이 대완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댜. ‘이사’는 대완의 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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