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나라의 기원전 109년 조선 정벌이 ‘예방전쟁’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에서 설명한 일이 있다.

“조선 왕이 한나라에 입조한 일은 그 전에도 없었던 일이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한나라에 직접 통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나라의 침공은 조선 쪽보다 한나라 쪽 사정 변화에 원인이 있는 일이었다. (...) 기원전 109-108년 한나라의 조선 정벌은 이처럼 흉노를 상대로 키워놓은 군비를 활용할 것이 없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을 상대로 키워놓은 군비를 가지고 미국이 여기저기 ‘예방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69-71쪽)

그러나 ‘전쟁을 위한 전쟁’으로서 예방전쟁의 성격에 그치는 것은 아니고, 장기적 시각에서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건국 때부터 흉노에게 많은 고통을 당한 한나라는 국경 안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제국의 안정을 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교화’되지 않은 채로 기술만 넘겨받은 오랑캐들이 국경 밖에서 큰 정치-군사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중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었다. 국경 밖의 오랑캐들을 조공관계로 통제 아래 두는 ‘천하체제’는 현실적인 안보를 위해 필요했던 중국의 대외정책이었다. 기원전 119년까지 흉노의 위협을 가라앉혀놓은 직후 남월과 조선을 정벌한 것이 중국의 첫 천하체제 시도였다.” (74쪽)

조선과 남월이 동방과 남방에서 큰 세력을 이루는 것이 종래의 5복(五服) 체제로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한 제국의 통치가 전복, 후복, 수복까지는 직접 미치고 요복과 황복은 조공으로 통제하는데, 조선과 남월 같은 비교적 큰 나라가 요복으로서 황복의 다른 나라들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부터 한 무제까지 구축해 온 제국 체제는 5복 체제와 다른 것이었다. 정치적 권위가 여러 층으로 포개지는 5복 체제는 분권적 성격을 가진 것인데 진-한 제국은 보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추구한 것이다. 제국 내부에서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옮겨간 것도 전복-후복-수복 사이의 차등을 줄이는 방향이었고, 제국 외부에서도 요복과 황복의 차이를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요복이 강성하면 제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흉노와의 경험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결과였다.


조선과 남월의 국력 성장은 요복의 위치로 나아가 있었다. 중화제국이 분권적 성격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 위치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다면 문명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차츰 수복과 후복의 위치로 발전해 갈 추세에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가 오-초 7국의 난을 계기로 중앙집권을 대폭 강화하면서 조선과 남월 같은 큰 세력을 제국 밖에도 용납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한나라는 조선과 남월을 정복해서 제국에 합치려 했다. 그래서 남월의 터에 9군을 설치하고 조선의 터에 4군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남월 9군은 큰 굴곡 없이 중화제국에 편입되었는데 조선 4군은 결국 축출되고 한반도는 독립국가를 발전시킨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결정적인 차이는 한나라 멸망(220년) 후 중국 북부가 5호16국(五胡十六國)이라는 ‘오랑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화제국이 남쪽으로 퇴로를 찾은 데 있었다. 진(晉)나라가 촉한(蜀漢) 및 오(吳)나라의 경쟁을 물리치고 280년에 중국을 재통일했지만 천하 질서를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30여 년 후 오랑캐 세력에 밀려 남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중화제국은 국력 회복의 길을 남방 개척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남월 지역의 한화(漢化)가 빨라졌다. 반면 오랑캐의 각축장이 된 북중국 외곽에 있던 조선 지역은 중화제국의 압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전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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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중국’은 “宅兹中国”의 중국 그대로도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 그대로도 아니다. 언어, 습속, 사상, 문화, 제도 등 여러 요소들이 어울려 ‘중국적’이라고 인정할 만한 형체를 오랫동안 유지한 것을 ‘중국’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나타난 중국의 모습 중 가장 표준적인 것이 ‘천자국(天子國)’이다. 천자가 천명을 받아 천하 전체를 다스리되, 주변부는 여러 제후에게 나눠 맡기고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를 중국이라 한 것이다.


진 시황의 ‘천하 통일’을 계기로 이 천자국의 틀이 바뀌게 된다. 춘추전국시대까지 천하의 구조는 5복(五服)의 구조로 파악되었다. 천자의 위치로부터 거리에 따라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이 동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천자의 집권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통제 수준이 여러 등급으로 나뉜 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의 통일로 제국체제가 세워지자 제국 안의 화(華)와 제국 밖의 이(夷), 2분법이 지배적 관점이 되었다.


진 시황의 통일이 바로 제국체제를 세운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 이전의 분권세력인 제후국들을 파괴함으로써 기초공사는 한 셈이지만 제국체제의 건축물을 제대로 세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천하제국이 십여 년밖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쟁패를 통해 한나라를 세웠지만(기원전 206) 그 또한 완전한 천하제국이 되지 못했다. 유방 말년까지(기원전 195) 이성(異姓) 제후를 정리한 데 이어 문제(文帝) 즉위 후 여씨(呂氏) 세력을 척결하고(기원전 180) 경제(景帝) 때 오-초 7국의 난(기원전 154)을 평정함으로써 제국의 내부 권력구조가 겨우 완성되었다.


기원전 141년 무제(武帝)가 즉위할 때 제국의 내부는 정비되어 있었지만 제국 외부와의 관계가 천하제국의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나라 개국 이래 흉노와의 관계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무제는 기원전 133년부터 흉노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계속해서 기원전 111년과 110년에 다시 정벌군을 보냈을 때는 “수천 리를 가도 흉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흉노 퇴치에 국력을 기울였다.


20년에 걸친 횽노와의 전쟁이 워낙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면이 눈에 잘 띄지 않는데, 무제는 북쪽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즉위 직후에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한 것이 월지(月氏)와 연합해 흉노를 협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풀이되지만, 서역에는 서역대로 무제가 노력을 기울일 의미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조선(朝鮮), 남쪽으로 남월(南越)을 정벌함으로써 무제는 한 제국의 모든 주변부를 정리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과 남월이 한 제국에서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큼 강한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은 전국 말기에서 한초에 이르는 혼란 속에서 중국문명이 대거 유출된 결과였다. 남월은 진나라에서 파견한 남해도위(南海郡尉) 조타(趙佗)가 진나라가 망할 때 지금의 광둥성 일대에 자립해서 왕조를 열고 한나라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은 기원전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에 투항할 때 동쪽으로 달아난 위만(衛滿)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나라가 기원전 111년 남월을 정벌하기에 이른 갈등의 뿌리는 철기(鐵器)의 밀수에 있었다. 당시 철기는 중국문명의 첨단제품으로,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 품목이었다. 그리고 그 2년 후 조선 정벌에 나선 첫 번째 이유는 조선이 주변 다른 세력의 조공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조공관계에 따르는 이득을 독점하면서 지역에 패권을 구축하는 것이 한나라의 천하체제 구축에 장애물이 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조선과 남월이 한나라에게 문제가 된 이유가 중국으로부터 파급된 요소들에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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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은 지금 존재하는 하나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뜻이 그에 그치지 않는다. ‘한민족’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한국사’라 하면 ‘대한민국 역사’보다는 ‘한민족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중국’과 ‘중국사’의 의미도 이와 같은 틀로 이해하려 들게 된다. 그러나 이 틀이 잘 맞지 않는 것은 우선 중국이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족인 한민족과 같은 ‘중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족(漢族)이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중국의 주류 민족이니 중국사를 “한족을 중심으로 중국의 여러 민족이 어울려 빚어낸 역사”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정도 개념이 표준으로 통용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다. 여진족과 몽고족의 ‘침략’에 저항한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은 한족의 역사에서는 영웅과 열사로 높이 받든 인물들인데, 여진족(만주족)과 몽고족이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이 된 이제,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다민족국가라는 사실보다 중국에서 ‘민족’의 의미를 더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한족(漢族)의 정체성 문제다. 중국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 한족을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볼 수 있는가? 민족 정체성의 주요 구성 요소로 언어, 역사, 혈통 등이 꼽히는데, 중국의 민족 구분에는 언어에 압도적 비중을 두는 것 같다. 역사를 볼 때, 지금 한족의 조상 중에는 과거 어느 시기에 ‘오랑캐’였던 사람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 고고학의 개척자 리지(李濟)는 1923년 하버드대학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하고 1928년 출판한 <중국 민족의 형성(The Formation of the Chinese People: an Anthropological Inquiry)>에서 형질인류학의 기준으로 ‘중국인’의 신체적 특성을 검토해서 중국인 내의 편차가 주변 민족과의 차이보다 작지 않다는 사실을 밝혔다. 예를 들어 북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의 차이가 북중국인과 남중국인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그의 두개골 계측 연구에 나타난다. 체형과 기질의 출신 지역에 따른 차이에 대한 통념은 중국인의 일상생활 속에 널리 자리 잡고 있다. 한족 자체가 하나의 ‘다민족민족’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국’의 의미를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중’ 자가 한국의 ‘한’ 자처럼 고유명사의 뜻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中國)’이란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서주시대 청동기 명문 중 “宅兹中国”이란 구절이다. 그 뜻은 “가운데 나라”인데, 여기서 “나라”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성읍 내지 지역을 뜻하는 것이다. 그 뜻이 차츰 넓어져 ‘중원(中原)’과 비슷하게 쓰이기도 하고 화이(華夷) 사상의 정착에 따라 ‘중화의 영역’이란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근대적 국제체제 안에서 국가를 새로 세울 때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쓰면서 줄인말로 ‘중국’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중국 역사학자 거자오광(葛兆光)이 “宅兹中国”이란 제목의 책(2011)을 쓴 것은 ‘중국’에 관한 역사 담론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사’의 범위가 지금의 중국 강역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악비와 문천상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송나라 때 사람들의 국가관을 기준으로 봐야 할 것이며, 후세에 한족에 통합되거나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포괄될 수많은 역사공동체들을 당시 중국사의 주체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피해의식을 가졌던 이른바 ‘동북공정’에도 이 문제가 투영된다. 고구려를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 보는 것은 지금의 중국 강역 전체를 중국사만의 무대로 보는 관점이다. 이에 대한 김한규의 지적은 한-중 양쪽으로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한중간의 ‘역사 전쟁’ 과정에서 한국의 학계와 언론계가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규탄하면서 ‘고구려사는 오로지 한국사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사물을 형성하는 과정의 서술임을 인정한다면, 고구려 역사가 현재의 한국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였음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고구려사가 중국사인가 한국사인가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천하국가>(소나무, 200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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