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쓴 편지는 ‘비례 12번’의 복안을 모르는 채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프레시안>에 올리고 나서 그 얘기를 들은 후 떠오른 생각을 다시 적어 보내고 싶군요. 공개편지로 세 번째지만 두 번째 편지를 보완하는 것이라서 2.1번째로 표시합니다.


사과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뼈를 묻는다.”는 표현이 하도 잘 쓰이기에 유 선생도 역시 그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착각했습니다. 4년 전 출마 분위기가 너무 비장한 것이어서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이라고 이해해 주세요.


둘째, 유 선생이 대구로 오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한 과격한 표현. 누구에게든 좁은 길을 요구하는 것은 내가 극력 피하는 일인데, 대화 중 얼핏 나온 말을 편지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잘못됐습니다. 말의 실수와 달리 글의 실수는 나 스스로 용서하기 힘든 일인데, 크게 잘못했습니다.


막상 ‘비례 12번’ 얘기를 듣고 보니 그것도 당선에 집착하지 않고 희생과 봉사의 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격과 정체성의 손상을 걱정할 필요 없는 길입니다. 어느 쪽이나 봉사의 대상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겠지만 경로에 차이가 있죠. 그 차이에 대한 생각을 유 선생도 깊이 해 왔을 텐데, 나 나름대로 해본 생각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역의 변화, 아직도 중요합니다.


대구 재출마는 지역의 변화를 바라보는 길이고 비례 12번은 정당의 변화를 바라보는 길이죠. 둘 다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도 비례 12번 얘기를 듣고 저는 우선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지역주의 타파가 아직도 더 큰 과제라고 내게는 생각됩니다. 노 대통령께서 달걀로 바위 치던 시절에 비하면 이미 많이 완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지역주의 문제에 노력을 집중할 필요가 아직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금년 말 대선의 ‘확연한 승리’를 위해서입니다. 대통령 권력집중이 심한 이 나라에서 민주-진보-양심-평화 진영의 대선 승리는 정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51 대 49의 짜릿한 승리가 아니라 특권과 부패에 매달리는 엉터리 정치가 한국 사회에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확연한 승리가 필요합니다.


정치 쇄신을 이야기할 때 ‘물갈이’를 말하고, 더 큰 쇄신을 ‘판갈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죠. 이번에 우리는 ‘틀갈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권층의 물리적 ‘힘’이 한국 정치를 더 이상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국민의 ‘뜻’을 보여주는 확연한 승리를 통해 한국 정치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 뒤에 진보든 보수든 건전한 정책 경쟁으로 정치다운 정치를 펼칠 수 있을 겁니다.


이 확연한 승리를 위한 가장 큰 열쇠가 대구-경북의 변화에 있다고 나는 봅니다. 약간의 변화가 많은 표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그곳에서의 지역주의 종료 선언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여는 뚜렷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점은 ‘균형 발전’입니다. 국토의 균형 발전만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형 발전’도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중요한 것입니다. 전라도가 오랫동안 겪어온 ‘소외’ 현상이 대구-경북에서 재연되지 않기를 저는 바랍니다. 소외 현상의 피해가 소외 대상자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해 왔죠.


정당의 변화, 역시 중요하죠.


‘비례 12번’ 얘기를 듣고 정당의 변화를 생각해봅니다. 정당 활동을 해본 일이 없는 탓으로 생각이 얼른 미치지 못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역시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특히 유 선생에게는 정치 입문 때부터 절실한 과제였죠.


한국의 정당정치가 참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저항이 가장 큰 한나라당조차 민정당 이래 가장 큰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주통합당에서(정당으로서 그 역사를 민주당의 역사로 볼 때) 진행 중인 변화는 1945년 한민당 창당 이래 최대의 변화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 역시 “진보정당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니!” 눈 비비고 다시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 당명에 함께 들어 있는 ‘통합’이란 말이 내게는 심상치 않게 들립니다. 근년 민족의 ‘통일’과 ‘통합’ 문제를 생각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문제로 ‘분단(division)’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분산(diaspora)’이란 생각을 합니다. ("漢族이 되려는 조선족…배신자라 욕할 텐가?" 2009-8-27) 분산 극복을 위해서는 ‘통일’보다 ‘통합’이 더 적절한 과제겠죠.


남북 분단이 처음에는 분단일 뿐이었지만, 수십 년 세월을 통해 그 위에 분산의 의미가 겹쳐졌습니다. 그렇다면 분산의 극복에 의식적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민족문제의 평화로운 해결방법이겠습니다. ‘통합’을 진인사(盡人事)로, ‘통일’을 대천명(待天命)으로 보는 자세죠.


통합은 여럿이 모여 함께 움직이는 겁니다. 통합 주체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원리에 따라 움직이되 통합 상대방들과 조화롭게 움직이는 길을 찾는 거죠. 통합의 조화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결국 통일이 될 수도 있지만, 각 주체가 자기 주체성을 발휘하는 가운데 기계론적 과정이 아닌 유기론적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야권 대선 후보 경쟁이 좋은 분위기 속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씨, 안철수 씨 등 거론되는 인물들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 없이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고 키우면서 서로 어울리는 통합의 정신입니다.


정당의 합당은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이번에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통합은 국민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당내 역학관계에만 매달리던 종래의 합당과 달리 정치계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자세를 보였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표현방법도 발전했습니다.


두 당의 통합이 지금까지 바람직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데는 서로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선의의 생산적 경쟁이죠. 앞으로도 이 경쟁이 잘 계속되기 바랍니다. 두 당만이 아니라 건전한 정치를 바라는 다른 정치세력도 이 경쟁의 틀에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유 선생의 ‘좋은 정당’ 만들기 노력이 10년 만에 풍성한 결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비례 12번’은 그 결실을 다지는 마무리 노력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당의 결정에 맡기면 되겠습니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다 하고 보니 줏대 없는 본색을 드러낸 것 같군요. 좋은 길이 이 쪽 저 쪽으로 이렇게 열려 있는 상황이 참 다행스럽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써 온 분들이 무척 고맙습니다.


굳이 두 길을 비교할 경우, 양적 효과는 아무래도 지역의 변화 쪽이 더 클 것 같습니다. 대구-경북 분위기를 보니 금년 투표율이 매우 낮을 것 같아요. 적절한 자극이 있을 경우 반응이 아주 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극을 가하기에 유 선생이 누구보다 좋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야권의 득표율 제고에는 비례 12번보다 대구행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질적 효과에는 정당의 변화 쪽이 나은 점이 있겠죠. 민주통합당의 변화를 비롯한 야권의 분위기 향상에는 진보통합당의 존재가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진보통합당이 자세를 잘 지켜주지 않으면 민주통합당이 오만에 빠져 시대의 요구를 소홀히 할 위험이 언제나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정당 역할을 잘하는 것은 금년의 선거 승리에 그치지 않고 이후 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차이는 공헌의 직접성과 간접성 사이에 있죠. 대구 재출마는 유 선생 개인이 야권의 승리에 직접 공헌하는 길이고 비례 12번은 통합진보당의 공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헌하는 길입니다. 통합진보당에 몸담은 유 선생 입장에서 개인의 직접 공헌보다 당을 통한 간접 공헌을 택하는 것이 동지들에 대한 도리이기도 하겠지요.


이 일 갖고 유 선생께 더 이상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속한 당에서 당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결정을 해주겠지요.


내 의견이 대구행 쪽으로 치우칠 만한 요인이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나 자신 절반가량 대구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내가 정당에 관해 아는 것이 적다는 점. 감안하세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