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사람만한 관심거리가 따로 없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사람에 관한 학문이다. 역사학도 그중 하나다. 사람을 살피는 방법으로서 역사학이 다른 학문이나 공부와 다른 특징이 무엇일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역사학이다. 역사 속에서 인물의 모습을 바라볼 때 나는 하나의 큰 나무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사람 하나하나를 나무를 뒤덮은 잎사귀, 꽃, 열매로 본다. 이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나무와 나름대로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의 신진대사가 나무의 성장과 생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역사 공부다.
나무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잎사귀보다 꽃과 열매에 모이는 것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특출한 인물들이 있다. 힘, 용기, 성실성, 지혜, 착한 마음 등 많은 사람들이 받드는 미덕이나 장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인물들이다.
‘민중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나무의 생명에 꽃이나 열매보다 잎사귀의 역할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역사 흐름의 실제 인식에는 특출한 인물들이 지표 노릇을 한다. 역사의 기본 흐름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 끌고 간다 하더라도, 두드러진 굴곡에서는 특출한 인물들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출한 인물의 전기는 역사 서술의 중요한 분야다.
전기 작가 중에는 꽃과 열매를 나무에서 떼어내 정물화로 그리는 이들도 있다. 꽃과 열매의 시각적 특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데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서술로서의 전기는 꽃과 열매를 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풍경화라야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상 인물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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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니 저서 중에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005), 역서 중에 <추안급국안 중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진술 기록>(아세아문화사 펴냄, 2009)이 있다. 김옥균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볼 준비를 갖춘 연구자로 보인다.
목차도 잘 짜였다. 배경과 사람됨을 다룬 제1장에서 죽음과 평가를 다룬 제5장까지 짜임새도 괜찮고, 특히 다각적 인간관계를 다룬 제6장을 붙인 것은 대상 인물에 대한 시각을 입체화해 주는 아주 좋은 시도다. 김옥균의 사람됨과 역할에 대해 나는 저자 박은숙과 거의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제6장의 내용은 내 시각을 내 나름대로 확충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저자가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해 다분히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데는 연구자가 연구 대상에게 애착과 애정을 느끼게 되기 쉬운 스킨십의 원리를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다. 그런 애착과 애정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피상적 관찰을 뛰어넘어 더 심도 있는 고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도 많다.
그러나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둘러싼 초기 연구사의 지독한 편파성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애착과 애정에 너무 절제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제 식민사학이 오랜 기간에 걸쳐 갑신정변을 극도로 미화하고 일본인의 개입을 감춘 사실은 밝혀질 만큼 밝혀져 왔다. 전문연구자 아닌 나도 조동걸의 <현대한국사학사>(나남출판 펴냄)와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으로 웬만큼 파악할 수 있었다.
평가는 차치하고, 일본인의 개입이라는 사실 문제부터 보자. 김옥균 등이 다케조에 공사를 계속 쫓아다닌 것을(105쪽에 보면 우정국에서 일을 저질러 놓은 다음 창덕궁 들어가기 전에도 공사관에 들러 ‘기색’을 살폈다고 한다. 맙소사!) 저자는 “협조를 약속한 일본 공사의 변심”을 걱정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큰 사업에 약속해 놓고 변심을 걱정한다고?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하는 훨씬 그럴싸한 설명이 저자에게는 떠오르지도 않는 것일까?
자금 문제도 거사 1년 전에 박영효가 자기 집을 일본공사관에 팔아 대금 5천 원을 받았다고 한다.(94쪽) 왕실 부마의 저택을 왜 팔았지? 팔고서 집을 비워줬나? 박영효가 비워준 집을 공사관에서 갑신정변 전에 어떤 용도로 어떻게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 한, 이 저택 매매는 거사 자금 지급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조동걸은 <현대한국사학사> 293쪽에서 거사 한 달 전인 11월 3일 일본공사관의 천장절 축하연에 김옥균 일당을 초청했을 때 다케조에가 거사를 종용한 사실과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무시해 왔음을 지적했다. 이 사실들을 박은숙도 무시하고 있다.
나는 갑신정변이 일본공사관의 작품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여러 문제들이 지적되어 왔다. 갑신정변이 김옥균 일당의 주체적 작품이라는 견해를 저자가 갖고 있다면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문제를 좀 해명해 주기 바란다. 이 지적들을 묵살한 채 백 년 전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은 21세기 독자들의 갑신정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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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대목에서 화가 버럭 났다. 그러면서 잠깐 반성했다. 내 견해와 다른 견해를 본다 해서 꼭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 대목에서 왜 내가 흥분하고 있지? 이런 대목이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서울 시장 격인 한성부 판윤에 김홍집을 임명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 김홍집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우리나라로 잡아와 법대로 사형을 집행하여 신과 사람의 분을 풀게 해달라”고 고종에게 진언했다. 또한 1894년 김옥균의 시체가 양화진에 도착하자, 시원임 대신의 일원으로서 모반대역부도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의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김옥균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정치 관료로서 그의 처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8쪽)
김홍집과 김옥균이 초년에 자별한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어진 서술이다. 역적 김옥균에 대한 김홍집의 엄격한 태도를 저자는 정치 관료로서의 ‘처신’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왕년의 자별했던 관계를 등진 김홍집의 의리 없음을 질책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정변 당시 한성부 판윤 임명이 마치 김옥균이 베푼 ‘배려’라도 되는 듯 내세워 김홍집의 ‘배신’을 더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쿠데타 중의 고위직 임명이 배려가 아니라 재앙이었다는 사실은 형조 판서와 외아문 참의에 임명된 윤웅렬-윤치호 부자가 그 연루 때문에 어떤 고생을 하는지 적으면서도(252-253쪽) 분명히 밝힌 것 아닌가. 동조자를 얻기 위해 관직을 뿌린 것은 쿠데타 일당의 얄팍한 전술이었다. 내가 김옥균 입장이라면 평소에 꼴 보기 싫던 놈을 골라 감투를 뒤집어씌웠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호되게 괴롭히는 길이 세상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1880년대 조선이 겪고 있던 변화에는 여러 측면이 있었고, 연구자에 따라 중시하는 측면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유교 질서의 몰락’이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884년 시점까지 유교 질서는 많이 퇴락해 있었지만 뼈대는 아직 건재했다. 그 11년 후 민비 살해사건이 어떤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는지 보라. 갑신정변 때 쿠데타 일당이 왕에게 한 짓은 살해라는 결과에 이르지 않았을 뿐이지, 죄의 성격은 11년 후의 민비 살해와 똑같은 것이었다. 왕을 죽여 버릴 경우 자기네가 일본 우편선을 탈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을 뿐이라고 나는 본다.
이런 대역부도에 대한 규탄을 저자가 ‘처신’으로 폄하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유교 질서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고 보는 것인가? 김홍집은 1896년 2월 아관파천 때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거부하고 고종의 살해 명령(이것은 ‘처형’ 명령이 아니라 불법적 살해 명령으로 나는 이해한다.) 앞에 목숨을 내놓았다. 신하의 본분 지키는 자세를 목숨으로 증명하고 유교 질서 속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나는 김홍집의 인품을 김옥균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이 보는데 박은숙은 김홍집을 처신에나 신경 쓰는 구태의연한 관료로 몰아붙이면서 김옥균을 선각자, 혁명가로 떠받든다. 아무리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너무한다. 김옥균 받드는 거야 천천히 따지더라도, 김홍집을 이렇게 우습게 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도덕관을 가진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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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과 김옥균에 대한 저자와 나의 평가가 상반되는 것은 일단 유교 질서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이유가 있는 듯하다. 저자는 조선 쇠퇴의 원인이 유교 질서에 있다고 하는 백 년 전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니 개화파의 정책과 노선이 유교 질서를 해치는 측면에서 아무 문제도 느끼지 않고, 김홍집이 유교 질서에 목숨 바친 의리를 김옥균에 대한 개인적 의리보다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유교 질서에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의 조선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의 하나였고, 개화 또는 개혁이 주체적으로 이뤄지기 위해 역할을 가지고 있던 요소라고 생각한다. 유교 질서의 의미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역사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조선의 역사는 끝났고 완전히 이질적인 새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하는 식민사관의 본질이다.
그래, 새 역사가 전통의 뒷받침 없이 시작되고 있었다면 그 새 역사란 것은 어떤 바탕 위에 펼쳐지고 있었단 말인가?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갑신정변의 ‘근대성’에서 새 역사의 원리를 찾는다며 갑신정변을 떠받들었다.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이 ‘개화(開化)’의 ‘지사(志士)’였다고 하는 것이다.
‘정령(政令)’이란 이름으로 나온 갑신정변 정책노선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쌓여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내용보다 그 작성 과정이 정책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2월 4일(음 10월 17일) 우정국 거사에 이어 왕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 이튿날 하루를 정적 살해와 병력 확보에 쓴 다음 5일 밤에야 정령 작성을 시작했단다. 세상에! 그런 준비도 안 해 놓고 사람 죽이는 짓부터 시작했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서둘러 작성한 정령을 놓고 갑신정변의 ‘이념’을 논해야 하는 후세 학자들이 참 딱하다. 내가 보기엔 정변의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마구 써 갈긴 것일 뿐인데.
이것 역시 김옥균 일당의 주체적 결정보다 일본공사관의 주도에 의해 정변을 벌인 것이라고 볼 만한 강력한 정황증거다. 주체적 결정에 의한 것이라면 동지를 모으기 위해서라도 정강정책을 미리 준비해 놓게 된다. 동지들 사이의 토론 과정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공사관이 준 돈으로 공사관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정책 준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술전략적 동기로 급조한 정령 속에 좋은 말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독립’과 ‘평등’에 어떤 진정성이 들어 있었나? 거사에 실패하고 망명한 자들이 그 뒤에 진정한 독립 노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는가? 독립신문이 있고 독립협회가 있었다고? 그것을 진정한 독립 노선이라고 본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평등’은 또 어떤가? ‘평등’에 대한 신념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나으리’들을 모시고 일본에 망명한 ‘아랫것’들이 이렇게 울분을 터뜨릴 수 있었겠는가?
동지들 간에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경계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양반 세도가였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네 사람은 숙소를 따로 마련하고 일본의 유지나 외국인들을 접견했으며, 해동대원들을 마치 집에서 데려온 집사처럼 부렸다. 이때 김옥균은 주로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시중을 들었다. 이러한 처사에 이규완 등이 울분을 터뜨리며 비판하자, 김옥균 등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들에게 사죄했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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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로서의 인물 전기에는 도덕적 평가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도덕적 평가란 그 시대의 도덕적 규범과 대상 인물의 가치관을 맞춰보는 작업이므로 이 작업을 통해 그 인물의 역사적 실존이 확인되는 것이다. 김옥균을 “희대의 사기꾼”이나 “절세의 풍류객”으로 내놓으려면 그가 얼마나 사기 치는 재주가 좋았는지, 주색잡기에 솜씨가 좋았는지만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를 이 책의 부제처럼 “역사의 혁명가”로 띄워주려면 시대와 인물 사이의 관계를 밝혀줘야 한다.
망명기간 중 김옥균의 생활을 구성한 두 가지 요소는 돈과 권력을 향한 기회주의적 행태, 그리고 방탕한 향락이었다. 그 방탕에 대해서는 저자도 변명해 줄 엄두가 나지 않는지, 자객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방탕한 태도를 취했다는 일부 회고담에 대해 “왠지 김옥균을 아끼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변명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고 했다.(183쪽)
그러나 김옥균이 쌀 투기, 탄광 개발, 광산 경영, 국유림 불하 등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업들에 대해서는 “담대한 모험가적 기질”이니 “21세기에 요구하는 모험적 창조경영”이니 침이 마른다.(189쪽) 그런 시도가 왜 모두 실패했을까? 시대를 너무 앞서간 천재였기 때문인 것처럼 풍기는 저자의 암시보다는 그 인간이 너무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실패했을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상식에 맞는 것 같다.
저자는 김옥균 일당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희생적인 자세로 거사에 나선 것이라 한다.
사실 김옥균과 개화당 동지들은 기득권 세력으로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켰다. (90쪽)
어떤 부귀영화를 누가 보장해 줬단 말인가. 거사의 첫 번째 목적이 민영익의 살해였다. 당시 25세의 민영익은 민비의 (입양한) 친정조카로서 고종 측근정치의 최대 수혜자였다. 김옥균 역시 측근정치의 큰 수혜자였는데, 민영익에 비하면 낮은 등급 수혜자였다. 김옥균은 한 때 9세 아래의 권력자 민영익 막하에 드나들어 ‘죽동궁 8학사’(죽동궁은 민영익의 저택)로 거명되기도 했다.
민영익의 권세에 대한 질투심이 김옥균에게는 최대의 동기였다고 나는 본다. 그가 평범한 수준의 부귀영화를 바랐다면 웬만큼 보장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보장된 수준의 부귀영화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김옥균 일당의 섣부른 거사로 인해 개화의 대의가 ‘결과적으로’ 저해되었다고 저자는 인정한다. 그런데 나는 김옥균의 대의 훼손을 ‘결과적’인 것이 아니라 ‘원천적’인 것으로 본다. 애초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획득을 위해 그 대의를 이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라면 그토록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일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1873년 말 대원군이 퇴진하고 고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측근정치의 형태로 권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자격이 안 되는 인물에게 엄청난 권력을 몰아주면서 임금 개인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민씨 세도’라 하는 것도 민씨를 내세운 측근정치였다. 고종은 30여 년 동안 절대권력자를 키워주고 그에게 배신당하기를 반복했다. 측근으로 낙점받기 위한 야심가들의 경쟁이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이 경쟁에 가장 열심이던 사람의 하나였다. 연하의 권력자 민영익에게 빌붙어 지내다가 입지가 좀 확보되자 개화정책을 수단으로 민영익과의 경쟁을 시도했다. 그것이 한계에 이르자 정변이라는 극한적 수단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개화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왜 그렇게 단정하냐고? 권력을 기준으로 보면 초년에서 말년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수미일관하게 설명되지만 개화를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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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체제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계층이 체제의 보전에 책임을 지는 자세는 유교 질서만이 아니라 모든 안정성 있는 체제의 기본조건이다. 특권층의 책임감이 실종되는 권력의 사유화는 19세기 조선의 몰락 과정에서 중요한 현상이었고, 이것이 고종의 측근정치로 극한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의 중요한 의미는 개화 노선보다 권력 사유화 현상의 극단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민영익, 김옥균, 이완용. 어린 나이에 생가보다 훨씬 권세 높은 집안으로 입양한 사람들이다. 입양의 자격이 재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재능 하나만을 믿고 도덕적 기준을 잃어버린 것이 초년의 입양 경험을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다.
209-211쪽에 “김옥균의 평가, 애국적 혁명가와 매국적 반역자 사이”란 제목의 짤막한 절이 있다. 그 절의 맨 끝에 서재필의 평가를 옮겨놓은 것은 그 평가에 저자가 동의하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상당한 학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재다예한 인물이었고, 정적들에게 허다한 비방을 듣긴 했지만, 나는 그가 대인격자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이었음을 확신한다.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김옥균을 극찬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었다. 김옥균을 죽이러 왔다가 인품과 사상에 감복해서 동지가 되었다는 사람은 친일파 중에도 최고 저질 친일파 송병준이었다.(163쪽) 나는 서재필의 인품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는데, 위와 같은 말을 정말 남겼다면 ‘인격’과 ‘애국심’에 대한 식견이 무척 천박한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김옥균에 대한 평가에는 전혀 동의하지 못할 점이 많지만, 대상 인물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전기의 기본 목적에 충실한 점은 인정한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마지막 절에 나오는 일본 소년 와다 엔지로. 아홉 살 때 오가사와라 섬에서 김옥균과 만나 열일곱 살 때 상하이의 호텔에서 김옥균이 살해당하는 곁에 있었던 소년. 저자가 충실히 적어놓은 사실만 봐도 김옥균이 상하이까지 다른 동지도 아닌 그 소년을 왜 데리고 갔었는지 상식적인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저자는 어떤 의문이 떠오르는 기색도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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