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서울 지역에 ‘경(京)’의 이름이 처음 붙은 것은 1067년, 고려 문종 때였다.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지역 중심지로 경주의 동경(東京)과 평양의 서경(西京)에 이어 남경(南京)을 이곳에 둔 것이다. 숙종 때인 1104년 수도를 이리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없던 일로 돌아갔다. 고려 말에 이르러 한양 천도설이 새로 나와 조선 건국 3년째인 1394년 수도를 옮긴 후 1399-1405년 개성으로 돌아갔던 몇 년과 1592-1593년 임진왜란 때의 파천기를 제하고는 5백여 년간 조선의 왕도가 여기에 있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조선 태조가 수도를 옮기면서 한양부로부터 한성부로 바꾼 것이 1910년까지 내내 쓰였다. 고려에서나 조선에서나 수도의 존재는 국가체제의 핵심 요소였다. 그래서 왕조가 지속하는 동안 바꾸지 않았고, 왕조가 바뀔 때 수도도 옮겼던 것이다.
천여 년 동안 왕조가 바뀌고 수도가 옮겨도 국가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내내 쓰인 말이 있다. ‘서울’은 <처용가> 앞머리의 ‘새벌(東京)’에서 유래하는 말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서울’은 왕의 거처로서 국가의 중심부라는 관념이 한민족의 의식에 옛날부터 박혀 있어서 신라 때는 신라 왕이 있는 곳, 고려 때는 고려 왕(또는 황제)이 있는 곳, 조선 때는 조선 왕이 있는 곳이 ‘서울’이었다.
원래는 고유명사 아닌 일반명사였지만, 기나긴 조선조를 지나는 동안 그 의미가 고유명사 ‘한성부’에 접근해 왔고, 19세기 후반 조선에 온 서양인들은 ‘서울’을 고유명사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수도가 ‘Seoul’이란 이름으로 외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에 발행지를 ‘서울’로 표시한 것은 그 영문판의 ‘Seoul’ 표시와 짝을 맞춘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처음 공식적으로 ‘서울’을 고유명사로 쓴 사례였다.
일본인들이 합방과 함께 한성부의 이름을 ‘경성부(京城府)’로 바꾼 것은 새 이름이 특별히 좋아서보다 사라지는 왕조의 상징을 없앨 필요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경성’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해방 때 수도의 이름을 바꿀 절대적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한성’이란 이름이 계속 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붙여놓은 ‘경성’을 계속 쓸 수는 없었다.
일본인의 퇴거와 함께 ‘게이조’의 이름도 퇴출의 운명을 맞았다. 그 대안으로 옛 이름 ‘한성’을 되살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서울’을 원했다. 서양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여겨져 서양인이 아는 이름 ‘Seoul’에 맞추려는 생각도 더러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대한 일반 조선인의 태도였다. 식민지시대에도 사람들은 ‘게이조’ 대신 ‘서울’이란 말을 쓰면서 ‘우리의 서울’을 마음에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성부는 경성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 지위도 한 나라의 수도, 신시(神市}에서 일본 제국의 일개 지방 도시로 전락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잡지 <서울>이 발간되었고,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글도 나왔다. 공식 명칭 ‘게이조’와 민중 세계의 언어 ‘서울’은 그 내용상의 현격한 괴리에도 불구하고 공존했고 혼동되지도 않았다. 동경은 ‘東京’이거나 ‘도쿄’였을 뿐, 결코 서울이 되지 못했다. 서울이라는 말은 그렇게 식민지 예속민들이 민족 해방의 염원을 꼭꼭 감춰놓은 ‘비밀의 언어’로 남았다. (전우용, <서울은 깊다>(돌베개 펴냄), 19쪽)
<서울신문> 1946년 05월 25일자 기사 “서울의 명칭이 경성부로 존속”에서 당시 서울의 호칭을 둘러싼 논란의 진행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장안의 명칭은 과연 무엇인가 해방 후 장안의 명칭은 구구하여 누구는 전대로 경성부라 부르고 또는 서울시라고 부르는가 하면, 서울시를 문자화할 때에는 漢城市라고 하자는 등 장안의 명칭 하나 가지고 의논이 분분하여 일반 시민은 과연 무엇으로 자기나라 수도를 불러야 좋을지 몰라 제각각 멋대로 불렀는가 하면, 관청에서도 이 세 가지 호칭을 잡용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 서울시와 한성시라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
경성부라는 것은 해방 후 金昌永 부부윤이 있을 적에 부명 개칭에 대한 의견이 나왔었으나, 그 후 즉시 사임으로 그대로 좌절되었다가, 전번에 사임한 李範昇이 취임되자 다시 의론이 대두하여 부청 간부 측에서는 서울시라고 결정이 되어 시장에게까지 이 결정안이 갔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전 시장이 독단으로 한성시로 개정하여 그때 군정청 내무국으로 개칭 신청을 했던 것으로, 법령으로서 결정도 안 된 것이 발설 전파되어 멋대로 서울시이니 서울시장이니 한성시청이니 또 서울의 명칭은 한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市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하면, 영어로 번역을 해서 서울시청이 씨티홀이 된 연유로 부가 시로 갈려졌던 것이고, 한성이라는 한자는 보수적인 견지에서 구 한국적인 견지에서 구 한국 적에 쓰던 한성이 나온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지난 3월 23일 군정청지방행정처장 申東起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붙은 경성부명 개칭신청서가 반환이 되었던 것이다.
1) 현하 정세에 감하여 시기가 적의치 아니한 것
2) 귀부를 관할하는 경기도지사의 의견이 없는 것
이렇게 해서 서울은 해방 후 6개월 만에 전 이름인 경성부를 다시 찾은 셈이 되었으니, 이에 따라 시장이 아니라 부윤으로 다시 되었다. 그러면 전 구 역소도 구청이라고 간판을 새로 내걸었는데 이것은 또한 정식으로 법칙 결정이 없이 고쳐서 붙인 것이니, 앞으로 경성부와 같이 다시 일제 때 이름으로 고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멋대로 지어 쓰던 지명을 바꾸려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다. 경성 정회(町會)연합회가 동네 이름 고칠 것을 시장(또는 부윤)에게 건의한 데서 그런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우리 동리 이름은 우리말대로 이번에 경성정회연합회에서는 전 일본식 이름을 없애버리고 조선적인 이름으로 고치고자 李重華, 兪億兼 등 각계 권위자 7명의 정명개정위원으로 하여 정명의 유래와 고증 등에 비춰 신중히 연구하여 그 구체안을 얻었는데 그 요점은 8區를 그대로 두고 町은 모두 洞으로 丁目 혹은 通을 街로 고쳐서 시장에게 건의하였는데 신 동명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구명)
通洞(通仁町) 需昌洞(內需町) 諫洞(司諫町) 六曺街(光化門通) 興德洞(明倫町1丁目) 崇敎洞(明倫町2丁目) 養賢洞(明倫町3丁目) 廣禮洞(明倫町4丁目) 漢芝洞(鷹峰町) 立□洞(金湖町) 太平北街(太平通1丁目) 太平南街(太平通2丁目) 南大門內街(南大門通4丁目) 南大門外街(南大門通5丁目) 陽洞(御成町) 禹守洞(吉野町) 桃楮洞(吉野町2丁目) 東子洞(古市町) 車洞(和泉町) 銅峴1街(黃金町1丁目)(乃至5街) 訓練1街(黃金町6丁目) 訓練2街(方和町) 南小門洞(光熙町1丁目) 光熙洞(光熙町2丁目) 五社洞(福音町) 薰館洞(花園町) 大仁洞(櫻井町1丁目) 小仁洞(櫻井町2丁目) 草洞(若草町) 苧洞(永樂町1丁目) 冷□洞(永樂町5丁目) 掌樂洞(明治町1丁目) 石川洞(丹稿町) 山林洞(林町) 曲稿洞(三角町) 茶坊洞(茶屋町) 小公洞(長谷川町) 泥峴洞(泥町1丁目) 乃至5洞(乃至5丁目) 雙林洞(竝木町) 藪坪洞(東西軒町) 治峴洞(西4軒町) 黑井洞(新町) □□□(方和町2丁目) 上口洞(大和町2丁目) 筆洞(大和町3丁目) 南學洞(日之出町) 藝場洞(倭城台町) 鑄字洞(壽町) 會賢洞(旭町1丁目) 長興洞(旭町2丁目) 司畜洞(北米倉町) 倉洞(南米倉町) 典牲洞(三坂通) 月洞(岡崎町) 沙坪洞(三村町) 靑1洞(靑葉町) 靑2洞(靑葉町2丁目) 靑3洞(上同3丁目) 四契洞(京町) 外契洞(榮町) 新1街(元町1丁目) 新2街(上同2丁目) 新3街(同3丁目) 新4街(同4丁目) 桃山洞(岩根町) 兄弟洞(山莊町) 新倉洞(淸水洞) 萬理洞(彌生町) 碑北洞(大島町) 碑南洞(錦町) 母岳洞(峴底洞) 京稿街(竹添町1丁目) 營玉街(竹添町2丁目) 東阿洞(竹添町3丁目) 昭義1街(義州通1丁目) 巡廳街(蓬萊町1丁目) 藥峴洞(蓬萊町2丁目) 萬洞街(蓬萊町3丁目) 萬西洞(蓬萊町4丁目) 阿北洞(北阿峴町) 姑山洞(老姑町) 新德洞(□孔德町) 上水洞(上水德町) 下水洞(下水溢町) 梨院洞(梨樹院町) 西氷洞(西氷庫町) 東氷洞(東氷庫町) 鷺梁洞(鷺梁津町) 大方洞(李大方町)
(<서울신문> 1945년 11월 2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지명 개정을 위한 노력이 6개월 전에도 이렇게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는데, ‘경성부’의 이름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일본 지배체제를 가급적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지켜나가려는 미군정의 의지가 느껴진다. 결국 해방 1주년이 되는 1946년 8월 15일에야 ‘서울’이란 도시 이름이 공식화된다. 제1장 제1조에서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라 선포한 <서울시헌장>이 이날 발표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전우용은 전해준다.
그런데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형민은 이와 관련해 씁쓸한 회고담을 전한다. 광복이 되었으니 왜인들이 제멋대로 갖다 붙인 ‘경성부’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써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슨 이름을 붙일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뿌리치기 어려웠던 것이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하자는 주장이었는데, 김형민은 그 압력을 물리치고 서울로 하자고 고집하여 관철시켰단다. 다소 과장된 회고일 수는 있겠지만 김형민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순 한글’ 이름의 도시가 만들어졌고, 우남정이 헐린 뒤에도 그 이름은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서울은 깊다> 19-20쪽)
전우용의 이 글은 학술논문 아닌 ‘에세이’이고, 나도 ‘에세이’에서는 전거를 밝히는 데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대목에서 김형민의 회고담이 어느 시점에서 어떤 형태로 나온 것인지 밝히지 않은 것은 너무 아쉽다.
지금까지 해방공간의 상황을 살펴본 데 비추어 보아 1946년 8월 시점에서 서울시의 이름을 ‘우남’으로 하자는 얘기를 누가 꺼냈다면 미친 놈 취급을 받았을 것 같다. 이승만이 절대권력을 누리다가 몰락한 뒤에 ‘과장된 회고’ 정도가 아니라 ‘지어낸 얘기’ 같다. 회고담의 출처를 분명히 밝히면 이런 의심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하는 꼴일지 모르겠지만, 아쉬운 것은 분명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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