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서문 첫 줄에 “이 책은 저자가 40여 년간의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고 썼다. 한국통사 서술의 전통에 따른 저술이라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자기 전공영역 안에서만 발언하다가 일선 연구에서 물러날 무렵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한국사 전체를 개관하는 서술을 하는 것이 한국사학계의 전통이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30여 년 봉직하고 학술원 회원이며 현직 국사편찬위원장인 저자의 경력은 한국사학계의 원로로서 대단한 무게를 가진 것이다. ‘이태진의 한국통사’ 하나는 내놓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을 느낄 만한 경력이다.

 

학계 원로의 한국통사라 하면 가장 논란의 여지가 적은 통설을 엮어내는 것을 기대한다. 저자의 주관은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성과 서술의 방법을 통해 은은히 풍겨내야 한다. 어디서 어느 구석을 인용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새 의문보다는 기존의 질문들에 대한 최선의 대답을 연구 활동을 마무리하는 사람에게 기대한다.

 

<새 한국사>는 그런 기대를 벗어나는 책이다. 저자 약력을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70세 노인이 쓴 책이라고 상상 못할 것이다. 마흔도 안 된 소장학자가 쓴 책으로 생각할 것이다. 학술 활동을 마무리하는 책이 아니다. 이제부터 한 판 벌이겠다는 자세다.

 

소극적 통사보다 적극적 통사를 쓸 때가 되었다는 저자의 판단에 나는 동의한다. 한국사 연구의 축적이 아직 미흡할 때는 일반 독자를 위한 통사 서술에 의욕보다 조심성이 필요했다. 저자가 학술 활동을 시작할 무렵 나온 이기백의 <한국사신론>과 한우근의 <한국통사>가 이런 조심스러운 통사 서술의 최고봉으로 지금까지도 널리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축적된 많은 연구를 감안하면 이제는 통사도 의욕과 주관을 앞세우는 적극적 서술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만하다.

 

적극적 서술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넓혀주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데 여태까지 고려하지 않았던 새로운 측면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태진이 열어주는 측면은 고기후학(古氣候學, paleoclimatology)의 관점이다.

 

역사학의 탐구 대상인 옛사람의 생활은 인간관계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의 관계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역사학자가 다루는 자료의 압도적인 비중이 문헌기록에 있고 문헌기록의 내용은 인간관계에 치우쳐 있다. 탐구 대상과 방법 사이의 괴리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저자는 고기후학의 관점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향한 시각을 넓힘으로써 문헌자료의 한계의 보완 내지 극복을 꾀하는 것이다.

 

저자의 관심이 <조선왕조실록>의 재이(災異) 기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도 큰 뜻이 있다. 조선시대 관상감의 천문관측이 근대천문학의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긴 기간에 걸친 체계적 관측기록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큰 가치를 가진 것이다. 이 기록이 고기후학의 자료로서 기후 변화를 통해 인류사의 큰 굴곡을 설명하는 데 활용된다면 그 가치를 크게 발휘하는 쾌거가 될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통사 시도, 고기후학의 도입, 재이 기사의 활용, 모두 훌륭한 의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의도들이 이 책에서 거둔 성과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도에는 독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새로운 관점을 처음 도입할 때는 타당성이 쉽게 분명히 인정되는 사안만을 제시해야 한다. 타당성이 분명치 않은 사안까지 너무 많이 끌어들이려 하면 오히려 설득력이 줄어든다.

 

기원전 3,500-600년의 외계충격기가 문명 발달을 억제했다는 설명에 그런 문제가 있다. 기원전 600년 이후의 발달에 비하면 물론 늦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통상 문명 발달의 ‘가속’ 현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금속 사용 이전과 이후 문명 발달의 겉보기 속도는 원래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재이 기록을 근거로 680-880년의 외계충격기를 설정한 것도 언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신라의 통일 시점과 쇠망 시점에서 관측과 기록의 제도, 방법, 여건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관측 기록의 분량 변화를 바로 외계충격기의 존재로 해석할 근거가 충분치 않다.

 

고기후학의 도입 방법도 철저하지 못한 느낌을 준다. 고기후학이 활용해 온 가장 중요한 자료는 남극의 얼음이다. 형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얼음 층을 나무의 나이테처럼 분석해서(나이테도 고기후학의 중요한 자료다.) 당시의 기후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으로, 세계의 평균 기온 변화 같은 자료가 상당량 확보되어 있다. 이 자료를 대조에 활용해야 고기후학의 적용 기준이 분명해질 것이다.

 

저자와 40년 전 경북대에서 함께 지낼 때(그는 전임강사로, 나는 대학원생으로) 역사를 넓게 보려는 저자의 자세에 탄복하던 생각이 난다. 이 책을 보니 그 자세가 변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다만, 학계 주류에서 오랫동안 중임을 맡고 지내려니 이런 도전적 서술을 준비하기에 적합한 여건을 많이 누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이 방향으로 그 스스로 노력을 더할 여건을 지금부터라도 많이 누리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