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Saturday, Dec 31, 2016 12:23:59 AM
From: "316262" <dmsgml8@hanmail.net>
To: <mindle98@empas.com>
Subject: 바보만들기 번역을 더 매끄럽게 해주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광주에 근무하는 초등교사 김xx입니다.

 

먼저 바보만들기를 출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인상깊고 좋은 책입니다.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긴 처음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그럴까 생각하고 읽어주십시오.

 

저는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약 8년 전에 전국국어교사모임 연수에서 들었습니다. 강사님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남한산초 김영주 선생님이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꼭 읽어야 할 책'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아마 그 강의를 들은 130여명의 전국 초등교사들 중 연수가 끝나고 

그 책을 산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함께 연수를 들은 제 동료교사들도 책을 샀지만 그 해에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내용이 불편한 게 아니라 읽기가 불편해서 무슨말인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성실한 번역이다 보니 우리말로 바꿨을 때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단 점 이해합니다.

보통 이런 성실한 번역은 교육과정 해설서나 철학자 책이 많은데 대학교재로 많이 보기때문에 시간을 들여서라도 봅니다.

그러나 교사가 된 후 시간을 투자해서 '우리말인데 해석해야 하는 책'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방학을 맞아 기어이 다 읽고보니 정말, 아주, 매우, 좋은 책이라서 안타까움이 큽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66쪽 마지막 문단

" 폴 굿먼이 30년 전에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아이들을 부자연스럽게 자라도록 강요하는 데에 우리 주위에 일상화되어 있는 비극의 중요한 이유가 있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학교제도에 조금이라도 개혁을 가하려 한다면 그 제도의 부자연스러운 면을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문단을 바꿔보겠습니다.

" 폴 굿먼은 30년 전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비극의 중요한 원인은 우리가 아이들을 부자연스럽게 자라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고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학교제도를 조금이라도 개혁하고 싶다면 제도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면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부분을 합하고 부정형을 단순화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좀 더 명확해지지 않았습니까?

정말 몇 번이나 덮을 뻔 했지만 소리내서 읽으며 다 읽었습니다.

개토는 어려운 책을 써서 저를 바보만들 사람은 아니니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많은 교사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의 내용을 봐서는 벌써 10쇄는 넘겼어야 할 책이 이번에 다시 샀는데(잃어버려서) 아직도 3쇄여서 안타깝습니다.

제가 좋은 책은 사서 선물하기 때문에 말씀드리지만 꿈의학교 헬레네랑에는 나온지 5년된 책이 진작 10쇄를 넘겼습니다.

그만큼 늘고 있는 혁신학교 교사들이 제도와 학교 개혁을 알고싶어합니다.

내년 동학년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읽기 힘든 책'을 준다는 오해를 할까 걱정입니다.

 

부디 힘드시겠지만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며칠 전 민들레출판사 현병호 씨에게 불쑥 전화를 받았다. 20여 년 전 내가 번역한 <바보만들기>의 번역을 바꿀 필요를 느껴서 새 번역자에게 맡기려 하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민들레에 대해서나 현병호 씨에 대해서나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서 알았다고, 잘 판단해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하니 잘 판단해서 하시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메일을 써 보냈다. "번역을 바꿀 필요"라 했는데, 새 번역자에게 맡겨야 할 필요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윤문을 새로 할 필요 정도를 넘어 어떤 필요가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랬더니 그 필요를 입증할 증거로 어느 독자에게 받았다는 위 메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메일 보낸 사람의 이름 외에는 그대로 옮겨놓았다.

 

<바보만들기> 번역을 잘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뜻을 잘 옮겼을 뿐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한 점이 놀랍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칭찬이 입에 발린 말씀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 번역 이후 출판계에서 특급 번역자로 인정받게 된 사실이 증명한다.

 

독자 중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는 줄 안다. 내 문체를 모든 사람이 좋아하리라는 환상 같은 건 내게 없다. 하지만 내 번역문이 어렵다고 역자의 죄를 성토하는 것은 좀 극단적인 사례 같다. 초등 교사라는데 아이들이 걱정된다.

 

그분이 가르치는 아이들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은 출판사 걱정이다. 20여 년간 개토의 뜻을 전달해 온 번역을 폐기하고 새 번역자에게 맡겨야겠다는 결정을 한 독자의 요구에만 따라 내렸을 리는 없다.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란다"는 그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기존 번역의 폐기와 새 번역의 위촉까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번역에 분명한 결함이 없다면 독자 취향에 맞추는 윤문은 출판사에서 하는 일 아닌가.

 

현병호 씨는 위 메일을 첨부한 답장에 이렇게도 썼다.

 

페리스코프에 실린 선생님 칼럼이나 <뉴라이트 비판> 같은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 글을 좋아하는 저로서도 
<바보 만들기>를 다시 읽어보니 번역이 많이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초창기 번역서여서 그런 면도 있지 싶습니다. 교열이나 윤문으로 보완 작업을 하기에는 
단행본 편집자가 따로 없는 현재로서는 여력이 없기도 하고 
마침 저희랑 오랫동안 작업해온 번역자가 시간이 날 때여서 얘기했더니 
아이 학교 문제로 고민하던 차여서 의욕을 보여 재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진행한 제 불찰을 용서해주시길 빕니다. 

 

<바보만들기>는 번역에 공력을 충분히 쏟은 책이다. 현 씨는 "번역이 많이 거칠다"고 하는데, 저자의 글이 원래 거칠다. 저자의 분노를 보여주는 그 거친 맛을 잘 살린 점을 애초에 번역을 맡겼던 편집자들이 각별히 치하해 주기도 했다. 현 씨가 원문을 읽어봤는지 모르겠다.

 

더 기막힌 것은 "단행본 편집자가 따로 없는" 형편인데 마침 맞춤한 번역자가 있어서 재번역을 맡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편집-교열을 외주 주지 않고 내부 인력만으로 처리하는 출판사가 대한민국에 몇 군데나 되는지 모르겠다.

 

민들레출판사는 대안교육 발전에 공헌하고자 애쓰는 출판사다.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서 내게 강연을 부탁할 때마다 강연료에 관계없이 응해 왔다. 그런데 뜻있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독선에 사로잡혀 ("내가 하는 일은 착한 뜻에서 나온 거니까 양해해 줄 거야.") 엉뚱한 행태를 보이는 일이 종종 있다. 

 

이번엔 너무했다. 번역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이고, '번역가'는 내 정체성의 큰 부분이다. 그런데 한 독자의 편지를 근거로 내 번역을 폐기하려 하다니, 홍준표가 서청원을 놓고 "함께 정치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심정이 이해된다.

 

현 씨의 답장을 받아본 뒤 이렇게 적어 보냈다.

 

​문체에 대한 독자들의 취향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죠. 나는 상당 범위 독자들의 취향에 맞출 수 있는 필자로 널리 평가받아 온 필자입니다. 문체를 조정해 달라는 귀사의 부탁을 받았다면 귀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조정할 여지도 있었겠죠. 그러나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시해 주신 독자 편지에서 요구하는 것도 (그 요구가 타당한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재번역이 아니라 윤문이라고 내게는 보입니다. 댠행본 편집자가 따로 없어서 교열이나 윤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번역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은 황당합니다. 많은 출판사에서 편집 업무의 상당 부분을 외주로 처리하는 관행을 모르시는가요? 아니면 그런 관행에 반대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내 번역을 폐기하려는 귀사의 방침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견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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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