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몽양심포지엄 시작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곱상한 부인이 앞 자리에 앉아있었다. 알고 보니 우사 선생의 손녀 김수옥 여사였다. 명함을 받았는데 내게는 드릴 명함이 없어서 민망했다. 이튿날 메일을 보내 명함 드리지 못한 데 미안한 마음을 알리면서 아버지 일기에 우사 선생이 나온 장면을 적어 보냈다.

 

​1950년 7월 27일

​6-25 직전에 무슨 마음이 내키어 용출 군에게 부탁하여 단파 아닌 것을 하나 사둔 것이 이즈음은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아침저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를 듣고 또 자수자들의 전향성명도 방송으로 들을 수 있다. 모두들 원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에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다는 김효석의 그 지나치게 비굴하고 치사스러운 주책덩어리의 내용에 비기어 안재홍, 조소앙 씨 등 소위 중립파들의 방송이 오히려 김효석보다는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서 듣기 좋았다. 이는 그 개인의 인끔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래서 중립이란 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또 평소에 모씨는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만을 쓴다는 풍설이 파다하였으니, A에게 아첨 잘하는 사람은 세상이 뒤바뀌면 또 B에게 아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김규식 박사의 방송은 그 어조조차 침통하였고, 또 그가 모씨를 못마땅해하는 말들은 일부러 어떤 편에 듣기 좋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불만의 폭발인 것 같아서 듣는이로 하여금 감개무량하게 하였다.

오랜만에 다시 적으면서 생각이 일어난다. ​'중립'이란 "무엇이다" 하는 긍정적(positive) 표현이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 하는 부정적(negative) 표현이다. 부정적 표현을 어째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일까.

 

에릭 홉스봄은 20세기에 "극단의 시대"란 이름을 붙였다. 그 극단의 시대를 가장 극단스럽게 겪은 곳의 하나가 우리나라다. 그러니 극단을 피하는 중립이 귀할 수도 있겠다.

 

한 걸음 더 생각해 보면, 당시의 '중립'은 극좌와 극우를 피하는 길이었다. 극좌와 극우에 "극"이 붙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정치란 많은 사람들의 지지에 성패가 달린 것인데,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나는 길이 어떻게 득세할 수 있었는가? 점령군의 위세에 의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단건국의 근본 원인이 민족사회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었다고 하는 '외인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외압이란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에서 외압이 특별히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새로운 외압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통시대에도 외압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내면화된 시스템의 존재 때문에 예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학을 비롯한 중요한 지적 성취가 제도권 밖의 학자들의 손으로 이뤄진 것이 이 시스템을 통한 압력을 덜 받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우리 사회에는 해방공간 당시의 외압이 내면화된 채 그대로 남아있어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근년에 키워 왔다. 양심적인 성품의 지식인들도 제도를 통해 주입된 관념에 묶여 시야가 현실에 이르지 못하고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전에 가르침을 얻던 좋은 글들도 서양식, 계몽주의적 가치체계에 너무 얽매여 우리 사회의 현실과 겉도는 게 아닌가 회의감이 요즘 들어서는 일어난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게 된 필요조건 하나가 일찍 제도적 조건을 벗어난 것 같다. 대학에 계속 남아 이런저런 아카데믹 크레딧에 매달려 있었다면 학술제도의 구조적 제약에 관한 생각을 이런 식으로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생각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진 것인지 객관적 평가를 받을 길은 없지만, 한 지식인으로서 나는 이만한 생각이라도 떠올리게 된 것을 다행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근 30년 제도권을 벗어나 있으면서 어두운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생활이 궁핍한 거야 일찌감치 安貧의 자세를 갖췄지만, 제자 키우지 못하는 것이 갈수록 안타까웠고, 싫은 일 못하는 내 딜레탕티즘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도 근년 들어서는 내 생각을 적극 받아들이는 후진들도 나타나 주고, 한 지식인으로서의 독립성에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홀로 선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당 태종이 위징에게 소원을 말하라 함에 “신으로 하여금 충신(忠臣)이 아닌 양신(良臣)이 되도록 해 주소서.”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발 좀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다. 고달프게 따질 필요 없도록.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태종이 물으니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보좌한 것이 양신이고 걸주(桀紂)의 폭정을 간하다가 죽임당한 것이 충신이라 답했다고 한다. 상상 속의 태평성대에나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딱한 사람이다. 완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는 고달픈 자세를 면할 길이 없다.

 

나는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한 사람이다. 위징 이야기를 꺼냈지만 감히 거기다 나 자신을 비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립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웃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다 보니 혼자 서 있게 되었고, 그런 바에야 독립성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애썼을 뿐이다. 

 

퇴각로에서는 더더욱 혼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남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같은 생각 가진 이들을 잘 챙겨야겠다. 신영복 선생 글 옮기는 일에 마음이 끌린 것도 그 까닭이다. 나와 있는 좋은 이야기들, 앞으로는 열심히 살펴서 잘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