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점에서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조선의 3-1운동을 이끌었던 33인의 민족대표의 비폭력주의는 그 위상이 전혀 다르다. 민족대표의 경우에는 우민관(愚民觀)을 가지고 오로지 세계 공론에 호소하기 위해 비폭력의 수단을 선택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쉽게도 간디와 같은 깊은 철학은 없었다. (와다 하루키 외,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158쪽)
3-1운동을 한국현대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내 관점이다. 현대적 민족의식이 여기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에는 외국과의 접촉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민족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물고기에 대한 물과 같았다. 너무나 당연한 조건이어서 행동의 준거로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왜란이나 호란 같은 비상시에만 일시적으로 표출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외국과의 접촉이 계속 늘어나다가, 1910년 이후로는 외국(일본)의 존재가 조선인의 생활조건을 전면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상황은 일시적 비상사태가 아니라 항구적 정상상태가 된다.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세울 시대적 필요에 대한 민족사회의 총체적 반응이 3-1운동이었다.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민족의식은 이 때 나타난 것이었다.
위 글에서 조경달(趙景達)의 간디와 3-1운동 비교는 적절한 것이 아니다. 시기는 비슷하지만, 인도인은 그 시점까지 수십 년간 영국인의 압제를 겪으며 숱한 대응책을 모색한 끝에 가장 효과적인 저항방법을 선택하는 단계였다. 반면 조선인은 왕조시대의 형편없는 말기적 증상을 오래도록 겪은 끝에 일본인의 전면적 지배를 받기 시작한지 겨우 십년, 저항을 시작하면서 저항의 주체를 확인하는 단계였다.
내년에 백주년을 맞아 3-1운동이 사회의 이목을 많이 사로잡을 것은 분명한데, 과연 운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성숙해질 계기가 될까? 지난 10년간 한국현대사 정리 작업을 해 온 결과, 3-1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한국현대사 이해의 절반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세대는 3-1운동의 의미에 대해 윗세대로부터 배운 내용에 크게 보탠 것이 없다. 물론 관련된 연구는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일반인의 통념을 바꾸거나 키워준 것이 없다. 20세기를 지배한 가치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3-운동의 의미가 앞으로 잘 살아나게 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백주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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