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제7호 공동성명이 5월 1일 발표되었다. 4월 18일의 5호 성명에 이어 구체적 진행을 보여준 7호 성명에는 협의대상에게 보낼 시문서(試問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협의’의 출발점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4월 22일부터 동 27일까지 소련 수석대표 T. F. 쉬티코프 중장 사회 하에 서울 덕수궁 내에서 개최되어 조선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방침과 공동위원회 제2·3분과에서 기안한 조선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안을 토의하였다.
공동위원회는 조선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방침에 관한 제1분과에서 작성한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에 설문할 심문항목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중요한 설문은 여좌하다.
(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지방행정기구의 조직과 원칙에 관한 건
1) 인민의 권리
2) 앞으로 수립될 임시정부의 일반체제와 성질
3) 중앙정부의 행정 급 입법권 시행기구
4) 지방행정기구
5) 사법기구
6) 임시헌장의 변경 급 수정방법
(나)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강에 관한 건
1) 정치대책
2) 경제대책
3) 교육 급 문화대책
공동성명서 제5호에 표시된 선언서 양식을 인쇄하여 남조선에 있는 민주주의정당과 문화단체의 수속의 편의를 도모하는 바 그 양식용지는 덕수궁에서 제공함. 단 그 용지 사용 여부는 수의로 함. 이미 선언서 서명수속을 완료한 단체는 그 용지에 재차 기입하여 제출할 필요가 없음.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05월 0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만들고자 하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가 완전 독립국가에 이르지 못하는 임시과도정부이기는 하지만, 독립국가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임시과도정부의 구조와 정책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독립국가 정부로 이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립국가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협의대상이 되는 정당과 단체들이 의견을 제출하고 미-소 대표들과 토론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임시과도정부의 수립이 미소공위의 가장 큰 사명이었다. 임시과도정부가 일단 수립된 뒤에도 미소공위가 신탁통치 등 안건을 다루게 되어 있었지만, 일단 수립되기만 하면 임시과도정부가 주도적 입장을 넘겨받을 것이 당연히 예측되는 일이었다.
독립 건국을 바라는 조선인들에게도 연합국의 협조와 후원 속에 건국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순조로운 길이 미소공위에 있었다. 각자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새 국가의 구조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소공위에 의견을 제출해야 했다. 그런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근본 목적은 ‘세계 평화’를 위해 조선에 안정된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조선인의 복리에도 부합하는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민의를 효과적으로 수렴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미소공위의 기능이었다. 협의대상을 정하고 시문서를 배포하는 것이 모두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소공위의 주체인 미-소 대표단은 공식적 목적인 ‘세계 평화’만이 아니라 각자의 국익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을 얻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두 나라의 국익 추구를 어느 정도까지는 큰 피해의식 없이 용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나라의 상호 견제를 통해 그 ‘어느 정도’가 지켜질 수 있다면 회담의 성공이 될 것이었다.
소련은 진주 당시부터 자기네가 챙길 국익의 범위를 분명히 밝혔다.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국가’가 세워져 한반도가 소련 공격을 위한 기지로 이용될 위험이 없게 되기 바란다고 했다. 여기서 ‘우호적인 국가’란 위성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이 아니라는 정도의 넓은 뜻으로 이해된다. 소련은 동유럽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노력을 집중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공산혁명이 진행 중이던 중국에 대해서조차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중국이 ‘우호적인 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에게 ‘우호적인 국가’가 된다는 것은 조선인에게도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인접한 강대국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그 강대국을 공격하는 기지로 누군가에게 활용된다는 것은 돈 주며 시켜도 마다할 일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미소공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원만한 성과가 나오기를 바랐다. 공산정권이 아닌 연합정권이 만들어져도 괜찮았다. 소련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아니면 됐지, 종속적인 나라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대표하는 자본주의 세력이 소련을 압박하는 교두보로 만들지만 않으면 만족할 수 있었다.
미국 대표단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했다. 본국에서 국제 협력을 중시하는 국제주의 노선이 자국 국익을 중시하는 국가주의 노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대공황의 와중에서 출범해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계속된 루스벨트 정권은 국제주의 노선으로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이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은 국제 협력을 그리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막강한 힘이 가치를 발휘하려면 세계가 너무 평화로운 곳이 되지 않는 것이 미국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국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의 하나가 일본 주둔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였고, 주한 미군은 그 휘하에 있었다.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과 아놀드 군정장관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전후하여 그때까지도 미국의 공식 외교노선이던 소련과의 협력정책을 한반도에서 전복시키려고 온갖 무리한 짓을 다했다. 그 무책임한 획책이 1월 하순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하지는 자리를 지켰고 아놀드는 미소공위의 미국 수석대표가 되었다.
국가주의 입장에서는 미소공위를 꼭 성공시킬 필요가 없었다. 국가주의자들은 미국에 우호적인 정도가 아니라 종속적인 정권을 한반도에 만들고 싶었고, 미-소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었다. 미소공위에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을 주장해서 소련의 양보를 받아내면 좋고, 받아내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소련과의 협력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이룰 힘을 미국이 갖고 있으니까. 결국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유엔을 통해 미국이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힘 덕분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에서 좌익을 배제하려 했다. 미소공위에 조선인의 민의가 반영되는 데는 관심도 없고 성의도 없었다. 이북의 협의대상을 친소 집단으로 가정하고 이남 협의대상은 친미 집단만 내놓으려 했다. 민주의원을 만들어 이남의 협의대상을 독점시키려 했으나 통하지 않아 다수의 협의대상을 받아들이게 되자 우익의 비중을 키워주려 획책했다. <조선일보> 5월 7일자 아래 기사는 이 획책의 일단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과도정부 수립에 헌신적 노력을 하고 있는 미소공동위원회 제7호 성명에 의한 시문에 응할 남조선에 있는 단체는 다음의 25단체로 대체 결정된 것 같은데 이 25단체는 미국 측이 제안한 것으로 규문된다.
비상국민회의, 한국독립당 金九, 한국민주당 元世勳,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신한민족당 崔益煥, 조선인민당, 한국농민총연맹 金尙德, 천주교 張勉, 대종교 趙琬九,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朴承浩, 여자국민당 任永信, 국민대회준비회 金俊淵, 독립촉성중앙협의회 李承晩, 국민당 安在鴻, 대한독립촉성국민회 吳夏英, 신한민주당 金朋濬, 대한독립노동총연맹 金山, 기독교남부대회 咸台永, 천도교 吳世昌,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 金奎植, 중앙불교총무원 金法麟, 유도회 鄭寅普, 한국적십자사 白象圭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5개 단체 중 좌익 단체는 민전, 공산당, 신민당, 인민당의 넷뿐이다. 농민단체는 전농 대신 농민총연맹이, 노동단체는 전평 대신 노동총연맹이 들어가 있다. 서중석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80쪽에는 미국 측이 20개 단체의 명부를 미소공위에 제출했는데 그중 좌익은 3개 정당만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 명부에는 민전조차 빠져 있었다. 좌익 단체들은 5호 성명이 나오자마자 즉각 호응한 반면 우익 단체들은 10여 일이 지난 뒤에 하지가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겨우 협의대상 신청을 했는데, 미국 측은 협의대상으로 거의 우익 단체들만 추천을 한 것이다.
우익 연합체인 민주의원과 좌익 연합체인 민전의 시문서 작성에 임하는 태도에서도 차이가 느껴진다. 민전이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직적으로 작업에 착수하는 데 비해 민주의원에서는 산하 단체들을 상대로 의견 제시를 요망한다는 담화를 발표할 뿐이었다. 민주의원의 두 영수 중 김구는 미소공위에 열의가 없고 이승만은 지방에 체류 중이던 상황에서 민주의원이 조그만 활동도 능동적으로 벌이지 못하던 상황을 보는 것 같다.
민주의원에서는 4일 오후 1시 30분 동원 공보부에서 의원 安在洪 공보부장 咸尙勳이 연석하여 기자단과 회견하였는데, 4일 정오까지 민주의원 섭외단 비서처를 경유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 선언서에 서명하고 서류를 제출·완료한 단체는 비상국민회의 산하단체 등을 합하여 무려 70여 단체인데 근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제7호 성명 설문에 관한 시문서가 본원에 정식으로 도착될 것이나, 그 단체 수는 아직 확정적으로 규지할 수 없고 항간에 좌우 양익의 인원비솔 운운은 일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고 아직 문제가 그곳까지 이르지 못하였다고 전제하고 제7호 성명에 대하여 민주의원에서 산하 민주주의정당 급 단체에게 의견제시를 요망한다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본 민주의원에서는 4일 오전 9시 30분부터 동 12시까지 미소공동위원회의 제7호 성명에 나타난 설문에 대하여 신중히 토의하였는데 민주의원의 비상국민회의와 관계된 정당 급 단체는 물론이오 개인도 여기에 관한 중요한 의견을 제시하여 통일적 보조를 취하여 주기 바란다.”
(<조선일보> 1946년 05월 05일자)
민전 상임위원회에서는 임시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공동위원회 제7호 성명서에 의거한 시문에 관한 대책을 결정키 위하여 그 동안 각 전문대책위원회에서 성안된 것을 최종심의할 소위원회를 설치키로 하였는데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대책위원회 李康國 金龍徽 成周寔 李泰鎭
◊ 정치대책소위원회 姜進 李如星 金時榮
◊ 경제대책소위원회 朴文圭 李貞求 尹行重
◊ 문화대책소위원회 金台俊 都相祿 崔應錫 崔成世 李泰俊 咸鳳石
(<서울신문> 1946년 05월 0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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