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1. 20:14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701143948§ion=04
혼자 틀어박혀 내멋대로 일하며 사는 사람인지라 토론의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토론의 기회에 마주치면 일단 반갑다. 박은숙의 반론도 일단 반향을 얻었다는 점에서 반갑기는 하지만, 더 계속하기는 겁난다. 그래서 여기다 소감만 적어놓고 말겠다. 이렇게 아늑한 자리에서라면 누가 무슨 소리를 내놓아줘도 반가울 것이다.
왜 겁이 나는가 하면 토론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기 힘들 것 같아서다. 상대방이 안 한 얘기를 한 것처럼 뒤집어씌우면 어떻게 의미 있는 토론이 이뤄질 수 있겠는가? 박은숙은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내가 주장했다고 한다. 그 근거는 내 서평 중의 이 대목일 것이다.
"평가는 차치하고, 일본인의 개입이라는 사실 문제부터 보자. 김옥균 등이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를 계속 쫓아다닌 것을(105쪽에 보면 우정국에서 일을 저질러 놓은 다음 창덕궁 들어가기 전에도 공사관에 들러 '기색'을 살폈다고 한다. 맙소사!) 박은숙은 "협조를 약속한 일본 공사의 변심"을 걱정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큰 사업에 약속해 놓고 변심을 걱정한다고?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하는 훨씬 그럴싸한 설명이 저자에게는 떠오르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김옥균 일당의 '주체성'에 대한 박은숙의 '맹신'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변은 100% 김옥균 일당의 책임도 아니고 100% 일본공사관의 책임도 아니다. 양쪽의 합작이다. 그런데 창덕궁 가는 길에 공사관 들른 일은 공사관 쪽 책임을 부각시켜 주는 것이다. 나는 평론가 입장에서 치우친 해석을 지적한 것이다. 반대쪽 관점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식민사관 비판이 도를 지나쳐 식민사관을 꼭 뒤집어봐야 한다고 하는 주장(예를 들어 식민사학자들이 고종을 암유하다고 했으니 고종이 영명했다고 봐야 한다는 식)을 나도 비판해 왔다. 내가 조동걸과 이태진의 학설을 제시한 것은 그들이 꼭 옳다고 여겨서가 아니다. 처음에 식민사학자들의 갑신정변 예찬이 있었다. 그 후에 그것을 뒤집어보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그런 뒤에 갑신정변 예찬을 하려면 중간에 있었던 문제 제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조동걸과 이태진의 주장을 제시한 것은 이 문제 때문이다.
그러니 박은숙은 조동걸과 이태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밝혀주면 된다. 그들의 학설을 인용한 내게 "식민사학의 논지는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무조건 반대로 해야만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일까?" 하고 뒤집어씌울 일이 아니다.
박은숙은 또 내가 "개화파를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근거로 삼았을 내 서평 중의 대목은 이런 것이었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갑신정변의 '근대성'에서 새 역사의 원리를 찾는다며 갑신정변을 떠받들었다.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이 '개화(開化)'의 '지사(志士)'였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그렇게 봤다고 하는 말 아닌가! 제대로 된 개화파라면 그럴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내 뜻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관점을 내 관점으로 뒤집어 씌우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사학이나 김기협이나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시각은 '반(反) 유교, 전통과의 단절, 친일'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동일하다." 같은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반론'이 토론이라면 많은 사람 보는 데서 하고 싶지 않다.
요컨대 박은숙은 평론가의 입장이 선수 입장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구든 꼭 어느 팀에 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식민사학의 갑신정변관이 오랫동안 맹위를 떨쳤고, 그에 대한 강렬한 반론이 근년에 있었다는 사실을 외부에서 관찰해 온 사람이다. 지금 갑신정변을 찬양하는 얘기를 하려면 그간의 반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지적만으로 내가 그 반론을 신봉한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박영효 저택 매매를 보자. '반론'에서 설명해 준 것을 보니 "아, 실제 거래였구나." 하고 (거의) 이해가 간다. 저택은 귀족층에게 신분의 첫 번째 상징이다. 왕실 부마가 거사 1년 전에 저택을 팔았다 하고 그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 의혹을 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재쇄 때 이 설명은 꼭 보완하기 바란다.
박은숙은 내가 '정황 증거'와 '감'에 의지해서 내 생각을 내놓는 것을 탓한다. 평론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증'을 가지고만 갑신정변의 성격과 김옥균의 사람됨을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문연구자 외에는 아무도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전문연구자의 역할은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잘 빚어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을 잘 일으켜줘야 한다.
저자와 나 사이에 가장 명확하게 관점이 상치되는 곳이 유교 질서에 대한 김옥균의 태도다. 저자는 김옥균이 유교 질서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많은 물증을 내놓는다. 그런데 나는 이 물증에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어차피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인지라 습관적으로 나온 것도 있고,(경연에서 도덕을 논한 내용 같은 것) 난신적자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시늉을 한 것도 있으니까. 그보다는 정변 중에 왕을 끌고 다니면서 신하다운 태도를 지키지 않는 등 행동에서 유교 질서를 벗어난 것이 더 중요한 증거로 보인다.
연구자들에게만 보일 학술논문이라면 평론가가 필요 없다. 물증 외의 다른 모든것을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일반 독자에게 보이는 글이라면 '정황 증거'와 '감'에 의지하는 평론가의 의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 선수만 의식하며 승리만 추구하는 자세보다 한 꼭지 글을 통해서도 독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앞서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페리스코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와 파랑도 (1) | 2011.08.10 |
---|---|
왜 ‘좌파 신자유주의’를 만들어내는가? (23) | 2011.07.15 |
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너머북스 펴냄) (11) | 2011.06.24 |
이완용을 미워하지 맙시다. 경멸합시다. (4) | 2011.06.03 |
유시민 선생, 김해에서 이겼다면 죄가 안 됐을까? (7) | 2011.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