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재판소 제4호 법정에서 박흥식 등의 선고공판이 열렸다. 2월 26일 기소 당시 알려진 혐의는 8·15 이후 일반시민에게 배급할 포목, 잡화를 화신상회에서 부정매매하여 4백만 원의 폭리를 취득한 포고령위반죄와 비행기회사 청산 정리자금으로 일본육군성에서 받은 5천만 원 중 2천만 원을 횡령하여 소비한 횡령죄였다.


기소 직후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이 미군정 간부와 함께 서울형무소로 쫓아가 하지 사령관의 명령을 빙자해 풀어주었다가 여론이 비등하자 바로 재수감한 일이 있었다. (3월 2일자 일기) 이 어처구니없는 작태에는 사법계에서 좌파의 공격에 몰리던 김용무 법원장조차 “영어마디나 하는 자의 중간 모략으로 군정을 모독시킨” 짓이라고 개탄했다. 박흥식에게는 그 후 장물기장죄와 사기죄가 추가되어 4월 26일 제6회 공판에서 징역 3년과 벌금 2백만 원을 구형받았다.


그런데 5월 3일 선고공판에서 이천상 재판장은 네 가지 혐의에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1) 장물기장처리에 대해서는 조선비행기회사에 대하여 조선군사령관으로부터 받은 1,600만 원 1,200만 원의 소절수는 군부가 회사에 대하여 막대한 손실을 보상하려고 주었다는데, 당시 조선군은 보상할 근거가 없음을 알고 상월 중장이 부정처분한 것을 인식하면서 받았다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 피고는 법정에서 받은 것을 자인하였으나 상월 조선군사령관이 지출함을 당하여 정당히 지출한 것이냐 아니냐는 점은 상월이 일본으로 가고 없어 이를 심증할 수 없어 증거 불충분으로 본다.

 

2) 횡령죄 역시 조선비행기공업회사 증명원에 대한 투자문제 해결로 1,000만 원을 1,050만 원의 소절수로 받아 종업원에게는 주지 않고 조선은행·식산은행 등에 가족·친척·화신 등의 명의로 예금하여 착복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세밀히 조사했으나 이 역시 증거불충분으로 이 사건을 인정치 않으며

 

3) 사기죄에 대해서는 비행기공업회사 주권 보상으로 군부로부터 1주에 25원씩 계산하여 일반주권 48만주 1,200만 원을 받아 이 사실을 주주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과 당시의 주권의 싯가 20원 내외를 불입한 25원씩에 은전적인 태도로 돌려주어 기만적 행위를 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증인심으로 조금도 기만행위가 없었다는 것이 알려졌으며

 

4) 화신 사장으로서 상품 사입을 기탁하여 2만 5,000원을 받아 소비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도 하등 증거가 없다.

 

5) 끝으로 박흥식·박병교 양인에 관한 포고령위반에 대해서는 당시 군정청상무과장이 지시한 바도 있어 일반싯가보다 약 2·3할 싸게 팔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일반 시장물가고 등에 하등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조선일보> 1946년 05월 0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중요한 혐의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묵살되었다. 공산주의국가의 ‘인민재판’처럼 증거도 없이 인권이 침해당하는 일 없이 사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는 교육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받아 왔다. 하지만 1600만 원의 거금을 받은 명백한 사실조차 증인을 일본에서 데려올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는 재판을 고맙게 여기기는 어렵다.

 

전 일본군 사령관을 불러오지 않고는 박흥식이 거금을 받은 사실을 법정에서 입증할 방법이 없었단 말인가? 군정청에게는 맥아더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그의 증언을 확보할 길이 없었단 말인가?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으면 권력자가 원치 않는 판결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확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이번 사건에 있어서는 과거의 친일적 또는 민족반역적 행위 운운은 현하 미군정 하에 있는 본 재판소로서는 침해할 권한도 없을 뿐 아니라 장해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박흥식의 무단 석방으로 여론이 비등할 때 법무부 형사국장 최종석의 담화에서 “일부에서는 박흥식이가 친일파 민족반역자이기 때문에 검거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같으나 오늘의 우리 사법기관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명목으로 검거할 권한이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법 관계자들이 이런 기준을 밝혀야 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론은 민족반역 행위의 처단을 원하고 있었다. 민족반역 행위의 대부분이 포괄될 수 있는 ‘전범’ 재판이 도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북에서도 친일파가 인민재판의 위협 앞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남의 미군정은 친일 행위나 민족반역 행위의 처단을 가로막고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는 여론이 원하는 ‘반민족 행위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법 관계자들이 밝혀야 했던 것이다.

 

65년 전 5월 3일 도쿄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이 개정했다. 맥아더의 1월 19일 특별포고령으로 만들어진 이 재판정은 ‘도쿄전범재판’으로 흔히 불리지만, 도쿄에서만 열린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지배 지역에 12개, 영국 지배 지역에 11개, 중국에 10개, 오스트레일리아에 9개, 미국 점령 지역에 5개, 그리고 프랑스 지배 지역과 필리핀에 1개씩 IMTFE 재판정이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주의 범죄자들을 재판하는 50개 법정이 아시아 지역에서 운영되는 동안 조선에는 그런 법정이 없었고, 미군정은 “친일적 또는 민족반역적 행위”가 사법처리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극동 IMT는 전 해 11월 20일 개정한 뉘른베르크의 국제군사재판정(IMT)의 틀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인도(人道)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가 도입된 데 보태어 도쿄에서는 ‘평화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peace)’가 도입되었다. 극동 IMT의 A, B, C급 전범 구분이 죄의 무게에 따른 것으로 흔히 이해하는데, 사실은 범죄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었다. ‘A급’이라기보다 A 범주는 평화에 대한 범죄, B 범주는 통상적 잔혹행위, C 범주는 인도에 대한 범죄를 다루는 것이었다.

 

법정의 구성방법도 달랐다. 뉘른베르크 IMT가 진정한 ‘국제’ 법정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었던 데 비해 극동 IMT는 관할국이 지배적인 역할을 맡았다. 가장 중요한 도쿄 IMT조차 미국이 기소권을 장악하는 등 지배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천황의 면책, 731부대 제외와 같은 자의적 운영이 가능했다.

 

도쿄 IMT의 파행성은 재판관으로 참여했던 각국 법조인을 비롯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도쿄 재판의 성격은 일본 재건의 방향에 영향을 끼쳤고, 그를 통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의 추이에 영향을 끼쳤으므로 앞으로 계속 살펴볼 것이다. 오늘은 전범 재판이 조선에서만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둔다. 아무리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군국주의의 심판이라는 명분은 IMT의 간판 위에 걸려 있었는데, 조선에는 그 간판조차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극동 IMT에 B, C 범주 전범으로 기소된 5,700명 중에 148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582쪽) 조선인으로 최고 계급인 중장까지 올라갔다가 마닐라 IMT에서 4월 중순 사형 선고를 받은 홍사익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다우어는 장교들에게 포로 학대 범죄를 조선인과 대만인 경비병들에게 뒤집어씌우라고 지시한 1945년 9월 17일자 일본 육군 훈령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위 책 813쪽) 조선인 경비병들은 군대에 끌려갈 때도 국가와 민족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의 죄까지 뒤집어쓰는 억울한 위치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본국, 적어도 그 남반부에서는 전쟁 범죄를 거론도 하지 못하도록 점령군이 가로막고 있던 것이 1946년 5월의 상황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