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믿은 진드기, 다윈을 만나서 좌충우돌!

이명현 천문학자
 
과학 소설(SF) 작가들과 만날 때마다 관성처럼 서로 토닥거리는 것이 있다.

과학자로 훈련받은 나는 작가들이 현장으로 들어와서 과학 공부를 더 깊이하면서 그 경험과 지식을 작품 속에 녹여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래야 진짜 SF 작품이 태동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작가들은 특히 하드코어 SF 같은 분야에서는 과학자들이 직접 글을 써야한다고 받아친다. 이런 공방을 버릇처럼 재미있게 한차례 치른 후에야 우리들은 진짜 이야기로 넘어가곤 한다.

아마도 작가의 글은 작가의 글대로 과학자의 글은 과학자의 글대로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늘 이런 공방을 벌이곤 하는 것일 것이다. 대체로 과학자들은 (물론 SF 작가에게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는 과학자들) 작가들이 너무나 빨리 변해가고 상상을 넘어서는 발견이 마구 쏟아지는 현대 과학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들이 과학의 자기장 속으로 들어와서 직접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현대 과학의 구석구석이 작품 속에 반영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당연히 작가로 훈련받아 왔다. 과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더 중요할 것이고 SF의 본질인 '경이로움'에 대해서도 과학자들보다 더 고민하고 더 넓고 깊은 담론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좁은 식견으로 이야기하는 SF는 주로 하드코어 SF일 터인데 작가들이 보기에는 그쪽 분야 정도는 과학자들이 직접 써도 좋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글을 쓸 줄 아는 과학자를 먼저 찾아야할 것이지만.

과학자로서 자신의 연구 분야 또는 다른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글로 써내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물론 충분한 이해가 전제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행위를 시작하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화두가 전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꼭 SF 작품이 아니더라도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과학자의 첫 번째 덕목은 (해당 분야의 지식은 전제 조건이니 빼고) 과학자가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글을 쓸 줄 하는 능력일 것이다. 만화를 그린다면 물론 그림을 (과학자가 아닌 것처럼) 잘 그리는 것도 추가되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학자를 찾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언뜻 떠올리려고 하니 정말 손가락으로 가늠할 정도로 몇몇의 이름만이 떠오른다. 물론 과학 이야기를 잘 하는 과학자들은 많다. 과학 만화를 잘 그리는 과학자도 주변에 두어 명은 바로 떠오른다. 그런데 과학자가 쓴 글이나 그린 만화를 보면 늘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우선 대체로 재미가 없다. 그리고 종종 선생님이 가르치는 교실에 와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아마 과학자로서 알고 있는 많은 과학 이야기를 짧은 지면에 모두 담으려는 욕심이 넘쳐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념 없이 사실을 꾸역꾸역 나열하는 강의 같은 글이 되어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교훈까지 담으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경우가 최악이다. 과학 이야기의 깊이 있는 설명에 신이 나서 그 깊이가 끝도 없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독자들은 책을 덮는다. 그러다보면 재미는 기대할 수도 없게 된다. 과학자라는 속성 때문에 대중을 위한 글을 쓰거나 만화를 그릴 때 어쩔 수없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 <꿀벌 가문 족보 제작 프로젝트>(제이 호슬러 지음, 김기협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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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면서 작가면서 만화가인 제이 호슬러가 쓰고 그린 만화책 <논썹진드기 우상 탈출 프로젝트>(김기협 옮김, 서해문집 펴냄)와 <꿀벌 가문 족보 제작 프로젝트>(김기협 옮김, 서해문집 펴냄)는 과학자가 그린 것 같지 않은 멋진 과학 만화책이다. 두 책 모두 과학이 넘치지 않고 이야기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속에 녹아있던 '과학'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쉽지 않은 내용을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가고 있다.

그 저력에는 이야기를 구사하는 작가의 서사의 힘도 있겠지만 과학자로서의 장점을 한껏 활용한 내용의 디테일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과학자가 쓰고 그린, 과학자가 쓰고 그리지 않은 것 같은, 그러면서도 과학자가 책 속에 녹여 넣을 수 있는 요소를 잘 첨가한 미덕을 갖춘 책을 만났다. 이들 책 속에서는 이야기의 서사와 과학적 디테일이 서로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그 끈의 팽팽함이 내내 튀어 올랐다. 재미있게 봤다.

1일째 : 아무래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 같군. 이건 아무것도 아냐!
2일째 : 아이쿠.
3일째 : 야, 잘됐다. 마침 다리가 아쉽던 참인데.
5일째 : 제대로 돼가는 것 같구먼.
7일째 : 에구, 목이 없어! 목이 있어야할 텐데.
8일째 : 휴우~ 좀 낫다. 히히… 날개가 생기려니까 간지럽네.
12일째 : 다 돼 간다.
13일째 : 견딜 만하구먼. 이제… 어쩌지?
탈바꿈 13일째(니유키가 알에서 나온 지 21일째) : 각죽! 각죽! 각죽! / 각죽! 삐걱! 끼익! / 야! / 각죽! 삐걱! 각죽! / 짜잔!


<꿀벌 가문 족보 제작 프로젝트>의 한 장면이다. 두 쪽에 걸친 그림은 여기에 못 옮기고 글만 따왔다. 어떤 장면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호슬러의 과학적 디테일과 그의 만화 그림의 단순함이 균형을 이루면서 내게 묘한 감동을 주었던 장면이다. 이렇게 서사와 디테일의 긴장감은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분봉 장면이 제일 멋있었다. 그림은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야, 여왕님 어디 계셔?
저기 계시는구나.
여왕님을 붙잡아!
어이쿠!
떠날 때가 됐습니다. 폐하.
알았어. 알았어. 떠밀지 좀 말아.
히야~ 우리 분봉 간다!
준비 완료!
됐어. 다들 하나, 둘, 셋에 떠난다….
1
2
3
분봉!
야호~
으악!
가세, 가세!
떠밀지 좀 맙시다.
히야~
하하하!
조심!


▲ <눈썹진드기 우상 탈출 프로젝트>(제이 호슬러 지음, 김기협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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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가문 족보 제작 프로젝트>가 서사와 디테일의 균형 속에 줄타기를 하는 만화라면 <논썹진드기 우상 탈출 프로젝트>는 다윈의 수염 속에 사는 눈썹진드기와 다윈의 대화를 통해서 다윈의 생애와 진화론 이야기를 해나가는 정이 넘치는 작품이다. 그 정겨움 속에 '신'이라는 우상을 탈출해 나가는 눈썹진드기의 잔잔한 탐험기가 들어있기도 하다. 책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진화론 강의 같은 노트북은 정겨움으로 다소 처질 수 있는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긴장감을 올리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좋은 도구인 것 같다.

님? 우리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우리 날개 진화시킬 일이 급해요!
안돼. 안돼. 그렇게는 안돼.
개체는 진화하지 않는 거야, 마라.
자연 선택이 생존을 위해 짚어내는 대상은 개체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진화를 일으키는 것은 집단이야.

작가는 이 장면에 대해서 '변이의 노트북' 코너에서 "진화론에서 흔히 잘못 이해되는 문제 하나를 꺼냈다. 개체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포켓몬 세대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이 걱정된다. 잘못 배웠던 것을 바로잡을 것이 너무나 많다"라고 적고 있다. 이번 기회에 이것 하나만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새기고 넘어가자.

오랜만에 과학자가 만든 것 같지 않은, 과학자가 쓰고 그린 만화책 덕분에 내 눈이 호강을 했다. 재미있었고 부러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