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조금 넘어 요양원에 가니 방에 누워계셨다. 마치 누구랑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표정에도 움직임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뭔가 생각을 굴리고 계신 것 같았다. 내가 눈에 보이니까 하던 이야기 계속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거신다. 누워 계신 시간이 많은데, 답답하거나 지루한 기색을 보이시는 일이 별로 없다.

"어머니, 오늘은 어제보다도 얼굴이 훤하시네요.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내가 낮에 다녀와서 오늘은 말씀을 다른 날보다도 분명히 하시더라고 했는데 정말이다. 얘기하다가 흥이 없으면 무시해 버리실 때가 많은데, 오늘은 한 마디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응대하신다. "즐거운 일이 있었냐고?"
"네, 아주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요."
"즐거움이란 게 살면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 아니냐?"
"어머니, 즐거움도 만들어내시고, 참 훌륭하십니다."
"그래, 우리 서로 훌륭하게 살자꾸나."

너무너무 귀여우시다. 나도 이제 자연스럽게 나온다. "어머니, 뽀뽀하고 싶어요. 해도 될까요?"
"뭘 하고 싶다고?"
"뽀뽀요. 뺨에 하고 싶어요."
"뽀뽀? 네가 그런 걸 할 줄 아냐?"
"잘 못하지만 열심히 하고 싶어요, 어머니."
오른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왼빰을 대 주신다. 뽀뽀할 때, 자동응답기처럼 나오시는 말씀. "고맙다."

"반야심경 외울까요?" 하니까 분명하게 "그래." 하시고는 내가 합장하는 동안 먼저 외우기 시작하셨다. 앞장서서 외우시는 것은 달포 만에 처음이다. 그러나 절반쯤 가서 실마리를 놓치고는 손으로 토닥토닥 박자만 넣으면서 듣고 계셨다. "노래도 같이 부르고 싶어요, 어머니." 하니까 "그래, 불러봐라." 했지만 노래는 따라 부르지 않으셨다. 며칠 전부터 노래 부르다가 가끔씩 도중에 끊고 가사에 대한 논평을 붙이니까 재미있게 들으신다. "어머니, 이 어머니도 참 고마운 어머니네요. 아기가 잘 자고 있는데도 걱정이 되어 모랫길을 달려오다니." "장막을 걷으라 하고 창문을 열라고 하네요. 닫혀 있던 것을 열어 세상을 바라보고 바람도 느껴보겠답니다. 노래 지은 사람이 어머니랑 취향이 비슷한가봐요."

아버지 일기를 꺼내 펼치지 않은 채로 여쭤봤다. "어머니, 이 아버지 일기 말예요. 이렇게 실로 묶어 놓은 것이 어머니가 묶으신 거죠?" 뜻밖의 분명한 대답이 나오셨다. "오래돼서 생각이 안 난다." 오래된 일이라는 것은 생각나시는 것이다. 바짝 달라붙어 봤다.
"어머니, 어머니가 36년 동안 지키고 계시다가 제가 넘겨받고도 24년이나 되었네요. 60년이나 되었어요, 60년."
"그렇게 오래됐냐?"
"네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주신 것을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씀이 없으시다.
"어머니, 이제 대학 도서관으로 보내는 게 좋겠지요?" 말씀은 계속 없으시지만 무슨 얘기인지는 대강 알아들으시는 것 같다. 내가 계속 말씀드렸다. "가족이 60년 동안 가지고 있었으면 이제 도서관에서 지켜주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 한참 만에 입을 떼셨다. "어느 도서관?"
"이대 도서관이요. 어머니께서 지켜오신 물건을 어머니 몸 담으셨던 학교에서 넘겨받아 주는 것이 좋겠어요." 어머니께서 말씀이 더 없으셨는데,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시는 것 같았다고 적고 싶지만 참는다. 아무튼 반대는 안 하셨으니까, 어머니 뜻으로 기증하는 거라고 내가 우겨도 반대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잠시 후 다시 입을 떼실 때는 뜻밖의 말씀이 나왔다. "생각하면 나도 참 별난 사람이야." 잠깐 움찔했다. 일전에 <해방일기> 1권 머리말 쓰면서 '별난 사람'을 '보통사람'과 대비시켜 안 좋은 뜻으로 썼는데, 하필 그 말이 나오다니. "네? 별나세요? 어떻게 별나신데요?" 여쭙는 것은 아랑곳없이 "나도 참 별난 사람이야~" 노랫가락을 붙이기 시작해서 몇 차례 되풀이하신다.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머니 마음속의 몇 가닥 생각이 그 말에서 합쳐진 것 같았다.

여덟 시가 다 되어 일어서는데, 오늘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으신 것 같다. 그래도 보내는 것이 그리 괴롭지는 않으신 것 같다. 내일은 좀 일찍 와서 귀찮아하실 때까지 얘기 상대를 해드려야겠다.

세종너싱홈에서 지내실 때 주변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꽤 많으셨는데, 이제 완전히 회복되시는 데 따라 대화 욕구도 일어나시는 것 같다. 이 요양원에서는 그만한 조건을 누리지 못하시는데, 익숙해지는 데 따라 이곳에서도 충분한 인간관계를 누리시게 될지? 낮에 아내가 다녀온 후 생각이 나서 성 원장님께 전화를 드려 어머니를 다시 그곳으로 모실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리니 그 가능성만으로도 너무 기뻐하신다. 며칠 관찰하며 잘 생각해 봐야겠다.

* 덧붙이고 싶은 말씀 하나가 생각났다. 내 얼굴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계시다가 문득 장난기를 떠올리시더니, "너 얼굴 좀 깨끗이 씼고 다니려무나." 사흘 면도를 안 했더니 표가 나는 모양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