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망국을 아주 간단하게 보면 1910년 8월 하순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1905년 11월의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데서 이미 실질적 망국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보다 더 넓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이란 이름을 버릴 때, 5백여 년간 한국인의 국가로 존재해 온 조선 왕국의 실체가 이미 사라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 망국'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벗어나야 할 하나의 통념이 있다. 식민지가 되기 전의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었다는 통념이다. 조선 왕조는 존재 기간의 대부분을 통해 명나라,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조공관계를 청산한 후 외교권을 잃기까지의 불과 십년 기간 동안에도 조선 왕국은 중국과의 조공관계보다 더 심한 외세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형식적 독립만을 갖추고 있던 이 기간을 "잃어버린 국권"의 표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 의미가 없는 일이다.

조공관계가 근대 국제법의 기준으로 '독립'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국제법의 기준만으로 그 기준이 세워지기 이전의 역사적 현상을 재단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한민족의 국가는 고대 이래 중국의 국가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독립성이 비교적 강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 때부터 명나라와 안정된 조공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의 기본 틀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교체한 뒤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5백여 년간 계속된 이 관계 속에서 조선은 중국에 대해 약간의 종속성을 가졌지만, 그 종속성은 1945년 이후 한국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에 비해 미약한 것이었다. 중국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몇 년과 임오군란(1882) 이후의 몇 년에 불과했다.

"만국공법"이란 이름으로 근대 국제법이 들어오기 이전,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국제 질서의 기반이 된 것은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였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전해져 온 '천명(天命)' 관념을 중심으로 한 이 체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로부터 각 지역의 군주가 정치적 권위를 위임받는다는 유기론적 세계관이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체제가 계속 확장된 결과 7세기 이후로는 동아시아 거의 전역이 편입되어 있었다.

만국공법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달리 유기론적 세계관의 천하체제에는 완전한 '독립'의 관념이 없었다. 지상 최고의 권위자인 천자조차 천명에 종속된 존재였다. 천자가 천명을 저버릴 때는 혁명의 대상이 되었다. 한민족 사회는 7세기에 이 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후로 역사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이 체제 안에서 허용되는 최대한의 독립성을 누려 왔다.

천하체제의 종주국인 중국 왕조는 조공국의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공국의 왕조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민족 국가의 왕조 교체가 중국의 보호가 끊어질 때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의 종주국 당나라가 멸망할 때 고려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고, 고려의 종주국 원나라가 망할 때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큰 부담을 무릅쓰고 출병했으며, 개항기에 청나라가 조선과의 관계에 집착한 이유의 상당 부분도 이 역할에 입각한 것이었다.

천하체제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았고,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 후 대한제국으로의 전환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시도가 성과를 거두기 위한 조건이 극히 열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왕조와 식민지 시대 사이의 과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1897-1910)의 위상과 정체성을 낮추고 줄여서 보는 내 관점에 불만을 가지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 이번 작업에서 대한제국을 지키려 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음미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화를 피하는 데 '실패한 시도'라는 기본 성격을 민족 자존심 때문에 감출 수는 없다.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의 연장이라고는 하지만, 국가의 성격이 정상적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조선의 망국에 두 개 단계를 나는 본다. 첫 단계인 천하체제의 붕괴는 조선 왕국이나 한민족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문명권 전체가 함께 겪은 일이다. 이 단계에서 한민족의 국가는 짧게 봐서 5백년, 길게 보면 1천년 이상 자리 잡고 살아온 생태 환경을 잃어버렸다. 다음 단계는 새로운 생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좌절이었다. 적응을 위한 조건이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피한 좌절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내가 한국사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편향된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사의 큰 흐름을 살피는 데 수십 년 동안 노력을 모아 온 만큼 한국사의 내재적 흐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한편 한국사 전공자들이 외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기 힘든 면도 생각할 수 있다. 나로서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열심히 설명할 수밖에 없다.

망국의 두 단계 중 천하체제의 붕괴에 거시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권 상실 이전에 문명의 단절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 경제, 문화, 정치의 모든 질서가 넓고 깊은,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방면의 빠른 변화를 효과적으로 조율해 나가지 못하는 사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의 한국 사회는 이 적응에 실패했고, 그 결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실패의 원인을 한국인들은 당시부터 따져 왔다. 지도층의 무능, 일본의 야욕, 매국노 집단의 배신 등이 많이 지목되어 왔다.

실패를 반성하는 자세 자체에 반성할 만한 하나의 추세가 있다.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그 원인만 아니었다면 실패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낙관적 성향이다. 특정한 원인만 없었다면 성공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관점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잘못된 일을 반성함에도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는 특별히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반성에도 자아 비판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성향이 작용한다. 반성에 인색한 자세는 실패를 극복하지 못한 표시이기도 하다. 실패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과거의 허물을 부끄러워는 할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투철한 반성은 실패 극복의 조건이면서 또한 극복의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사회는 100년 전의 실패를 극복했는가? 새로운 환경에 제대로 적응했는가? 과거의 시련을 담담한 눈길로 되돌아볼 만큼 편안한 위치에 와 있는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부터 생각할 문제다. 문명 전환을 맞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어느 정도의 평형 상태에 도달해 있는지를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나는 생각한다. 상당 기간의 혼란과 격동을 겪고 나서도 현재의 위상과 향후의 진로에 대해 안정된 시각을 구성원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는 환경에 적응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19세기 말 한국 사회에 주어졌던 "새 환경 적응"이라는 과제가 아직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과제의 성격조차 파악하기 힘들던 당시의 충격에 비교하면 과제를 직시하면서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설 수 있을 만큼은 자세를 갖춰 왔다고 본다.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세계적 환경은 지금도 계속해서 변해 가고 있다. 그런데도 환경 변화를 외면하는 냉전의 논리와 개발 지상주의 논리가 이 사회의 정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의 이런 문제들 역시 19세기 말 이래의 "새 환경 적응" 과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데 큰 이유가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망국 100년> 작업의 필요성을 떠올린 것은 재작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통해서였다. 역사의 전개를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의 외길로만 보는 '뉴라이트 역사관'은 역사의 정합성(整合性)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역사 담론이 못 되는 한낱 프로퍼갠더일 뿐이다. 이런 프로퍼갠더가 횡행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근대화' 과제의 의미가 이 사회에서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문제를 보여준다.

동아시아 전통문명으로부터 근대적 세계문명으로의 전환이 한국근대사의 주축이었다고 보는 뉴라이트 논객들의 관점에 나는 동의한다. 민족 주체성에 집착하는 관점보다 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는 방향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근대적 세계문명의 본질이라고 내세우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우상숭배에는 따를 수 없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근대화'의 의미가 19세기 말의 새로운 환경이던 제국주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을 뜻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국 100년>을 내걸고 두 달 가까이 배경 조건만을 살펴 왔다. 조선의 망국이 문명 전환의 배경에 좌우된 면을 밝히는 것을 내 역할로 보고 문명 전환의 의미를 제시해 놓은 것이다. 이제 조선 말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내 입장이 연구자가 아니라 비평자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실 것을 독자들에게 당부드린다. 한국사 연구자들이 밝혀 놓은 사실들을 놓고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음미할 만한 점들을 짚어내는 것이 내 할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