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경제 정책의 타당성을 단호하게 논할 만한 식견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작년 <뉴라이트 비판> 작업과 관련해 신자유주의 노선의 성격을 이해한 바에 비춰보면 참여정부에 신자유주의를 뒤집어씌운 진보 진영의 비판은 부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부시의 미국 정부가 강요한 신자유주의 노선을 부득이한 선에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계급화' 현상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은 분명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는 보수적 정책 노선이 아니다. 세계 차원의 '수구' 노선이다. 지속 가능한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특권을 유지·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로 그 본색이 만천하에 드러날 때까지 이 노선이 미국 경제 정책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종속성이 강한 한국의 정책이 당장 벗어나기 힘든 울타리가 있었다.
그 범위를 나는 세밀히 판단하지 못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신자유주의로 지목되는 참여정부의 정책은 그 울타리에 묶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보다는 복지 확대, 종합부동산세 신설 등 빈부 격차의 문제점을 완화하려는 노력이 참여정부의 색깔을 판단할 더 중요한 지표라고 본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는 진보·보수 구분의 의미를 제한하는 문제가 깔려 있다. 독재시대의 유산으로서 민주화 시대에도 세계화 시대에도 맞지 않는 특권 구조다. 그 청산을 서두르지 않으면 이 사회의 피해가 한없이 누적되리라는 것은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분명한 일이다. 따라서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함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고, 두 노선의 차이는 이 특권 구조가 어느 정도 청산된 후에나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이뤄져 왔다고 이야기들 하지만 특권 구조의 인프라를 청산하지 않은 채로는 무늬만의 민주화일 뿐이며, 그것이 이른바 '87년 체제'의 한계다. 노무현 대통령이 "상식과 원칙"을 내세운 것은 이 특권 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다. 상식과 원칙을 벗어난 검찰과 수구 언론의 근래 행태도 이 특권 구조의 일부이며, 이명박 정부가 독재시대로 회귀할 수 있는 것도 이 특권 구조의 힘에 기댄 것이다.
(“노무현…'보수'면 또 어때?” 발췌, 2009. 6. 5)
모든 단어는 쓰이는 의미에 상당한 범위의 편차가 있다. 그 범위를 가능한 한 명확히 표시하기 위해 사전을 제작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처럼 쓰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말을 놓고는 사전의 도움도 크게 받을 수 없다. 어느 정도의 혼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요한 일은 그 말이 만들어진 이유, 그리고 그 말을 쓰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자로 지목된 자들은 대개 스스로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신자유주의를 들먹이는 자들은 잘못된 정책노선을 공격하는 데 그 말을 쓴다.
그 말을 쓰는 목적이 특정한 정책노선의 비판에 있다면 그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가급적 혼란 없이 쓰는 것이 목적을 이루는 데 유리하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쓴다면 담론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힘들다.
식민지시대부터 널리 쓰인 ‘친일파’란 말이 겪은 혼란을 생각해 보자. 민족을 등지고 일본 식민통치에 협조하면서 이익을 꾀한 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그 실제 범위를 넓게 보려는 경향과 좁게 보려는 경향이 엇갈렸다.
아주 악질적인 경우만으로 좁게 보려는 경향에는 이기적 동기와 공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 약간의 친일 혐의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정도는 문제 삼지 말고 더 심한 경우만 친일로 보자고 주장한 것이 이기적 동기였고, 친일 문제로 인한 사회의 충격을 줄이고 싶어 한 것이 공리적 동기였다.
조금이라도 혐의되는 점이 있으면 모두 넣어서 넓게 보려는 경향에도 역시 이기적 동기와 공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 사소한 문제까지 철저히 반성하자는 정의감이 공리적 동기라면, 중대한 문제를 가진 자들이 사소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까지 같은 범주에 끌어들여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것이 이기적 동기였다.
이기적 동기든 공리적 동기든 친일을 좁게 보려는 경향은 온건한 정치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반면 넓게 보려는 경향은 과격한 정치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방 후 공산당의 극좌파와 한민당의 극우파는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면서도 ‘친일파’의 의미를 넓게 보려는 입장을 함께 했다. 물론 동기는 서로 달랐다. 극좌는 과거 청산을 철저히 하자는 공리적 동기였고, 극우는 모두의 문제이니 너무 심하게 따져서는 안 된다는 이기적 동기였다. 악질 친일파는 처단-배제하되 정도가 약한 친일파는 반성과 자숙을 통해 포용되도록 한다는 것이 중도파의 입장이었다.
친일파에 대한 극좌파의 과격한 태도는 표면상 공리적 동기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이기적 동기가 상당히 끼어들기도 한 것이었다. 되도록 넓은 범위의 경쟁자들에게 족쇄를 채움으로써 정국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었다. 여운형, 안재홍 같은 중도파 인사들에 대한 집요한 흑색선전이 그런 예다.
친일파를 넓게 규정하려는 극좌 노선은 동기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처단과 배제라는 원래의 목적에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친일파 비판 대열에 분열을 가져오는 한편 정도가 약한 친일파까지 반성과 자숙 대신 극우에 동조할 여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까지도 친일파 비판에 반대하는 대표적 논리가 “일제시대에 숨 쉬고 산 사람은 모두 친일파란 말이냐?” 하는 것이다. 2년 전 완성된 <친일인명사전>은 무엇보다 이 논리를 격파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친일파 비판이 흑백론적 구호 수준을 넘어 구체적 분석이 가능하게 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파 비판의 극단적 확장에 원리주의 성향의 선명성을 앞세운 것이 문제였다. 원리주의자들은 비판 대상을 ‘우리의 문제’로 끌어안으려 하지 않고 철저하게 객체화한다. 비판 주체인 자기들은 그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는 비판 내용을 심화시키지 못하는 이념적 한계뿐 아니라 비판 주체를 확장하지 못하고 비판 대상의 반발만을 강화시켜주는 전략적 문제도 있다.
친일파 문제의 교훈을 생각하면 신자유주의 비판에 있어서도 원리주의 성향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난다 해서 몽땅 신자유주의로 몰아붙이는 태도로는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문제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지도 못하고 비판의 대열을 분열, 축소시킬 뿐이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도발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고 모든 피해자들의 연대의식을 키워야 효과적 대응이 가능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수사(修辭)’가 아닌 ‘실체’처럼 들먹이는 이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말을 처음 꺼낸 본인은 하나의 수사로 쓴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그와 다른 뜻으로 쓰는 데는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인가?
자유주의는 이념적 규정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널리 쓰이는 말이다. '좌파 자유주의', '우파 자유주의'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대두한 신자유주의는 정상적 우파를 뛰어넘는 반동적 극우 노선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더 넓은 뜻으로 장차 쓰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으로서 '좌파 신자유주의'는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구글로 검색해 보라. 외국의 담론 중에 '좌파 신자유주의'를 진지하게 실체로 거론한 사례가 있는지.
1998-2007년 김대중-노무현 재임 기간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강력하게 추진한 시기다. 미국에 대한 종속성이 강한 한국은 그 압력에 상당 수준 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차베스나 룰라처럼 버티지 못했다 해서 몽땅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제시대에 숨 쉬고 살았다 해서 몽땅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은 원리주의 취향이다. 그 이전의 김영삼 정권, 이후의 이명박 정권과 비교하는 것이 실질적 의미가 있는 관점이다.
‘좌파 신자유주의’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다. 정부 정책에 앞서 일반인의 일상생활부터 우리 사회의 구조 전체가 신자유주의의 위협에 허약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걱정한다. 진보의 의지만으로 손쉽게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외부의 위협이 아니다. “정의는 이긴다”고 하는 단순한 믿음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일본 식민통치가 한 해 두 해 쌓여감에 따라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조선인의 마음이 늘어났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세계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지배를 늘려 왔다. 그 본질을 냉철하게 파악해서 모든 위치의 피해자들이 연대해서 대응해야 할 문제다. 원리주의 취향으로 작은 정파적 이익에 집착하다가 극우파의 발호를 불러온 해방공간 극좌파의 오류를 답습하는 일이 없기 바란다.
'페리스코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 뉴라이트여, 이 책을 보고 공부 좀 해라! (2) | 2011.08.26 |
---|---|
독도와 파랑도 (1) | 2011.08.10 |
<김옥균> 저자 반론에 대한 소감 (1) | 2011.07.01 |
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너머북스 펴냄) (11) | 2011.06.24 |
이완용을 미워하지 맙시다. 경멸합시다. (4) | 2011.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