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이튿날 오후 1시경 군정청을 예방한 김구가 군정청 출입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첫 국내 기자회견에서 그의 발언 중에는 뜻밖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金九, 同副主席 金奎植 이하 요인 4명과 隨員 등 15명은 23일에 귀국하였거니와 고국의 第1夜를 보낸 일행은 24일 역시 허다한 來客으로 바빴다.
入京 제2일인 24일 오전 중에는 정식으로 미주둔군 최고지휘관과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을 각각 방문하는 등 多忙한 일정으로 오전과 오후를 보내었는데 특히 오후 1시반에는 군정청 출입기자단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試한 바 당분간 현하정세를 신중히 관망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문) 3천만 동포가 한가지로 선생과 요인 일행의 귀국을 학수고대했으나 着京하시는 시간을 몰라 비행장에까지 출영도 못해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입경 第1夜를 보내시고 다망하신 제2일을 맞이하셨는데 소감을 말씀해 주시면?
(답) 피차에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것은 유감으로 생각할 뿐이다.
(문) 그간 국내정세는 자못 다단한 중에도 시급한 것은 정치의 통일전선을 획득하는 것인데 주석 선생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아나 그 통일전선 결성에 대한 포부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오늘은 시간관계로 말을 못하겠다. 李박사 역시 그에 대한 방침이 계실 줄 알지만 나에게 李박사 이상의 수완이 있다고는 신빙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나는 제군이 아는 바와 같이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모두 30년간 해외에 나가 있었던 만큼 현하정세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오늘은 다만 국사를 위해서 노력해 오는 신문기자 제군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이 시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문)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문제는
(답) 통일전선을 결성하는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안다.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문) 그러나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하지 않은가?
(답) 하여간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문제인 만큼 경솔히 말할 수는 없겠다. 전민족에게 관한 것인 만큼 신중히 해야만 하겠다.
(문) 국내정세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하시렵니까?
(답) 눈과 귀가 있으니까 이 두가지 기관을 통하면 될 것이다.
(문) 정계의 요인은 언제 어떻게 만나 보시려는지요?
(답) 그렇게 급히 할 것은 없다.
(문) 맥아더장군과는 어떠한 연락이 있었나요?
(답) 현하 조선에 군정이 있는 이상 완전한 우리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다만 우리의 일행이 온 만큼 해외임시정부도 입국한 것이요, 이것을 외국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문) 인민공화국과 군정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
(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해서는?
(답) 그 역시 말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니까.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
회견 내용 중 두 군데에 밑줄을 쳤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닿기 전까지 김구가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생각과 다른 것이다.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사정에 어둡다”고 했다. 국내에 있지 않았으니 국내사정 인식에 한계가 물론 있었겠지만, 국내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왔다. 미군 OSS부대와 협조해 광복군 병력을 국내에 진입시키는 노력을 해방 당일까지 하고 있었다. 9월 13일 발표한 14개조 임정 당면정책은 충분한 파악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석 김구가 도착 이튿날 임정의 상황 파악에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겸손이나 신중 차원의 이야기일 수 없다. 임정의 기능과 역할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이야기였다.
불량분자 배제를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임정, 특히 김구의 도덕적 권위는 ‘항일정신’에 있었다. 친일파 제재는 해방 당시 한국인의 가장 큰 합의점이었지만, 그 범위와 방법을 결정해 나가는 데 많은 현실적 문제를 앞두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임정과 김구의 도덕적 권위였고, 그것이 김구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친일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넓게 잡고 그 제재를 가혹하게 하는 것도, 반대로 너무 좁게 잡고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었고, 어느 정도로 하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합리적인 범위에서 적당한 기준을 임정과 김구가 정해주는 것이 국민적 합의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일은 우선 엄격한 태도를 보이다가 서서히 적정선까지 풀어주는 것이 상식이다. 권위의 존재를 일단 분명히 한 다음 권위의 실현 과정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도착하자마자 그 권위를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연말 이후의 극단적 반탁운동을 김구의 정치적 자살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그의 정치적 자살이 귀국 직후부터 시작된 사실을 이 대목에서 읽는다. 친일파 처단은 좌익의 구호가 되는데, 임정과 김구가 친일파 문제에 합리적 범위에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면 좌익이 그 구호를 써먹을 여지가 없었다. 김구는 친일파 문제를 너무 쉽게 풀어줌으로써 임정의 정치적 자산을 잃어버리고 좌우 대립의 극단화를 유발하고 말았다.
친일파 처단을 건국 후로 미룬다는 것은 이승만의 지론이었다. 그 지론에 따라 건국 후에 반민특위를 만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안다. 그런 결과가 나올 조건은 건국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 조건이 형성되어 가는 방향에 김구는 귀국 이튿날 동의한 것이다.
도착한 날 저녁 이승만과 만났을 때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승만이 주로 떠들고 김구가 듣고 있었으리라는 사실과 함께 몇 가지 내용은 짐작이 간다. 좌익의 의도가 나쁘고 힘이 세니 이제 일본 대신 좌익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그러니 미군과 대립하면 안 되고, 자기가 미군과의 좋은 사이를 주선해줄 수 있다는 권유. 그리고 좌익과의 대결을 앞둔 상황에서 친일파 처단을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의견.
김구는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30여 년만의 귀국이 인민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당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의 목소리가 그 귀에 매우 크게 들렸던 것 같다.
'해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30] 1945. 12. 3 / 5천리 길을 걸어서 돌아온 독립동맹 (0) | 2017.10.21 |
---|---|
안-7. 1945. 11. 29 / "적대적 공생관계"가 시작되었다. (0) | 2017.10.20 |
[Re.28] 1945. 11. 23 / 임시정부 환국 첫날밤 (0) | 2017.10.17 |
[Re.27] 1945. 11. 18 / 토지개혁 과제가 절실했던 이유 (4) | 2017.10.11 |
안-6. 1945. 11. 12 / 투쟁보다 포용, 선명성보다 유연성을 (0) | 2017.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