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직후인 2008년 초에 낸 책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다음 대선, 즉 올해 대통령 선거에 관한 예측 한 가지를 했다. 경제성장 공약이 물러서리라는 것이었다.

 

새로 부각되는 국가의 역할은 절대주권을 표방하던 만국공법 체제의 국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 국가의 첫째 사명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이었으나 이제 협력이 더 중요하게 된다. 2007년 남한 대통령 선거에서 대부분 후보들이 외국과 경쟁하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아마 4년 후 선거에서는 극우파 후보만이 그런 공약을 들고 나올 것이다.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 것이 21세기 인류의 최대 과제다. 분단 극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민족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과제다. 분단 극복을 통해 한민족은 어떤 국가를 가지게 될 것인가. 가용자원이 줄어드는 저성장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저성장시대의 전통을 지금까지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325쪽)

 

사실 예측이라기보다 ‘희망사항’ 같은 것으로 나 자신 생각했다. 워낙 절실한 희망이라서 적은 것일 뿐이다. 4년 후에 벌어질 일이라고 시간까지 정해서 장담한 것을 그 후 생각날 때마다 지나친 만용이었다고 반성했다.

 

그런데 지난 가을부터 이 ‘희망사항’을 ‘예언’이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적중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듯했던 것이다. 모두 복지를 말하고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는 가운데 극우파 후보도 ‘7-4-7’ 같은 것 다시 들고 나올 성싶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며 자신감이 도로 줄어든다. 새누리당이 온갖 악조건 속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민심의 큰 줄기가 여전히 그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쪽이 어떤 쪽인가? 박정희 이래 경제성장을 앞세워 온 보수 정치세력의 전통을 박근혜가 대표하고 있는 쪽이다. 그렇다. 아직 우리 국민 다수가 경제성장의 꿈을 버릴 때가 안 됐다. 이명박의 ‘7-4-7’이 너무 황당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쪽으로 말문이 터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은 말문이 터지지 못하고 있지만, 언제라도 경제성장의 약속이 다시 나타나면 민심이 그리 끌릴 소지가 있다. ‘획기적’ 묘책을 찾아내 ‘기적적’ 경제성장을 재현하기만 하면 지금까지 심판의 대상이 된 온갖 문제들은 저절로 풀릴 것이라는 약속. ‘대권’을 바라는 자라면 민심의 이런 기대에 편승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11 총선의 야당 패인이 심판에 그치고 미래를 제시하지 못한 데 있다는 분석이 많다. 왜 제시하지 못했나? 무능하고 게을러서만이 아니다. 복지와 분배를 말하면서도 성장을 등질 수 없기 때문이다. “꿈 깨시라”는 직언을 국민에게 드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혁신 없는 통합”이란 말들을 한다. 통합의 동력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다. 야권이 비판을 제일 꾸준히 해왔으니 비판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야권을 많이 찍어줬다. 그래서 지난 국회보다 야권 의석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국민이 야권을 다수당까지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비판에 그쳤기 때문이고 새로운 얘기를 꺼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야권, 특히 통합민주당의 태도는 이명박 정권과 다른 목표를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목표를 자기네가 더 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과 같은 목표라면 새누리당과 무엇이 다른가?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권과 동행해 왔기 때문에 이제부터 잘하겠다고 해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의석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암묵적 목표,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해주겠다는 목표를 놓고는 야권보다 나은 실적이 있다. 그래서 공범의 죄상에 대한 심판이 무뎌진 것이다.

 

‘경제성장’은 박정희 정권 이래 한국 정치를 지배해 온 화두다. 공화당에서 새누리당까지 이어져 온 ‘보수정당’이 사실은 ‘경제성장당’이다. 경제성장을 늘 최대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그 점에서 국민의 많은 지지를 받아 왔다. 이 당이 어느 선거에서나 안고 들어가는 프리미엄이 경제성장을 중시한다는 이미지에 있다.

 

많은 국민이 지칠 줄 모르고 경제성장을 염원한다면 그 방향으로 일로매진하는 것이 민주국가다운 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큰 탈이 날 것이 훤히 내다보인다면 어떡하나. 경제성장을 원하는 국민의 마음이 아직 크기는 하지만, 20년 전, 10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뭔가 문제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또 한 가지 예측을 한 것이 있다. 이 예측은 책 나온 지 불과 반년 후에 미국 금융공황으로 맞아떨어져 나 스스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세계화의 기본 흐름은 산업화의 시대, 즉 팽창시대에 관성을 얻은 경제통합의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입장에서는 인위적 질서를 배격하고 시장 경쟁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제창해 왔다.

 

새로운 흐름이 그 위에 겹쳐지고 있다. 시장 만능의 경제통합이 대다수 인류에게 바람직한 상황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한 의심에서 나온 것이다. 정치적 취향에 따라 판단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문제지만, 21세기 세계에서 가용자원이 줄어들 전망에는 폭넓은 동의가 모이고 있다. 엄혹한 자연조건 앞에서 경쟁보다 협력을 내세우지 않고는 구조 전체를 위협할 참혹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24-325쪽)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 체제는 19세기 말 이래 기술-자원-환경의 구조적 한계에 부딪쳐 있었고, 이에 대한 대응 노력이 20세기 역사의 주축이라고 나는 본다. 기술만능주의에 입각한 반동적 대응인 패권주의가 20세기 전반의 경제공황과 세계대전을 몰고 왔고, 후반에 들어서서는 보다 온건한 대응책이 시도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 엄혹한 한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자 반동적 패권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자유주의다. 경쟁체제의 모순을 깔아뭉개고 당장은 체제가 신나게 돌아가게 할 수 있지만 모순은 더 급속히 격화되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을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되풀이로 보며 그 파국을 예측한 것이다.

 

‘저성장시대’에 대비하는 것은 한국 사회만의 과제가 아니다. 전 인류의 과제다. 산업혁명 이래의 고성장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이 외면하고 계속 경제성장에 집착한다면 약간의 성과는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처럼 ‘만병통치약’의 효능을 가진 성과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반동적 정책노선은 전 세계적 상황을 악화시키는 역할에 한국을 몰아넣어 국제사회에서 불리한 입장에 빠질 것이다. 20세기의 ‘이코노믹 애니멀’이 경멸의 대상이었다면 21세기에는 증오의 표적이 된다.

 

경제의 고성장은 많은 문제를 감춰준다. 약자에게도 ‘스며 내려가기(trickle-down)’ 같은 말이 통할 수 있다. 당장 내 몫이 적어도 생존에 위협은 없고, 경제에 이렇게 활기가 있으면 언젠가는 나도, 하다못해 내 자손이라도 더 나은 입장에 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저성장시대에는 약자에게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게이츠나 버핏 같은 배려 정도로 안 된다. 강자들 모두가 생활양식을 바꾸는 구체적 희생을 치러야 한다. 자유와 인권의 관념에서도 거품을 빼야 한다. 요컨대, 근대인이 경멸해 마지않던 ‘봉건적’ 중세인이 살아가던 방법에서 배워야 한다. 저성장시대가 요구하는 ‘긴축’은 우리 생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는 지금까지 길들어 있던 낭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해 있다. 냉난방을 갖춘 널찍한 주거와 자가용 승용차 등 선진국 중산층의 생활양식이 세계 인구 대다수에게 확산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확산의 추세가 관성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제동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파국의 충격이 클 것이다.

 

남한 중산층이 이런 생활양식에 접근해온 것은 최근 30년간의 일이다. 그보다 몇 배 긴 기간 동안 누려온 선진국 사람들도 있고, 이제 겨우 접근하기 시작하는 나라들도 있다. 오래 누려온 사람들은 바꾸기가 힘들고, 이제부터 누리려던 사람들은 억울하다.

 

긴축에 따르는 고통과 불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세계화에 경제통합만이 아니라 정치통합의 측면이 필요한 것이 이 때문이다. 자유방임은 강자의 기회를 극대화시켜주는 정책이며, 비용이 많이 드는 정책이다. 팽창의 시대에는 상당한 범위에서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긴축의 시대에는 호용되는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의 ‘세계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330-331쪽)

 

남한 사람들은 60여 년 동안 미국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봐 왔다. 미국이 변화를 주도하던 시대에는 유효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성장시대에의 적응을 제일 힘들어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주도해 온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활양식 바꾸기가 제일 힘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버려야 할 때다.

 

긴축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긴축정책의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전기료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 상승이다. 10년 후의 파국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일 뿐 아니라 ‘1%의 특권’을 당장 해소하는 데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축의 불가피성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과연 “전기료 3배 인상”을 공약으로 내놓을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한국에 있을까?

 

작금 일본의 경험에서 약간의 희망을 얻는다. 전력공급의 30%를 맡고 있다던 50여 기의 원전이 거의 다 가동을 멈춘 상태에서 일본은 돌아가고 있다. 이미 한국보다 3배나 비싼 전기료를 더 올리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원전을 갑자기 다 끄고도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생산이 유지된다면 긴축의 길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미약한 어조로나마 또 한 가지 예측을 한 것이 있다. 앞으로 남북관계의 전개에서 북한의 역할이 크리라는 것이다.

 

바닥을 친 북한 경제의 건드려지지 않은 잠재력이 21세기 초반에 어떤 모습으로 터져 나올지, 한반도가 이제부터 겪어나갈 변화에서 중추적 작용을 할 것이 기대된다. (305쪽)

 

물리학에 ‘운동량(momentum)’이란 개념이 있다. 질량과 속도를 곱한 것으로,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운동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운동량 보존의 법칙’이다. 북한이 장차 변화하기 시작하면 그 속도가 당분간은 대단히 빠를 것이다. 그 단계에서는 남한이 덩치(질량)가 크더라도 운동량은 북한 쪽이 더 클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의 우선적 기준을 북한 쪽에 두는 편이 변화를 순조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도 일종의 ‘종북주의’일까? 3대 세습 논란 때 그것을 ‘절대악’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글을 썼다가 나도 종북주의자로 몰린 일이 있는데, 사실 나는 앞으로의 남북관계 전개에서 현실적으로 종북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3대 세습이건 뭐건, 우리 잣대로 재단하려 들기보다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게다가 앞으로 우리도 저성장시대에 대비하려면 풍요의 꿈에 젖어 있던 지금까지의 우리 가치기준도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 조정을 위해서는 긴축경제에 이골이 난 북한 주민들로부터 배울 것도 많지 않을까?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인이 만족과 위안을 얻는 대상이 인간관계에서 물질로 많이 옮겨져 왔다. 그런 가운데 인간관계에서 협력보다 경쟁의 측면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저성장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여러 가지겠지만, 인간관계의 협력 측면을 회복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 같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도, 남과 북 사이에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