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마구 휘두른다. 그런데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손에 잡고 휘두르는 것 같다.
결렬을 선언한 이유로 일방적 기자회견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내놓았다.
(1) 북한이 제재의 전면 해제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2)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비핵화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영변 이외의 핵시설 장소를 거론했더니 놀라는 눈치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북한의 리용호(와 최선희)는 한밤중에 기자회견을 열어 제재의 전면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북한이 단계적 진행을 일관되게 제안해 온 정황을 보더라도 합당한 주장이다.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비핵화가 너무 화끈한 것이라서 어이를 상실하는 바람에 "그 수준으로 벗으라면 제재를 전면 해제해 줘야 하는 거 아뇨?" 하는 반응이 나온 것 아닐까 하는 언론계의 추측이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다면 (1)은 말꼬리 잡은 것에 불과하다. 진짜 문제는 (2)에 있다.
미국이 지금 단계에서 원하는 비핵화의 수준이 무엇인지 준비회담을 통해 북한에 충분히 알려주었고 북한에서 대충 받아들일 만하다고 수긍했기에 하노이회담을 열기에 이른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상식적 관측을 뒤집고 결렬에 이른 데는 어느 한 쪽의 몰상식한 태도가 있었을 것 같다. 어느 쪽일까?
양측 모두 대화의 불씨는 살려두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므로 결렬의 책임을 따지며 상대방을 비난하는 폭로는 어느 정도 절제할 것으로 보인다. 한 차례씩의 기자회견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트럼프 쪽이 책임 떠넘기는 데 더 급급한 모습이다. 특히 "놀라는 눈치"까지 들먹이는 것은 "우리가 팩트를 들이대니까 감추던 것을 들켜 당황하더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매우 적극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눈길을 끈다. 그에 비해 북한 측은 제재의 전면 해제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핵심 내용의 해명에 그쳤다.
트럼프가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것은 결렬 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옵션이 있었으나 하지 않기로 했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의 주장처럼 북한이 제재의 즉각 전면 해제를 요구했다면 어떤 옵션도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준비 과정을 통해 옵션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옵션을 모두 버릴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트럼프가 판을 뒤집을 동기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흥정의 달인"을 자처하는 그가 나름대로 흥정의 기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 더 쓰시지~ 아쉬운 건 그쪽 아니요?" 흥정을 위해 '벼랑끝 전술'을 그가 즐겨 쓰는 것은 제1차 회담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대목에서도 나타난 일이다.
또 하나는 코언 사태 때문이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노벨평화상까지 쳐다보는 이 회담의 성과가 코언 사태에 파묻히는 것이 아까웠을 것이다. 북한은 코가 꿰어 있으니 세계의 주목을 끄는 파란을 일으키며 더 좋은 타이밍을 기다려도 득만 있지 실은 없을 것 아닌가?
과연 북한은 코가 꿰어 있는 것일까? 북한은 제재 해제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지금까지 제재를 주도해(좀 약한 표현?) 온 것이 미국인 만큼 해제도 미국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당장 결렬에 대한 반응도 판을 깨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개방-비핵화 노력이 트럼프 한 사람의 결단만 바라보며 진행되어 온 것일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플랜-B, 플랜-C가 있을 것이다. 플랜-A를 바로 버리지는 않겠지만 이제부터 뭔가 보이기 시작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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