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오늘 미사 제1독서에서 이 대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요나 예언서 3장 1~10절이라 한다.

 

회개의 표현이 아무것도 맛보지 않고 모두 자루옷을 걸치는 등 생활방식의 절제로 나타난 것이 우선 놀라웠다. 지금 인류문명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의 반격"이다. 산업혁명 후 자행되어 온 자연의 학대를 회개하려면 바로 이런 표현이 필요한 것 아닌가.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임금의 선포에서 보듯, 자기들의 회개를 하느님이 진노를 거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회개를 하고 그 표현으로 생활방식을 바꾼다 해서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재앙을 절대 피할 수 없다는 인식 위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절박한 위기의식인가.

 

투표를 잘하기만 하면, 소수의 악당들을 배제하기만 하면 좋은 세상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린 지 오래다. 소수 악당들의 문제가 아니라 선량한 다수 인민의 생활방식이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이 재앙은 합리적 선택만으로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실한 반성 위에서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니네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절박한 위기의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을까? 학문으로는 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종교에 끌리게 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