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일기의 1950년 9월 14일자에는 인민군 점령 상태의 동네 의료서비스 상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의사들에 대한 인상부터 적어놓았다.

 

전쟁이 나고 또 한가지 곤란한 문제는 의사이다. 이 몇해 동안 대어놓고 우리 가족의 병을 보아주시던 숭인병원 의사 김성식 씨는 진즉 가족을 데리고 어디론지 가버리셨다. 온후한 성격에 독실한 크리스천이시어서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그 풍모가 환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아늑한 안도감을 갖게 하던 선생은 전쟁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우리 마을에서 진즉 가족을 데라고 남하한 분은 아마 김의사 한분뿐일 것이다. 들리는 말에 한민당은 서울이 점령되기 전에 일찍 손을 써서 당원들을 모두 피란케 하였다더니, 그럼 김선생은 한민당원이었다는 풍문이 사실이었을까? 5-30선거 때 조병옥 박사의 편을 들어서 맹활약한 사실은 알고 있지만, 평소에 보면 그 책상머리에 항상 김구 선생의 사진을 꽂아두었기에 기연가미연가했더니.

 

그 시절 병의원 이름에 지역명을 붙이거나 뜻 좋은 글자로 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의사 성명을 내거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버지가 김 의사 책상머리에 누구 사진이 붙어 있는지 눈여겨 본 것처럼, 동네 의사는 지역 유지로서 공동체의 관심을 모으는 인물이었다. 같은 내과의사를 찾더라도 감기 같은 잔병에는 친절하다는 평판을 가진 의사에게 가고, 문제가 심각하다 싶으면 의사 성질은 고약해도 시설이 좋거나 "실력"이 좋다는 병원으로 가는 게 어릴 적 풍속이었다.

 

그 풍속이 많이 바뀌었다. 크고 시설 좋은 병원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해진 만큼 의사의 성품을 살피는 추세는 줄어들었다. 의료의 기술적 측면이 부각되는 것 같다. 멋진 영어단어가 의사 성명보다 병의원 간판에 더 많이 오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의료의 기술보다 의사-환자 간의 신뢰관계를 더 중시하게 되는 것은 노티의 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과학사 중심으로 문명사를 공부하면서 현대세계의 기술제일주의에 불안감을 느끼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법적 책임을 넘어 환자인 나를 아껴주는 마음으로 치료의 효과를 추구하는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기고 싶다.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눌 의사가 애써준 것이라면 그 결과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학생 때부터 "형님"으로 모시던 박승우 선생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난 후로 치과 가기가 싫어졌다. 치과 가기를 싫어하게 되는 바람에 입 안에 문제를 많이 키우게 되었고, 몇 해 전부터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빨을 마음놓고 맡길 수 있는 데가 있었으면 하던 참에 눈치를 보니 가까이 지내는 홍세화 선생이(박승우 선생과 동기동창인 "형님"이다.) 치과 신세를 꽤 지는 것 같기에 물어보니 자신있게 성산동(연남동인지도?)의 현 선생을 추천해 준다. 1년 남짓 다니면서 공사도 좀 했는데 썩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현 선생이 먼 곳으로 떠나게 되어 치과를 새로 찾게 되었는데, 현 선생이 한 곳을 강력하게 추천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덕동의 아크로치과를 찾아갔는데,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 기술을 너무 앞세우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약한 것이, 첫 진찰비가 10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몇 곳 치과에서 사진 찍고 진찰하고 본인부담이 2-3만원 정도였는데, 추천한 현 선생 낯을 보지 않았다면 진찰비 갖고 시비를 걸었을 거다. 더 고약한 것은, 그곳에서 권하는 시술을 받을 경우 진찰비 냈던 것은 빼준다는 말이었다. 이 양반, 손쉬운 다단계를 하지, 왜 힘든 치과의사를 하나?

 

그런 참에 고교 동창 김병준 군이 제법 가까운 곳에서(봉일천) 개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년에 여의도에 개업해서 잘 나가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10년 전부터 옮겨와 있었던 것을 강철구 교수에게 들었다. (내가 동창들과 너무 교류 없이 지낸다. 연전에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문상 온 동기동창이 강 교수 하나뿐이었다. 강 교수는 동창이라서가 아니라 동업자로서 소식을 들은 것이었고.)

 

김병준 군, 찾아가 보니, 근 30년 만에 보는데도 그대로다. 소시쩍부터 절제력이 뛰어난 데다가 운동을 좋아해서 꾸준히 해온 친구니까. 골프와 테니스를 계속 친다는데, 골프는 초년에 싱글 핸디 경지에 올라 골프 치는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학교 시절에는 나도 그의 바둑 수준을 부러워했다. 중학생 때 입단대회 본선에 올랐으니 당시의 아마추어 정상급이었다.

 

특별히 가까이 어울렸던 친구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꽤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꽤 아는 사이다. 견적도 받아보지 않은 채로 그 친구에게 이빨을 맡기기로 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