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글은 마주치면 반갑게 읽는데, 찾아 읽은 일은 없다. 따라서 책으로 읽은 적이 없다. 지난 3월 개마고원에서 일하는 이민재 군을 만났을 때 갓 만든 책이라며 <말들의 풍경> 개정증보판을 선물하기에 모처럼 좋은 기회를 얻었다. 조금 읽은 뒤 강양구 기자에게 이 책 서평을 <프레시안>에 보낼 뜻을 알렸다.

 

마음먹은 서평을 몇 달씩 끌고 있는 일이 처음이다. 왜 그럴까, 생각날 때마다 스스로 이상했다.

 

쓰려고 앉으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꼬리를 문다. 전에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깊고 강한 공명(共鳴)을 느끼곤 했는데, 책으로 붙잡고 여러 꼭지 글을 이어서 읽으려니 공감의 범위가 너무 넓다. 삶의 의미, 공부의 의미,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바닥에 깔린 생각이 마치 거울 들여다보는 것 같이 느껴져 객체화가 잘 안 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그런 느낌이다.

 

강양구 기자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포기하고 말았을 거다. 그래도 어떻게든 쓰려고 궁리를 하다가 시각을 확 좁혀서 쓰기로 했다. 정치에 대한 관점만으로.

 

내가 역사 공부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처럼 고종석은 언어 공부를 통해 세상을 본다. 언어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담는 그릇이고 역사는 언어에 담겨진 인간현상이다. 그래서 언어와 역사가 세상을 바라보기에 적합한 매체인 것이다.

 

공부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 그 공부의 목적을 정치에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정치’란 그 말에서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정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찾는, 원론적 의미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 정치를 공부의 목적으로 명확히 인식한 것은 근년의 일이다. 사실 원론적 의미의 정치라면 설령 그것을 목적으로 삼더라도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는 하다. 숨 쉬는 것,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니까.

 

하지만 역사나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할 계기가 쉽게 주어진다.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발판이 역사와 언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역사나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적어도 민족주의에 관한 입장은 나름대로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장 분명히 드러낸 글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277-283쪽)다. 이오덕이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지만 한글학회 쪽 민족주의자와 달리 민중주의자이기도 하다고 그는 본다. ‘순수한 우리말’, ‘깨끗한 우리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자이지만, 지식인들이 그럴싸한 말을 책상머리에서 만들어내는 풍조를 배척하면서 민중이 실제로 쓰는 말을 아낀다는 점에서 민중주의자라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민중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의 성격에 달린 문제라고 나는 본다. 깨끗한 우리말을 만들어서라도 더 많이 쓰자는 국어운동가들의 민족주의는 당위의 민족주의요, 진보의 민족주의다. 민족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람직한 정체성을 설정해서 그리로 움직여가자는 민족주의다. 이것은 유럽에서 발원한 근대적 민족주의의 자세를 배운 것이며, 식민지시대의 민족개량주의와 맥이 닿는 것이다.

 

이 차이를 놓고 “그 점에서 이오덕은 국어운동가 대다수보다 한결 보수적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기본 인식은 나와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보수적”이란 말이 당위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국어운동가들과 다른 식의 민족주의를 상정하지 않고 이 차이를 ‘민중주의’로 설명한 것이다.

 

이오덕의 ‘민중주의’를 고종석은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경의를 표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한데, 두 가지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 같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보수성’에 대한 그의 자격지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오덕은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당위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지만, 글보다 말을 앞세우는 ‘언문일치’(고종석은 이것을 언어민중주의의 요체로 본다.)에 대해서는 집착이 강하다. 고종석은 이 집착에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서도 그 투철한 자세에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글 끝에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이오덕 선생이 살아 계셔 이 글을 읽으신다면 고치실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이 고치신 곳을 내 고집대로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

 

“외래어와의 성전 - 매혹적인 그러나 불길한 순혈주의”(49-54쪽)에도 주류 국어운동가들의 진보적 민족주의에 대한 고종석의 반감이 나타나 있다. 파시즘으로 이어진 유럽의 언어 순화운동을 널리 살펴본 데서 인위적 언어운동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도 고종석은 “불길한 순혈주의”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민중성에 매달린다.

 

언어순화 운동가들이 만든 신조어들은 상상 속 민족과는 관련이 있을지 모르나 현실 속 민중으로부터는 동떨어져 있다. 그것은 민중의 언어가 아니라 편협한 지식인의 언어다.

 

이것 역시 민중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언어세계를 바꿈으로써 현실세계를 바꾸는 길을 만들려는 진보적 당위성에 대한 운동가들의 강박에 있는 것이다. 이 강박은 유럽의 근대 민족주의에서 널리 나타난 것이다. 이 풍조가 식민지시대 조선에 전해져 민족개량주의로도 나타나고 국어 순화운동으로도 나타난 것이다.

 

많은 국어운동가들이 한자어를 최대의 공적(公敵)으로 삼았다. 한자어를 꼭 민중의 언어라고 할 수는 없다. 현실의 언어일 뿐이다. 한국어 어휘의 주체가 토박이말과 한자어로 이뤄진 것은 한국사 전개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런데 제1세대 국어운동가들은 우리말에서 한자의 흔적을 없앰으로써 우리 사회에 대한 중국의 봉건적 영향을 척결하고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인위적 언어운동의 문제는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인위적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환상에 있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백년 전, 오십년 전 우리 선배들은 암울하기만 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런 믿음에 매달리는 일이 많았다. 그들은 민중의 언어를 버리려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를 버리려 한 것이었다.

 

고종석 자신도 “한자 단상 - 그 유혹적인, 치명적인 매력과 마력”(120-125쪽)에서 한자를 우리 전통의 외부에 있는 객체가 아니라 내면에 있는 주체의 일부로 보는 시각을 밝힌다. 불길한 순혈주의로부터의 탈출구는 민중주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보수주의에 있는 것이다.

 

이 한자의 모험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중국인’이라 부르는 대륙 사람들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한 때의) 베트남 지식인들도 그 모험의 동반자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베트남어 표기에서는 가뭇없이 사라졌고 한국어 표기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한자는 동아시아 공통문자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니시가키 도루도 지적했듯, 한자란 무릇 중국어의 음성 표기라기보다 동아시아의 다양한 음성 언어를 연결하는 일종의 ‘번역’으로 기능해왔다.

 

2007년에 나온 이 책 초판은 2006-07년간 쓴 글을 담은 것인데, 이번 개정판에서 추가된 제3부 “말들의 모험”은 2009년에 쓴 글로 이뤄져 있다. 앞서의 글들에 비해 학술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고,(일간신문 연재용이므로 물론 일반 독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와 관련된 내 생각을 다듬는 데도 좋은 참고가 된 대목이 많았다. 2007년까지는 저자가 정치적 입장을 (특히 민족주의와 관련해) 직설적으로 밝히는 데 거리낌이 많지 않았나, 그 벽을 뚫기 위해 공부하고 생각한 내용이 “말들의 모험”에 많이 담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적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고종석이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날이 빨리 오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