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 한(漢)나라 멸망 후 589년 수나라 통일에 이르기까지 3세기 반 넘는 시간이 흘렀다. ‘오랑캐(胡)’라 불리던 요소들이 중국에 통합된 것이 그 기간 동안의 많은 변화 중 제일 큰 것이었다. 5호16국(五胡十六國) 이래 오랑캐 왕조들이 북중국을 통치하는 동안 오랑캐의 중국화와 중국인의 오랑캐화는 나란히 진행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 빚어진 수-당(唐) 제국의 특성을 호-한(胡漢) 2중 체제로 설명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통합’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오랑캐와 중국의 차이는 혈통보다 제도와 관습에 본질이 있다. 지금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에는 긴 세월을 통해 많은 오랑캐의 혈통이 흡수되어 있는데, 그 흡수는 진 시황(秦 始皇)의 통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목을 위주로 하는 오랑캐사회의 질서 원리가 농경을 위주로 하는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 혈통보다 더 중요한 차이였다. 따라서 수-당 제국 통일의 의미는 영토의 통합, 혈통의 통합보다 질서 원리의 통합에 있었다. 


통합 이전에는 유목사회는 물론 농경사회에서도 질서 원리의 대부분이 법령보다 관습의 형태로 존재했다. 통합이 진행되는 동안 농경사회는 농경사회대로, 유목사회는 유목사회대로, 따로따로 운영한 것이 호-한 2중 체제였다. 아직 두 사회의 접점이 그리 크지 않은 단계였다.


접점이 확대됨에 따라 양쪽 사회를 같은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어느 단계에 이르면 두 사회를 포괄하는 전면적인 운영의 틀이 필요하게 된다. 이 새로운 틀에는 농경사회도 유목사회도 익숙지 않은 요소들이 적지 않게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익숙지 않은 제도에 사람들을 적응시키기 위해 예전에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관습을 명문화할 필요가 일어났다. 지주와 경작자의 관계, 상품거래의 기준, 상속의 원칙, 비행(非行) 응징의 방법, 관(官)의 역할 등등 많은 정치-사회적 관계가 성문법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법체계를 드는 학자들이 많다. 비슷한 시기에 제국을 운영했던 로마와 한나라를 비교해 보면 로마 쪽이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더 많이 포괄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나라에서는 로마만큼 성문법체계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수-당 제국은 고대의 로마 못지않게 다양한 요소를 품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율령체제가 당나라의 중요한 특징이 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북위에서 제정한 균전제(均田制)와 서위-북주에서 시행한 부병제(府兵制)가 당나라 제국체제의 뼈대가 되었다. 농경사회나 유목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제도들이 국가의 크고 강한 힘을 통해 대다수 인민의 생활과 활동 방식을 규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제도들을 인민이 “하늘이 내린”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황제부터 법 어기기 어려워하는 시늉을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중세사 연구자 박한제는 <대당제국과 그 유산>(세창출판사, 2015)에서 “호월일가(胡越一家)”를 당나라 통합성의 표현으로 제시하며 태종이 ‘황제’와 ‘천가한(天可汗)’의 호칭을 함께 칭한 것을 그 뜻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그 뜻을 밝힌 태종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자고로 모두 중화를 귀히 여기고 이와 적을 천하게 여겨왔으나, 짐은 홀로 그들을 사랑하기를 하나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 종락들이 모두 짐을 의지하기를 부모처럼 여겼다.” (<자치통감> 권 198, <대당제국과 그 유산> 248쪽에서 재인용)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Perilous Frontier)>(1989)에서 태종의 뛰어난 군사적 성공 역시 유목민의 전술을 잘 활용한 데 큰 이유가 있었다고 분석했다.(141-143쪽) 태종의 ‘천가한’ 역할이 호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랑캐의 가치관을 제대로 실현한 것으로 본 것이다. 형제들을 죽이고 부친을 겁박해서 황제 자리에 오른 것부터 중국의 윤리관으로는 엽기적인 행위지만 당시 오랑캐의 윤리관으로는 달랐을 수도 있다. 수 양제(隋 煬帝)에 관한 이야기 중에도 오랑캐의 관점을 떠올릴 만한 점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북위-서위-북주-수-당의 지배집단에서는 호-한 2중성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


당 태종(唐 太宗)이 즉위한 지 16년째 되는 642년에 광주(廣州) 도독 당인홍(黨仁弘)의 독직 사건이 불거졌다. 비리의 규모가 커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대리시(大理寺)의 판결이 황제에게 올라왔다. 

 

이 사건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당인홍이 개국공신이고 태종의 신뢰가 두터운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수(隋)나라 장군으로 있다가 당 고조(高祖)의 기병 직후에 휘하 군대를 끌고 귀의해서 당나라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지방 장관으로 실적도 좋았다.

 

황제의 결정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였다. 판결대로 처형하든지, 아니면 황제의 사면권을 발동하든지.

 

그런데 태종은 별난 반응을 보였다. 대리시의 상주문을 다섯 차례나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가져오라느니, 이제 밥 먹을 참이니까 그 뒤에 가져오라느니. 결국 받아보고는 이튿날 새벽 5품 이상 신하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법이란 하늘이 내려준 것인데 이제 내가 한 차례 이를 어기고자 한다. 당인홍의 죄가 커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데, 조정에 대한 그의 공로가 큰 것을 생각해서 파관(罷官)에 그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이에 나는 나 자신에게 벌을 내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고 사흘 동안 검소한 식사를 하루 한 차례씩 하며 근신하고자 한다.”

 

신하들이 꿇어 엎드려 황제가 그런 자책을 하지 말기 빌며, 그 뜻을 거두지 않으면 자기들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방현령(房玄齡)이 대표해서 아뢰었다. “자고로 인신의 생사는 어떤 사안을 막론하고 황제의 권한입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리면 그것이 곧 법률입니다. 황상께서 스스로에게 죄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새벽부터 엎드린 신하들이 오후까지 버티자 결국 태종이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자신의 세 가지 허물을 밝히는 조서를 발포했다. “첫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 둘째, 사사로운 정으로 법을 어지럽힌 것. 셋째, 상 주고 벌 주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이 세 가지 잘못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전력을 다할 것이니 그대들은 간쟁(諫諍)을 삼가지 말라.”

 

결국 살리고 싶은 사람 살렸으니 한 차례 쇼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쇼에도 정치적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한 번 살펴보자.

 

첫째, 공신 집단에 보낸 경고. 천하 평정이 끝난 지 십여 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특권층으로서 공신 집단이 잘 나가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사면권 자동발매기처럼 보였다가는 황제의 초법적 위상을 공신 집단이 공유하는 결과가 된다. 태종의 자책 쇼 앞에서 당인홍과 일체감을 가진 공신들은 깊은 고마움과 함께 두려움을 또한 느꼈을 것이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합쳐진 감정, 그것을 옛날 신하들은 ‘황송(惶悚)’이라고 표현했다.

 

둘째, 법치의 의지 확인. 당인홍 사건이 터진 것은 정관률(貞觀律)을 반포한 지 5년 되었을 때였다. 정관률에 앞서 수 문제(文帝)의 개황률(開皇律), 양제(煬帝)의 대업률(大業律), 그리고 당 고조(高祖)의 무덕률(武德律)이 있었다. 수-당 제국의 통일에서 영토 통합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보편적 질서의 확립이었고 그를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일이 법체계, 특히 형법체계의 정비였다. 당나라 제국 체제의 첫 번째 특징으로 율령(律令)제를 꼽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수 문제 이래 황제마다 법전을 반포했던 것인데, 태종의 정관률은 한 차례 법전의 완성으로 평가받는다. 고조의 무덕률까지는 기존 율령을 조금씩만 손보아 즉위 초에 서둘러 반포한 것이었는데 태종은 오래 갈 율령을 만들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즉위 후 10년을 들여 정관률을 만든 것이다. 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더 세밀한 법전을 편찬하게 하여 자기가 죽은 후 당률소의(唐律疏議)가 나오도록 했다. 당률(唐律)은 여기서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치(法治)’를 이야기할 때, 법이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될 때, 즉 “법으로 다스리는” 정치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정치가 진정한 법치라고 하는 논설을 종종 본다. 나는 이런 관점을 하나의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인데, 사람 밖의 제도에 매달려 정치의 완벽한 해결을 바라는 풍조를 나는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로 본다. 

 

현실 속에서 법은 황제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법을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황제는 그것을 전하는 역할이고 황제 자신도 그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자세를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도 용인되는 국가원수의 사면권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다룬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법치의 구현이었다.

Posted by 문천

6.

효문제는 499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발레리 한센은 <열린 제국(The Open Empire)> (2005)에서 그가 환갑까지 살았다면 남북조 통일이 그의 재위 중에 이뤄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그가 추진하던 과감한 개혁, 그리고 그의 사후 북위의 혼란을 생각하면 그럴싸하게 여겨지는 추측이다.


효문제를 이은 선무제(宣武帝, 재위 499-515)는 낙양 건설 등 중국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지만 풍 태후나 효문제와 같은 영도력은 사라졌다. 그나마 선무제가 33세 나이에 죽고 여섯 살 나이의 효명제(孝明帝, 재위 515-528)가 즉위하고는 새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층의 동요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풍 태후와 효문제가 추진한 변화는 혁명 수준의 체제 변혁이었다. 30여 년간 강력하게 추진된 이 변혁의 마무리 단계에서 북위 조정이 영도력을 잃은 것은 큰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회복 수단을 없앤 것과 같은 꼴이었다. 수술의 부작용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문제가 524년 6진(六鎭)의 난으로 드러났다. 비교적 안정된 통치체제를 오랑캐 왕조가 중국 땅에 세운 것을 흔히 ‘호-한(胡漢) 2중 체제’라 부른다. 부족사회 질서와 중국식 관료제를 병행하는 것이다. 바필드는 이 2중 체제를 동북방에서 모용부 왕조(전연, 후연 등)가 장기간에 걸쳐 개발한 것으로 본다. 동북방에는 유목 외에도 농경, 수렵, 채집 등 다양한 생산양식이 혼재했기 때문에 이 지역 왕조의 효과적 경영을 위해서는 여러 형태의 사회를 포용하는 다중 체제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북위의 탁발부는 같은 언어를 쓰는 선비족이기 때문에 모용부의 경험을 쉽게 수용했을 것으로 바필드는 본다. 4세기 말 북위가 일어날 때는 모용부 왕조가 혼란에 빠질 때였으므로 모용부의 고급 인력이 탁발부로 많이 넘어갔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북위는 410년까지 모용부 지역을 평정한 다음 근 20년이 지난 뒤에 서남방으로 확장을 시작해 몇 해 안에 북중국 통일에 이르는데, 이 20년이 모용부의 2중 체제를 배우고 익히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호-한 2중 체제에서 군사 방면은 ‘호’의 원리로, 행정 방면은 ‘한’의 원리로 운영된다. 군사와 행정의 분리에 따라 농민이 군대의 폭력에서 보호받고 조정의 조세 수입이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에게서 농민 괴롭히는 특권을 빼앗으면 무슨 재미가 남는가? 군대를 거느리는 오랑캐 귀족들은 행정을 맡은 한족 관료들에게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풍 태후와 효문제의 변혁은 2중 체제를 넘어 1원적 중국화를 향한 것이었으므로 군대와 군사귀족의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천하 통일이라는 그 변혁의 목표를 향해 대대적 남방 정벌에 나섰다면 군대의 역할이 생겨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효문제 사후 20여 년 동안 정치 혼란으로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늦어지면서 군대와 군사귀족의 불만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터져 나온 것이 6진의 난이었다.


6진의 난을 계기로 조정의 영도력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북위는 군벌의 각축장이 되었다. 528년 19세 나이의 효명제가 독살당한 뒤로는 권신들의 폭정이 이어지다가 결국 534년 서로 다른 황제를 내세우는 권신들에 의해 나라가 둘로 쪼개지기에 이르렀다. 낙양의 고환(高歡) 세력은 동위(東魏), 장안(長安)의 우문태(宇文泰) 세력은 서위(西魏)가 되었다. 동위는 550년, 서위는 556년까지 명목상의 황제를 받들고 있다가 고환과 우문태의 아들들에게 제위를 넘김으로써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왕조가 바뀌었다.


동위-북제는 효문제 이래의 중국화 노선을 지킨 반면 서위-북주에서는 선비족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분위기 속에 새로운 정치실험이 진행되었다. <주례(周禮)>의 고제(古制)를 부활한다는 명분 아래 새로운 형태의 군사국가를 만드는 방향으로, 가장 두드러진 성과가 부병제(府兵制)였다. 군사(호)-농사(한)를 분리하던 호-한 2중 체제의 원리 대신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조직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호-한 2중성을 병행시키던 종래의 2중 체제에서 양자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북주가 북제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그 중심세력이 수-당 지배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천하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 부병제가 큰 발판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위-북주에서는 선비족이 중국식 성을 취하게 했던 효문제의 정책을 뒤집어 선비족이 원래의 성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한족 관리와 장군들에게도 선비족 성을 하사하는 정책을 취했다. 몇 십 년 사이에 성이 이쪽으로 바뀌었다가 저쪽으로 바뀌는 일이 거듭되다 보니 서위-북주의 지배세력을 놓고는 성씨만 보고 한족 집안인지 선비족 집안인지 판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수나라 황실의 양(楊)씨와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가 과연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시비가 끝없이 이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500년경의 아시아 정치지도 

 

16국 시대 5호의 활동 방향 

 

16국 시대 한인(漢人)의 이주 방향 
부견의 소상과 왕맹의 초상. 유비와 제갈량의 재현을 떠올리며 두 사람을 추앙하는 이들이 많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