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준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는데, 그 이유가 지난 6월 청문회에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임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대답을 한 데 있다고 알려졌다. 그 사실을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확신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앞서 조 후보자는 "정부에서 그렇게 발표를 했고, 저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추측 차원에서는 북한 소행으로 생각하고, 그 근거는 정부 발표지만, 확신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앎’과 ‘믿음’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믿음은 하나의 주관적 정신현상으로서,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성립할 수 있다. 물론 근거도 필요 없다. 믿음 중에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사실과 부합하는 것만이 앎이다. 따라서 믿음이 보여주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믿는 자의 의도와 심리상태다.


북한 소행설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미 이야기한 사람에게 그것을 ‘확신’하느냐고 따져 묻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내 의도와 내 심리상태를 당신도 공유하느냐고 확인하는 것이다. 어떤 의도이고 어떤 심리상태인가?


<Wikipedia>의 “Belief” 조를 보면 믿음을 형성하는 데 네 가지 경로가 있다고 한다.


(1)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 주변사람들의 믿음을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다. “상식이란 열여덟 살 이전에 획득한 편견의 집합”이란 아인슈타인의 말이 흔히 인용된다.


(2)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의 믿음을 종래의 자기 믿음에 배치되는 것임에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고, 그 결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3) 광고산업의 주된 원리는 반복을 통해 믿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4) 신체적 충격, 특히 머리에 충격을 받음으로써 믿음의 극단적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백여 명의 우리 국회의원이 천안함 북한 소행설에 믿음을 가지게 된 경로는 어떤 것일까. (1)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천안함 침몰 때 열여덟 살 안 된 사람이 없으니까. (4)에 해당되는 사람은 있더라도 몇 안 될 것이다. 그리고 (3)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 중에 반복만으로 엉뚱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면 이 나라가 너무 비참하다.


남는 것이 (2)뿐인데, 이것도 석연치 않다. 기존의 믿음에 배치되는 믿음을 심어줄 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었나? 이명박? 카리스마는커녕 그 사람이 콩으로 메주 쑨다 해도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도둑적으로 완벽” 소리 하는 것 보면서.


그래서 나는 천안함 북한 소행설에 대한 믿음 중에 가짜 믿음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그 신하들의 믿음. 동조하지 않으면 손해볼까봐 믿는 척하는 믿음. 국정에 책임을 가진 자들이 근거가 충분치 않은 믿음에 저토록 집착하고, 나아가 헌법재판관 후보자에게까지 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진짜 순수한 믿음이라고는 정말 믿고 싶지 않다.


천안함 침몰 얼마 후 원희룡 의원 블로그에서 북한 소행설을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종합하여 얻어진 신뢰할 만한 결과”라며 “국가안보의 큰 틀에서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고 그를 보수당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일이 있다. 바람직한 보수주의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희룡, 당신을 보수당에서 제명한다.” 2010-6-25)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머리 좋다고 소문난 그가 북한 소행설을 진심으로 믿을 리가 없다고 본 것이고, 둘째는 설령 개인적으로 그렇게 믿는다 하더라도 국론을 모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사상의 자유를 경시하는 자세를 본 것이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천안함 침몰 이유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는 완벽히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국가를 비롯한 사회체제는 공적 절차와 기준에 따라 ‘충분한’ 증명을 따지고, 인정된 생각과 믿음에는 그에 따른 행위를 허용한다. 충분한 증명이 인정되지 못한 생각은 그에 따른 행위를 금지할 수 있지만, ‘충분한 증명’이 ‘완벽한 증명’이 아닌 만큼 다른 생각 자체를 막는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에는 표현의 자유가 꼭 따른다. 표현은 사상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에는 또한 행위의 의미도 있으므로 표현방법의 일부에는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주어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재를 가할 수 없는 표현방법이다.


한나라당의 정치수준을 시원찮게 봐온 내게도 이번 인준안 부결은 정말 충격이다. (“새누리당”으로 불러달라고 언론에 부탁했다는데, 나는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 보여주기 전에 그 이름 써줄 생각 없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것은 그저 “한나라당”일 뿐이다.) 야당 몫의 헌법재판관 자리를 채우는 데까지 사상 검열을 하겠다고 쪽수만 믿고 달려들다니, 이유도 안 되는 탄핵에 나섰다가 역풍 맞은 일 벌써 잊어버렸나.


역풍 생각을 하니 한나라당 꼴을 형편없이 만들려는 야당 의원들의 ‘자해 투표’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반대표를 던진 야당 의원도 있어서 한나라당 쪽에서 책임을 혼자 못 지겠다는 주장도 나온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한나라당 책임이 어디 가지 않는다. 청문회 때부터 후보자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아 온 게 저희들 아닌가.


나는 한나라당을 이명박 정권과 구분해서 평가하려고 애써 왔다. 이명박과 개인적으로 연계된 사람들은 두 말 필요 없는 ‘범죄 집단’으로 보지만, 한나라당은 상당수 우리 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 일부 국민조차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짓이다. 누구를 대변하느냐에 관계없이 지켜야 할 기본규칙이 있지 않은가. 어차피 질 선거라고 그렇게 막 가면 안 된다. 그냥 ‘반대’하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해서 득표율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행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의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이너리티로서의 존중이라도 제대로 받을 생각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한나라당이 어떻게든 최소한의 정당 노릇 제대로 하기 바라던 기대를 접는다. 게다가 새 당명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처지에 저런 한심한 행태를 보이다니. 행실을 안 바꾸면서 이름만 바꾸겠다는 꼴이 꼭 위험을 피하겠다고 머리를 모래에 틀어박는 타조 같다. 새, 누, 리, 애꿎은 글자들이 그 통에 욕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