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釣魚島
일본은 섬나라라서 국경분쟁을 가질 곳이 별로 없다. 2차 대전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 극우파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제기한 국경문제는 세 방향이다. 북쪽으로 러시아와 사이에 북방 4도,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사이에 독도, 그리고 남쪽으로 대만(및 중국)과 사이에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다.
북방 4도 문제는 우리가 봐도 공감이 간다. 1855년의 첫 러-일 조약 이래 양국간의 국경은 상황에 따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을 사이에 두고 오락가락했다. 홋카이도 바로 바깥의 북방 4도는 늘 일본령이던 것을 2차 대전 종전 때 소련이 빼앗아갔다. 아직까지 러시아계 정착인구도 별로 없으니 근래 일본으로의 반환이 진척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와 댜오위다오 문제는 전연 다르다. 독도야 우리가 잘 아는 일이지만 댜오위다오는 어떠한가. 댜오위다오는 대만 해안에서 1백30km, 중국본토 해안에서 2백50km, 오키나와의 중심지 나하에서는 5백km, 규슈 해안에서는 1천km 가량의 거리에 있다. 위치로 보아 중국이나 대만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원래 오키나와는 유구(琉球)라는 이름의 독립국으로서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것을 메이지(明治)시대에 일본이 정복해(1877) 병탄한 것이다. 얼마 후 청일전쟁의 결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됐으니(1895) 대만과 오키나와 사이에 있는 댜오위다오는 따질 겨를도 없이 일본지배에 들어갔다. 후에 일본은 이 섬을 제멋대로 오키나와 현에 소속시켰다.
중국은 대만과 적대하는 상황이고 댜오위다오에 대해서도 궁극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만을 도와주고 있다. 언제든 대만을 되찾을 때 어차피 묻어 들어올 것이니 느긋하게 대만에게 맡겨둔다는 속셈인지 모른다.
일본 눈치를 살피느라 독도의 선착장 준공식도 제대로 못하고 장관에게 옐로카드나 띄우는 우리 정부가 딱하다. 독도와 댜오위다오는 같은 문제다. 우리 정부가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만-중국 측을 거들고 독도문제에 그쪽 도움 받을 생각을 왜 않는지 알 수 없다. 1994년 판 대한민국 수로국 발행 해도에 댜오위다오가 ‘Sento Shosho’로 표시돼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중국에서 찍는 지도에 독도를 ‘竹島’라 표시한들 무슨 낯으로 항의할 것인가.
(1997년 9월)
터키의 서해안은 에게 해에 면해 있다. 그런데 바로 연안에 붙어 있는 섬들까지, 섬이란 섬은 모두 그리스 땅이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진도, 완도, 거금도 같은 섬들이 모두 중국 땅인 격이랄까? 터키제국이 수백 년간 다스리던 섬들을 20세기 들어 빼앗긴 결과다. 본토는 잘라내기 힘들어도 섬들은 있는 대로 탈탈 털어갔다.
전쟁에 이기면 영토를 빼앗고 지면 빼앗기는 것이 고래의 관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 관습이 계속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방면의 엄청난 영토를 빼앗겼고, 이탈리아도 아드리아 해의 섬들을 비롯해 유고슬라비아 방면의 상당한 영토를 내놓았다. 심지어 루마니아조차 베살라비아를 소련에게 빼앗겼다. [터키 서해안과 일본 북방4도 지도 넣었으면]
그런데 전쟁 책임이 독일과 함께 제일 큰 일본만은 영토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침략했던 땅을 뱉어놓은 외에는 러시아에게 북방에서 밀린 정도뿐이었다. 섬나라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이유만이 아니다. 오키나와는 수백 년간 독립국이던 유구를 불과 70년 전에 병탄한 것인데, 그조차 결국 일본 땅으로 남았다.
문제는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에 있었다. 다른 패전국의 배상과 영토조정은 1946~1947년간의 조약으로 처리되었다. 연합국 사이의 합의를 통한 처리방침이었다. 미국, 소련, 영국, 3국의 합의가 기본이었고 중국과 프랑스도 더러 발언권을 가졌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소련과 중국은 완전히 빠졌고, 영국과 프랑스는 극히 소극적인 입장에 머물렀다.
미국은 1951년 당시에 일본을 아시아 방면의 가장 중요한 보루로 확보할 방침이었다. 이미 천황제 존속 등의 조치를 통해 일본을 편으로 삼을 뜻을 확실히 하고 있던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아시아 방면이 불안해진 만큼 더욱더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은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리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등 일본의 침략 피해가 큰 나라들의 반발을 미국이 다른 보상을 통해 대신 무마해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장 피해가 큰 두 나라의 불만은 묵살해 버렸다. 중국(과 북한)은 미국과 전쟁 중이었고, 한국은 미국에게 꼼짝 못하니까.
패전 전 군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은 극우파가 전후 일본에서 세력을 지킨 중요한 이유 하나는 미국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제해 준 데 있다. 독일과 독일인에게 처참한 파국을 가져온 나치는 독일에서 고개를 들 여지가 없지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꿀릴 데가 없다. 그들이 한국인에게만 근대화시켜 준 공치사를 하겠는가? 침략과 전쟁을 통해 일본인의 능력과 근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전후의 경제번영도 가능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 승전국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독립한 국가”로 간주되어 참여를 거부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아무 역할도 없었던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힘을 지켜주고 그 환심을 사기 위해 희생시킨 것이 한국과 중국의 이익이었고, 그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 독도와 조어도다. 조어도의 경우 타이완이 1971년 유엔에서 축출되고 미국이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까지는 중국도 타이완도 문제를 제기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반면 독도 문제를 지금까지 깨끗이 해결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형편없는 외교력과 함께 미국에 대한 심한 종속성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독도에 관한 일본 극우파의 주장에는 두 개 측면이 있다. 역사적 배경과 국제법적 관계다. 1970년대까지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주장이 많았는데, 1980년대 들어 한국 학계의 조사 능력도 발전하고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도 그 무리한 점을 지적하면서 잦아들었다. 시마네 현의 향토사 차원에서 지역 여론을 선동하는 데나 쓰일 정도이지, 대외적인 설득력이 별로 없게 되었다.
국제법적 관계의 근거로 일본 극우파가 내놓는 것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다. 편을 잘못 골랐다고 ‘후회’할 뿐이다. 패전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편을 바꿀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미국이 중국이나 한국보다 일본을 좋아하는 마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나타났다고 믿는다. 1951년의 평화회담에는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초청받지 못했다.
정두언 의원이 누군가를 겨냥한 “개나 소나 독도”란 말로 주목을 끌었는데, 사실 정치인들 중에 독도의 의미를 쥐뿔도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풍조가 분명히 있다. 비슷한 풍조가 1951년에도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 극우파에게 꼬투리를 남기기도 했다.
미국이 준비한 대일강화조약 문안 중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제2조 a항)는 내용이 있었다. 양유찬 주미대사가 이끄는 한국대표단은 여기에 쓰시마(대마도)까지 보탤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독도와 파랑도를 넣을 것을 다시 요구했다가 또 거절당했다.
미국이 한국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한 것은 두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구를 제출했던 한표욱 일등서기관은 위치의 질문에 “일본해에 위치해 있으며,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Mr Han stated that these were two small islands lying in the Sea of Japan, be helieved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ungdo.)
독도의 위치는 ‘리앙쿠르 바위’ 또는 ‘다케지마’란 이름만 댔으면 바로 확인됐을 것이다. 그런데 전설의 섬 파랑도와 함께 “그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요구하는 쪽에서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는데 요구받는 쪽에서 알뜰히 찾아줄 리가 없다. 독도 표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에서 이런 경위를 밝힌 다음 762-763쪽에 이런 논평을 붙였다.
한국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 7. 19)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주장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시켰다.
나아가 한미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협의(1951. 7. 19)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토인 독도의 불가침성에 대한 진지한 대응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부터 그렇다. 그런 일본인을 이 글에서도 자꾸 ‘극우파’로 표기하게 된다. 그러나 극우파 아닌 일본인도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1951년 7월 한-미간의 협의 내용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만이 일본에서 횡행하는 것은 일본 사회의 문제고, 또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다. 각자 주장하고 싶은 방향에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미워하기만 하기보다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욕을 하는 데도 선후를 가릴 필요가 있다. 일본 극우파야 어느 사회에나 독단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니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국민에게 ‘반일’을 팔아먹으면서 독도에 대해서고 무엇에 대해서고 아무 진지한 생각 없이 일본 극우파의 주장 근거만 만들어준 이승만 매국정권이 정말 한심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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