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이 중앙일보-JTBC 회장직을 벗어난다는 소식 앞에 그 친구와의 인연과 관계를 한 차례 돌아보게 된다.
15년간 얼굴 안 보고 지내던 그 친구를 다시 보고 지내게 된 것은 작년 여름 중국에서 지낼 때 꿈에 몇 차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연락해서 찾아가기로 한 다음, 찾아가기 전에 보낸 메일에서 그 꿈 이야기 한 것을 옮겨놓는다. 개인적 메일이지만 그 친구도 이제 자유를 찾는 것 같아서 깨놔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워낙 오랜만에 찾아가면서, 왜 만나보려 하는지보다 왜 그 긴 세월 동안 만나보지 못하고 지냈는지부터 설명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언론-문화 분야에서 활동하며 지내다 보니 자네에게 내 쪽에서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웠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이해하겠지.
최근 들어 은퇴를 결심했어. 앞으로 아주 아무 일도 않고 지낼 생각은 물론 아니지만, 완전히 개인으로만 활동하기로. <프레시안> 기고도 그만두기로 한 것은 물론, 출판을 위한 글쓰기도 하지 않기로 했어.
은퇴를 결심하고 나니까 자네 찾아보기 어렵던 기제가 무의식중에 풀린 걸까? 몇 주일 전 중국에 머물고 있을 때 자네가 꿈에 나타나는 거야. 세 차례나. 그래서 자네를 찾아볼 생각이 든 거지.
첫 번째 꿈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냥 "아니, 뜬금없이 왜 이 친구가 나타났지?" 잠이 깬 후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바로 이튿날 또 나타났는데, 꿈의 끝자락이 어렴풋이 기억나. 뭔가 자네 아랫사람들이 자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일을 놓고 자네가 나를 돌아보며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는 식의 냉소적인 표현을 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릿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는 정도의 기억.
그리고 며칠 후에 세 번째 꿈을 꾸었는데, 그 끝자락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이 남아 있어. 우리 둘이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뭔가 구경도 가고, 같이 놀고, 꽤 긴 시간을(10여 시간?) 보낸 뒤 헤어져서 내가 자네 집무실에서 나오려다가, 지하 주차장에 놓아둔 차 생각이 나서 돌아서서 "주차증 좀..." 얘기를 꺼내는데 자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 오늘 찾아온 건 공무가 아니잖아?" 하는 거야. 내가 좋아서 온 거니까 주차비 해결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 한편으로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 자네 짖궂은 모습을 되찾은 것 같은 흐뭇함을 느꼈지.
학생 시절의 연분은 차치하고, 교수직을 떠난 뒤 10년간 중앙일보에 객원으로 걸치고 있으면서 자주 보고 지냈으니 그에게 손님(client) 대접을 받은 셈인데, 중앙일보 떠난 후 15년간 연락 없이 지낸 것은 내게 인간적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다 불쑥 나타난 사람을 스스럼없이 맞아주는 그에게 살짝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아니, 그에게라기보다 그로 하여금, 나로 하여금 세월에 관계없이 서로를 편하게 대하도록 해주는 인연에 감동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후로 한두 달에 한 번씩 그에게 들러 차 한 잔 놓고 이야기 나누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지난 주 금요일에 서울 나갈 일이 있어 그 길에 들를까 하고 며칠 전(화요일)에 메일을 보냈더니 그 날은 곤란하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신상에 변화? 이뭥미? 바로 답장을 보냈다.
"신상에 변화"?
태연히 얘기하는 걸 보면 궂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걱정은 않겠네만...
설마... 설마... 정치는 아니겠지?
(...)
제발... 제발... 정치만 아니기를 빌겠네.
내가 그 친구를 다시 보며 지내게 된 것을 안 주변사람들이 그 친구 대권의 꿈이 있어 보이더냐고 묻곤 했다. 그런 질문 받을 때 나는 좀 어리둥절해진다. 15년 전에 갖고 있던 생각을 지금도 그대로 갖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날 때도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 쪽으로는 이야기가 나올 틈도 없다.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권력 쳐다보지 않고도 할일이 충분히 많은 친구로 나는 본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도 불쑥 "신상에 변화" 얘기가 나오니 놀라서 "설마... 설마..." 소리가 나온 거다. 이튿날(수요일) 다시 메일을 보내 "어제 서둘러 보낸 반응에 미안한 생각도 들고 부끄러운 마음도 드네." 하고 사과했다. 그러자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수 있을 때 연락할께요." 하는 응답이 왔다.
그리고는 어젯밤 회장직 사퇴를 알게 되었다. 그의 속내는커녕 사정도 잘 모르지만, 오래된 친구로서 일단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차례 결산 아니겠는가. 누린 것도 많지만 짐도 많았던 친구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살아온 친구다. 친구의 행복을 바라는 wishful thinking 일지 모르지만, 이 친구가 의무방어전 종료를 선언하고 이제는 자기 가치관을 앞세우는 인생으로 접어드는 변화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할 무렵 하늘을 찌르는 그의 의욕에 내가 놀라서 "야, 너 이 일을 평생의 일거리로 생각하는구나?" 하는데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물론이지!" 한 일이 있다. 몇 주일 전 잡담 중 그 생각이 나서 얘기를 하니 "그랬었나?" 하고 빙긋이 웃었다. 23년 전 자신의 업(業)을 향해 달려들 때의 사명감을 이제 졸업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내 wishful thinking 은 그의 행복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내 소망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자기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일개 지식인의 입장에 서서 사회를 위해 할 일을 찾아 나선다면 큰 공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와의 우정을 오래도록 알뜰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군자(君子)의 경지로 잘 나아가기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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