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청 학무국에서 학술 관련 중요한 조치가 거듭해서 나오고 있다. 그저께(3월 21일)는 고전 편수를 위한 번역과 설치가 있었고, 오늘은 학술용어제정위원회가 열렸다.


잃었던 고전문화를 새롭게 살려 계승하기 위하여 학무국에서는 이번에 번역과를 신설하고 고전의 부흥을 꾀하기로 되었다. 동 과는 21일부터 간판을 내어 걸었는데 주로 고전을 번역하여 편수할 것으로 부문을 조선고전, 동양고전, 서양문헌의 셋으로 나누어 조선고전 부문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우리나라의 귀중한 사기 등을 취급하고 동양고전 부문에서는 유교 불교의 경전 같은 고전을 캐어 낼 것이며 서양문헌 부문에서는 주로 우리가 뒤떨어져 있는 서양의 자연과학에 관한 고전을 번역할 터이다. 고전의 선택은 위의 예와 같이 종교, 역사, 문학, 자연과학의 각 부문에 걸쳐 널리 고전문학의 심오한 경지를 개척하여 현대말로 알기 쉽게 번역하며 널리 보급함으로써 우리 새로운 문화의 기반을 삼으려는 것으로 근일에 착수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25일자)


38년의 장기간에 걸친 왜족문화의 침투로 말미암아 우리의 일상용어와 학술용어 전반에 걸쳐 끈질기게 숨어들은 왜말 냄새를 일소하고자 학무국에서는 이번에 학술용어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전혀 우리 국어로는 확정되지 못한 학술용어를 제정하고 이와 아울러 사회용어 중 왜말 냄새나는 말을 추려내어 교정하기로 되었다. 동 위원회에서는 23일 오후 2시부터 군정청 제 1회의실에서 첫 총회를 열고 심의를 개시하였는데, 각 과별로 20부문을 나누어 각 과에 그 권위자 8명 내지 12명씩 도합 2백여 명의 전문위원을 임명하여 연구케 하고 그 결과를 토의 결정할 터인데 일상용어에 관한 것은 제 20부문의 언어과학과를 두고 사회생활 용어를 담당키로 되어 있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25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민족의 당면 대과제 ‘독립’을 학문 분야에서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들이다. 미군정의 그 동안 어지러운 행각을 놓고 보면 이런 요긴한 조치를 지금이라도 취한다는 것이 뜻밖으로 느껴질 정도다. 어떤 사람들의 어떤 작용을 거쳐 이런 조치가 나오게 되었는지 구체적 과정은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조선인 학자들의 ‘학문적 독립’을 향한 의지가 어떤 방법으로든 관철된 결과로 이해한다.


뜻있는 학자들이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에 모여 ‘조선학술원’을 결성하였다고 한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14일자 기사 일부를 옮겨놓는다.


유지 학도와 기술자들은 전 조선의 각계 전문학도와 지도적 기술자들을 대동집결하여 16일 경성에서 조선학술원을 창설하였다. 그 당면한 임무는 첫째로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조선 경제체제 재건과 국토계획에 관한 근본적 검토를 가하고, 둘째로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핵심문제에 대한 과학적 토의를 거듭함으로써 신 정부의 요청에 대한 국책적 건설안을 준비하고, 셋째로는 장래의 학술체제와 고차적인 사회연구태세를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학술원에는 이학부(5분과) 공학부(6분과) 농림학부(4분과) 수산학부 의학부 약학부 기술총본부(7문) 경제법률학부 역사철학부(7분과) 문학언어학부(5분과)등 10부가 설치되었고 (1)학술연구 급 조사 (2)자원조사, 국토계획, 기타에 대한 창의적 건의안 (3)연구발표 (4)학술강연 급 강좌 (5)기관잡지 간행 급 내외문헌 출판 (6)외국학계와의 문화적 교섭 등 구체적인 사업을 해나가기로 된 것이다. (...)

학술원위원장 白南雲은 다음과 같이 그 포부를 말하였다.

“조선학술원의 취지는 근본적으로 부과된 사명이 학술연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국가 건설기를 당하여 상아탑에 칩거하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할 뿐 아니라 실천과 유리된 반동적 결과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민족으로서는 1인이라도 신국가의 건설적 위업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학술원으로서는 각 방면의 전문학도와 지도적 기술자들을 집결하여 우선 당면한 특수한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대동적으로 매진하는 중이다. 평소부터 학술방면에 종사하시는 인사 제위는 이 점을 양찰하시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시는 동시에 허심탄회하게 고견을 피력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끝으로 한 가지 언명할 것은 조선학술원은 외부의 여하한 정치단체와도 하등 관련을 맺지 않고 불편부당의 엄숙한 태도를 견지하고 가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개인으로서도 본원의 학술적 사명을 달성키에 적응한 내용충실을 기도하는 동시에 전기한 당면임무를 수행하기에 헌신적으로 노력할 뿐이고 한동안 세간의 정치적 단체와는 하등의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는 점을 언명하여 둔다. 학술관계 이외의 인사 제위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많이 후원해 주심을 간원하는 바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엄밀히 볼 때 8월 16일의 모임은 ‘준비모임’의 성격이었을 것 같다. 조선학술원의 정식 결성은 그 규장이 심의된 9월 3일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 바로 다음날 상당 범위의 연구자들이 모여 막연하게라도 신 국가 건설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의지를 모은 것은 적어도 상징적 의미는 분명한 일이었다.


일본의 패망에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체제 붕괴’의 충격이 함께 들어 있었다. 개혁 의지를 가진 운동가와 일반 서민들에게는 해방의 기쁨이 앞서는 일이었겠지만, 체제의 핵심 구성 분자들에게는 붕괴의 충격이 더 클 수 있었다.


학문 연구자들은 일반인에 비해 체제에 대한 소속감이 더 강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해방 후 즉각 적극적 의지를 집단적으로 표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비판적 고찰에 중점을 두는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도 조선학술원 참여가 대세였다.


1930년대 초반에 일어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제국을 완전히 장악한 군국주의 체제가 학술계에도 억압을 가하고 있던 사정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인은 ‘해방’이라 하면 흔히 이민족 지배로부터의 해방만 생각한다. 그런데 1945년의 해방은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의 조선학술원 운동에서는 이 측면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식민지체제 하에서도 조선의 학술계는 나름대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 성장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 도약을 바라보게 된 것이 1935년경의 일이었다. 일본을 통해 들여온 근대학문과 민족문화의 본질을 추구하는 전통학문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조선 학술’의 체계화와 조직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자 학술특집호에 실린 여러 글에서 그 추향을 이해할 수 있다.


백남운, “학술기간부대의 양성 - 중앙 아카데미 창설”

백락준, “학술조선의 총본영 - 조선문고를 세우자”

안창호, “조선학회(조선학원)의 설립과 농촌, 도제문고 발행”

이춘호, “실지 응용, 상품화를 목표로 하는 이화학연구소의 설립”

유억겸, “전조선체육연맹 - 조사 연구 지도의 적극화”

이헌구, “과학박물관 - 명칭의 통일”

고희동, “아쉬운 대로 회화(繪畵)연구소”

이묘묵, “종합도서관을 건설하자”

오긍선, “연구 창작을 위한 학자아파트”

송석하, “민속의 진작 - 조사연구기관을 설치”

이종륜, “사회위생학연구소 설립”

현제명, “약진 예원(藝苑)의 상징 종합예술학원”

문석오, “연구와 응용을 겸한 공예학원 창립”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는 이 특집호가 들어 있지 않아서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지식산업사 펴냄) 22쪽 주 4에서 목록을 옮겨놓는다.)


1935년 무렵은 정약용 서거 백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민족주의 역사관이 당당한 모습을 펼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식민주의 역사관에 대항하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정약용의 넓고 깊고 진취적인 학문을 통해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위에서 조선의 학술을 민족 차원에서 조직하고자 하는 염원과 의지를 위에 열거한 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염원과 의지가 근 십년간 군국주의에 억눌려 있다가 해방과 함께 풀려나온 것이었다. 조선학술원 운동에는 ‘민족 해방’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동기도 크게 작용했지만, ‘학문 해방’의 의미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학문이 정치에 억압받던 군국주의 시대를 벗어나 학문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추구하겠다는 의지였다.


1945년 조선학술원 운동 참여자들이 1952년 설립된 대한민국 학술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학술원과 과학원으로 향해 움직여가는 길은 서로 달랐고, 그것이 이후 남한 학술원과 북한 과학원의 성격 차이를 가져왔다.


북쪽에서는 백남운, 홍명희, 김두봉 등 학술의 조직운동에 주동적인 인물들이 국가 건설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이 조직운동이 1949년 말 설립된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를 거쳐 과학원 설립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학술 연구와 교육이 국가 기능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반면 남쪽에서는 학술 조직운동이 국가 건설 과정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그 결과 학술원이 상징적 의미만을 가진, 국가 기능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분단 건국 이후 학문의 자유가 많은 억압을 받아 온 것은 남한도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학문이 국가 기능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남한에서는 학문이 실용적 기준으로만 평가받은 반면 북한에서는 이념 차원에까지 학문의 역할이 있었다. 그 득실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학문적 독립’이라는 기준에서는 남한의 학문 풍토에 아쉬움이 많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