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년에 걸친 <해방일기> 작업의 2년차로 접어들고 있다. 평생 가장 집중해서 작업한 것이 박사학위논문이었는데, 지난 1년간의 작업량이 그때의 작업량과 비슷한 크기였던 것 같다. 1년 동안 집 아닌 곳에 가서 묵은 날이 열흘도 안 된다. <해방일기> 작업은 내게 군대생활 한 번 더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답답하고 힘든 일거리에 매달리게 되었는지부터 설명이 필요하겠다.


한 마디로, 수십 년 동안 너무 게으르게 살아온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커서, 남들 못하는 일 하겠다는 욕심을 앞세우며 남들 다 하는 일을 외면해 왔다. 공부를 넓게 하는 쪽으로만 매진해 왔다. 좁게 하는 것보다 재미있으니까.


몇 해 전부터 체력이 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공부를 무작정 넓히기만 하고 있다가 매듭 하나 못 지어놓고 세상 뜨게 될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사, 동양사, 세계사에 대한 내 생각을 책 한 권(이나 두 권)씩으로 정리할 계획을 세우고 첫 번째로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낸 것이 2008년 3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밖에서...>를 낸 후 그 여파 속에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마주치게 되었다. 직접적 계기는 ‘뉴라이트’와의 충돌이었다. 나는 <밖에서...>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구조조정을 제창했는데, 그 무렵 민족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던 ‘뉴라이트’와의 차이를 해명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08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게 되었다.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역사학의 역할이 빈약하다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 정치가 천박한 수준에 묶여 있는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 봄까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작업을, 그리고 뒤이어 <해방일기> 작업을 하게 되었다.


한국사 관련 작업을 <망국의 역사...>로 마무리 지을 작정이었다. 1910년의 망국이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시각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 정치의 문제점들에 대한 조명을 더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경술국치 백주년에 맞춰 작업을 끝내고 보니 미진했다. 할 말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바로 <해방일기> 작업에 착수했다.


<해방일기>에서 다루는 1945-1948년의 3년간, 소위 ‘해방공간’은 한국현대사의 갈림길이었다.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에 각각 한국인의 활동을 얽맨 ‘식민통치’와 ‘냉전체제’가 엇갈린 이 전환기가 장래에 대한 가장 넓은 폭의 가능성을 한국인에게 보여준 시기였다. 그 당시에도 물론 이런저런 제약이 있었지만, 20세기의 다른 시기에 비하면 제약의 힘이 약했고 제약의 방향에도 상당한 가변성이 있던 시기다.


그래서 이 3년의 기간을 3년간에 걸쳐 세밀히 복기(復碁)할 생각을 했다. 어떤 일이 한국인에게 닥치고 그에 대해 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비슷한 보조로 걸어가면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분단건국과 전쟁을 향한 비극의 길이 어떤 수순으로 한국인에게 주어졌는지, 그리고 한국인들은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갔는지 면밀히 살펴보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가 주어지는 길보다 더 좋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능력을 점검해 보려는 것이다.


2.


<해방일기>는 <프레시안> 연재 독자를 상대로 쓰기 시작한 것인데, 몇 달 진행된 후 책으로 출판할 방침도 세워졌다. 원고 분량이 워낙 많아서 책으로 내기 어려운 물건인데, 너머북스 출판사의 용기와 정성에 감사드린다. 덕분에 1945년 11월에서 1946년 1월까지 담은 제2권이 이제 나왔다.


몇 달 전 나온 제1권의 부제가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였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마주친 문제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기쁜 소식이 불쑥 주어져 온 백성을 감격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것으로 그 날은 기억되어 왔다.


그런데 그 무렵의 사태 진행을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본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인 8월 10일에 포츠담선언 수용 의사, 즉 항복 의사를 연합국에 전했다. 그 사실을 조선총독부에서는 단파방송으로 알았다고 하는데, 책임 회피를 위해 둘러댄 것이 분명하다. 항복을 전후한 설거지 작업을 위해 조선총독부 같은 중요 기관에 서둘러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무튼 총독부 책임자들은 늦어도 8월 11일에는 항복 예정을 알고 있었다.


항복에 대응한 총독부의 조치 중 하나가 엄청난 분량의 지폐를 찍은 것이었다. 1944년 말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50억 원 이하였는데, 이것이 1945년 9월 초 미군 진주 때까지 85억 원을 넘겼다. 8월 중순에서 9월 초까지 30억 원 이상 통화량이 늘어났다.


늘어난 돈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는 일부밖에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친일파 조선인들 손에 들어간 사례가 더러 드러난 것이 있다. 예컨대 군수회사인 조선비행기회사에 투자했던 화신 사장 박흥식은 투자에 대한 보상으로 2천만 원을 받았고, 광산업자 김계조는 댄스홀 만들 자금으로 1천만 원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이 총독부에서 거금을 받은 사실은 다른 비리 사건 때문에 밝혀진 것인데, 그들 외에도 마지막 한 달 동안 총독부의 새 돈을 받은 사람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가? 해방 후 일반 민중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는데, 한쪽에서는 요정에서 흥청망청 돈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그리고 이북에서 이남으로 넘어온 수백만 인구가 유민 상태에 처해 있는데, 이들에게 일당을 주며 테러에 동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돈이 주먹보다도 강한 폭력성을 가지는 상황이었다.


해방의 의외성으로 돌아가서, 8월 10일 이전에는 일본의 항복이 예견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어느 시인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에 대해 “일본이 질 줄 몰라서”였다고 변명했다. 순사 옷자락만 봐도 움츠러들던 시골구석 농사꾼이라면 몰라도, 교육 받을 만큼 받고 도시에서 활동하던 사람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변명이다. 1943년 후반이면 웬만한 사람들이 일본의 패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고, 1945년에 들어서서는 시간문제가 되어 있었다.


밤에 자리에 든 뒤에 아버지께서 전쟁 중에 내가 한 말이 그때는 기연미연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옳았다는 것을 말씀하시었다. 첫째 일본이 금명년 중으로 전쟁에 질 것이며 지면 조선은 독립한다는 것이며, 둘째 전쟁으로 한창 들볶이고 여러 가지로 인심을 동요시키는 유언(流言)이 있어서 도저히 고향을 지키고 살 수 없으니 충청도로라도 이사해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그 불가함을 역설하고 고향에 있어야 종전 전후의 어려운 시기를 지낼 수 있다고 한 것이 작금의 식량사정 기타로 보아서 옳다는 것이며, 셋째는 빚을 걱정하시는 것을 내가 인플레의 필지(必至)를 말씀드리고 정리의 중지를 간망한 것 등이며... (김성칠, <역사 앞에서> 1946년 2월 2일)


1938년 10월 18일 밤 서울 서대문형무소 독거방에는, 구내의 라디오로 중국의 무한3진이 그날로써 일본군에게 완전 점령되었다고 선포되고 (...) 독담 너머로는 전승 축하 시위행렬의 왁자지껄하는 군중의 소리가 “반사이”의 아우성과 함께 들려오는 것이었다. 옆방에 있는 좌익청년 모군은 벽을 두들기면서 비명을 한다. “이것, 일본이 만일 지나 4백여 주를 완전 장악하게 되면, 조선은 금후 백년 동안은 일제의 철쇄에서 못 벗어날 것이 아닌가요.” 하면서 엉겁결에 들떠 덤비는 것이었다. 나는 자못 냉철하게 “아니, 일본이 군사적으로는 지금 성공을 하지만은 정치적으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요, 멀지 않아 미 영 불 소 등 열국은 공동으로 일본을 격파하게 될 것이지요. 명년 이맘때이면 일본의 승리는 여전하더라도, 국제동향에는 일맥의 기미가 움직이는 것을 보겠지요.” 하였었다.

1943년 이른 봄 홍원의 유치장에서는, 불리워 나아가면 천정에 매어달리고 혹 신매를 맞고 물벼락을 치르면서도, 어느 분은 “이 안 사람들로 내각을 조직한다면 아무는 총리, 아무는 외교총장” 하면서 오히려 다가오는 해방의 날을 즐거워하던 것이다. (안재홍, “8-15 당시의 우리 정계”, 1949. 9 <새한민보>, <민세 안재홍 선집 2> 466-467쪽)


1945년 5월 8일 유럽의 전쟁이 끝난 후로는 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전세의 반전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몇 달이나 더 버틸지가 확실치 않을 뿐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명시한 카이로선언도 알려져 있었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도시인들에게는 해방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해방이 갑자기 닥친 것 같은 ‘신화’가 후세에는 전해지는 것일까. 그 날의 감격을 더 극적인 것으로 그리고 싶은 경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실제적인 이유도 생각된다. 해방이 되자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은 죄악으로 몰리게 되었다. 해방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못한 사실을 변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해방이 뜻밖의 일이었다는 신화가 도전받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65년 전의 상황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데는 많은 굴절이 있었고, 그 일부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통해 정설로 굳어져 왔다. 반공을 위한 공식적 선전과 친일파 옹호를 위한 은근한 윤색이 왜곡의 가장 큰 범인들이다.


나는 65년 전의 자료를 매일 들여다보며 지내고 있다. 기본적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열람할 수 있는 당시의 신문이다. 그밖에 각종 연구서에서 활용된 자료들을 본다. 그렇게 해서 당시 사람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 해서 65년 전의 어느 누구와든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수는 없다. 그 사이 65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나는 의식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당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관해 당시 사람들이 외신을 통해 알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알아낼 수 있으니까. 나는 2011년에 2011년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다. 다만 65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장벽을 가능한 한 치워놓고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다.


3.


1년간 작업을 해오면서 나 자신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던 많은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는데, 그 사실들을 이 자리에서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 시대 전체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 몇 가지 얻은 것을 예시하겠다.


첫째는 분단건국과 전쟁에 내부적 원인보다 외부적 원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외부적 원인 중에서 소련보다 미국의 작용이 더 컸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는 당시의 ‘좌우대립’에서 ‘적대적 공생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잘못된 일에 대한 개인적 반성에서는 ‘남 탓’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보호의 본능 때문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힘든 자연스러운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본능을 극복해야만 어떤 일이든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탓’ 앞세우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종교도 있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본능의 극복에 그치지 않고 ‘내 탓’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도덕적 순결주의는 비사회성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자신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특히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끼칠 수 있는 태도다.


사회적 반성도 이 점에서 개인적 반성과 마찬가지다. 조선 멸망의 원인을 조선인의 결함에서 찾던 식민주의 사관을 생각해 보자. 어느 정도까지는 조선인의 반응에서 잘못된 점을 반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에 집착해서 일본의 침략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무시한다면 정확한 상황 인식이 불가능해지고, 친일 행위에 아무 거리낌이 없게 된다.


한국이 분단건국과 전쟁의 길을 걸은 데는 미국의 책임이 상당히 컸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미국의 책임이 압도적인 것으로 서술했다. 나는 커밍스의 미국 책임론이 너무 치우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지만, 일반 한국인의 통념에 비해서는 미국의 책임을 훨씬 크게 봐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냉전기 동안 미국의 책임을 토론도 하지 못하는 여건 속에서 통념이 크게 왜곡되어 있다.


냉전기 동안 미국의 위성국가 대한민국에게는 국제무대에서 주체적 역할이 없었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주체적 역할이 필요하게 된 21세기 상황에서는 과거 상황에서 한국인이 무엇을 할 수 있었고 할 수 없었는지 보다 냉철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을지도 내다볼 수 있다.


냉전기의 교육과 선전에서 중요한 관념 하나가 ‘적화 야욕’이었다. 질서와 평화에 대한 위협이 이 야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공산 세력이 공격, 자유 세력이 방어의 입장이라는 관념이다.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그 교육과 선전의 편파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빨갱이를 뿔 달린 괴물로 생각하지도 않고 냉전은 두 가지 이질적 체제의 경쟁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결국 자본주의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더 이상 공산주의의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역사의 종말’을 구가하던 자본주의가 거듭된 공황 사태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과도한 사회 양극화 현상, 자원의 한계와 환경의 위기 등 ‘지속가능성’을 부정하는 문제들이 전면적으로 불거지고 있는데, 그 책임을 지울 외부의 위협이 없다. 그렇다면 냉전의 본질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자본주의 체제가 평화와 질서에 대한 도전자였다고 하는 설명.


1947년 3월 미국이 소련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분명히 밝힌 ‘트루먼 독트린’이 냉전의 출발점이었다. 1945년 5월까지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우던 두 나라의 연합관계가 22개월 기간 동안 적대관계로 바뀐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해방 이후 한반도에 대한 두 나라의 태도를 살펴보면 이 변화를 미국이 주도한 사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두 나라 다 군대 진주를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노력했지만, 그 노력의 수준이 달랐다. 소련군이 ‘해방군’ 역할을 통해 우호적 정권의 탄생을 유도하려 한 반면 미군은 ‘점령군’ 역할을 통해 미국에 종속된 정권을 만들고자 했다.


미국은 대전 중 연합국 간의 협력관계를 중시하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로부터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구축하는 ‘국가주의(nationalism)’로 노선을 바꾸고 있었다. 종전 당시 미국은 나머지 세계 전체와 맞먹는 생산력을 갖고 있었고, 군사력에서도 원자폭탄이라는 절대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미국 사회에는 원래 미국을 다른 어떤 나라와도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예외주의’ 풍조가 있었는데,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춤으로써 강력한 패권주의 노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신흥 패권주의에 가장 호되게 걸린 나라의 하나가 한국이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지키고 키우는 위성국가로 태어났다는 기본성격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내부 국민에 대해서도 잘못된 정책을 많이 수행했고, 그 폐해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것이 많이 있다. 지금부터의 극복을 위해서도 그 연원을 면밀하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인의 정치활동은 ‘좌우대립’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극우파’-‘중도우파’-‘중도좌파’-‘극좌파’의 연속 스펙트럼 위에서 가까운 입장끼리 연합하고 먼 입장끼리 대립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보통 인식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이념을 기준으로 한 그런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극우파와 극좌파에는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와 권력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많았다. 중도우파보다 자유주의 이념이 더 투철해서가 아니라 일제시대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우파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고, 중도좌파보다 사회혁명의 신념이 더 강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극좌파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좌파와 극우파의 노선에는 표방하는 이념과 합치하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극좌파는 인민대중을 소외시키기 일쑤였고, 극우파는 억압적 권위주의를 지향했다.


해방 당시 한국 사회에는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했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는 세 가지 이념의 배합 방법과 비율에 다소의 이견을 갖고 있었으나 충분히 절충할 수 있는 범위의 이견이었다. 그런데 극좌파와 극우파는 세 가지 이념이 고르게 실현되는 것을 싫어했다. 민의가 순조롭게 수렴되는 민주적 정치 과정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두 극단파는 공통의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양극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는 일부러 만들지 않고도 저절로 형성된 것 같다. 자금력과 폭력으로 대화의 길을 봉쇄하고 중도파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함으로써 각자 자기 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으니까. 신탁통치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극우파는 “신탁통치 절대 반대”를 외치며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까지 배척했고, 극좌파는 “3상회의 절대 지지”라 해서 신탁통치까지 지지했다. 3상회의는 지지하되 신탁통치는 반대한다는,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은 양쪽 모두에게 기회주의자로 몰렸다.


두 극단파가 민의를 받들 생각을 하지 않고 조작 대상으로만 여긴 것은 의존할 외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상황의 진행을 살펴보면 민주주의 원리보다 폭력과 책략에 의존하는 극단파의 득세가 강력한 외세의 존재로 뒷받침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분단된 두 국가가 냉전기간 내내 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한 것은 이 적대적 공생관계의 틀 때문이었고 냉전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그 틀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오랜 기간을 통해 공생관계가 내면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4.


해방공간의 세밀한 고찰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일깨워주는가. 지금까지 이 작업에서 떠올려 온 많은 생각을 이 자리에서 모두 내놓을 수는 없고, 하나의 예로서 친일 문제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리겠다.


해방 당시 대다수 조선인은 ‘해방’이 이민족 지배를 벗어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군국주의 지배하에 쌓여 온 사회경제적 모순도 아울러 해소하는 계기가 되기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함께 사회주의가 폭넓은 합의의 내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극우파의 본산인 한민당조차 공식 강령에서는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토지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식민지시대 말기의 특권층의 행태를 적극적 친일과 소극적 협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재산과 학력에서 우월한 위치를 누린 계층은 소극적으로라도 식민지 지배체제에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중 대부분은 민족과 사회의 대의를 소홀히 했다는 흠은 있을지언정 사태의 악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는 선에서 개인적 양심은 지킨 사람들이었다. 식민지 지배체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사태의 악화에 기여한 악질 친일파는 소수였다.


해방이 되었을 때 소극적 협력자들은 대개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양보하고 사회경제 개혁에 호응함으로써 대세에 적응하려는 각오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반공 성향의 미군정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의 득세를 막기 위해 일본 지배체제를 최대한 복원하려는 방침 아래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층을 미군정의 협력자로 동원했다. 심지어 경찰과 관리 등 악질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기까지 했다.


미군정의 힘에 기대어 당시의 국민적 합의를 무시하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들도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인을 몰아낸다는 점에서만 민족주의였다. 식민지시대 억압체제를 그대로 두고 다만 일본인들이 점하고 있던 지배자의 자리를 자기네가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좌익에서는 ‘민족주의 파쇼’ 집단이라고 비난했는데,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모시는 권위주의 체제를 그들은 지향했으니까.


식민지시대 협력자 계층의 소극성과 적극성을 구분하는 데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 획일적 기준으로 일거에 처단하는 데는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따를 수 있다. 정상적 청산은 항일투사 등 도덕적 권위가 확고한 집단이 주체가 되어 몇 개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었다. 첫 단계에서는 혐의자 범위를 넓게 잡아 조사기간 동안 자숙을 요구하고 나서 처단의 범위와 수준을 단계적으로 구체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 하, 특히 경찰에서 적극적 친일파가 칼자루를 쥐게 되면서 정상적 청산 과정의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세력 중에도 미군정에 영합해 친일 청산보다 반공을 앞세우는 경향이 고개를 들었다. 악질 친일파를 포함하는 과거의 협력자 집단에게는 반성과 자숙보다 반공 진영에 가담하는 것이 더 유리한 선택으로 주어졌다. 미군정의 힘을 배경으로 구축된 반공 진영은 이승만 중심의 분단건국에 공헌하여 유사 식민지 체제의 특권층으로 힘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


지금 한국 기득권층은 건국 당시 특권층의 권리를 물려받거나 그 가치기준에 따라 편입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치기준이란 것은 사회 질서에 대한 책임감을 도외시하고 자유경쟁을 절대시하는 승리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다.


주체성을 가진 사회에서는 그 질서에 대해 상류층일수록 더 강한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체제의 지속에서 상류층일수록 더 큰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방공간에서 외부의 힘에 질서를 맡기기 때문에 주체적 책임감을 외면하는 집단이 득세했고, 그로 인해 상류층의 도덕적 해이가 전반적 풍조가 되었다.


친일파 처단이 제대로 되지 못한 사실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의의 기준에서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 특권층의 형성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자면,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가진 위험을 더 중시하게 된다. 상류층이 책임감을 가지지 못하면 지도층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해방공간에서 책임감이 약한 세력이 득세했기 때문에 분단건국과 전쟁의 위험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상류층의 책임감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위험에 이 사회가 노출돼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