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 그저께(27일) 김구 선생을 만나셨죠. 김구 선생께서 국민당의 선생님, 한민당의 송진우 선생, 인민당의 여운형 선생, 인공의 허헌 선생, 네 분 국내 지도자를 차례로 만나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선생님은 24일에도 찾아가 잠깐 인사드렸지만, 그저께는 단독으로 모시고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로 그리워해 온 분과 회포를 충분히 푸셨는지요.


안재홍 : 백범 선생과 이야기 나눈 것은 백여 일 전 해방의 기쁨에 이어 내 생애 두 번째로 기쁜 일입니다.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그분의 용기와 지혜가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 왔는데, 막상 뵈니 과연 생각이 깊고 마음이 넓은 분이시군요. 이런 지도자가 계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복입니다.


그러나 그저께 뵌 것을 “회포를 푼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나는 국민당 위원장 자격으로 초대를 받아 당원 동지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지도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그분을 뵌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회포를 풀 기회도 앞으로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번 회담에서는 그분께 도움이 될 상황 설명을 드리기에 바빴습니다.


김기협 : 선생님은 여운형 선생을 높이 평가해 건준 부위원장으로 그분을 도왔고, 이승만 박사의 영도력에 큰 기대를 가지고 독촉 중심의 민족통일전선을 위해 국민당을 해산할 용의까지 밝혔습니다. 김구 선생을 받드는 자세는 말할 나위도 없고요. 보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욕심 없고 겸손함을 칭송하기도 하지만, 노선과 성향이 서로 다른 분들을 두루 받드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안재홍 : 내가 좀 바보라서 이 분 저 분 모두 우러러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나는 더욱더 바보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을 너무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일본의 압제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든 문제였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빈곤 문제. 일본의 착취 때문에 더 심하게 느껴진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압제가 사라진다고 해서 저절로 풀릴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의 압제가 다른 문제들을 가리고 있었던 셈이지요. 수많은 문제들을 이제부터 우리 손으로 해결하고 극복해 가야 합니다. 해방은 이 문제들을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 작업에 우리가 나설 출발점을 만들어준 기회일 뿐입니다.


몽양 선생은 몽양 선생대로, 이 박사는 이 박사대로, 그리고 백범 선생은 백범 선생대로 큰 능력과 장점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것이 모두 어울려 잘 발휘되어야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들에 비교할 수 없이 무능한 사람이지만, 그분들에게 국민의 여망을 알려드리며 힘껏 도와드리는 것을 내 몫으로 압니다. 국민당 당원 동지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앞세우는 것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세 분 모두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기도 합니다.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맞게 되어 있죠. 기대가 큰 만큼 무슨 약점이라도 있을까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면이 있습니다. 나도 그분들이 인간인 이상 나름대로 약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 국민의 기대 앞에서 자기 약점을 충분히 극복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들의 능력과 장점을 최대한 잘 인식할 수 있기 바랍니다.


김기협 :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에 비해 국민당의 영입보강론이 유보적인 지지라서 임정 분들이 선생님을 꺼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회담 뒤 선생님이 중앙신문 기자에게 “김구 선생은 시종 열심히 보고를 청취하였을 뿐으로 그에 대한 의사발표는 별로 없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김구 선생도 불만을 느끼셨기에 말씀이 적었던 것 아닌가요?


안재홍 : 백범 선생은 이제 막 귀국해서 국내 사정을 파악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몽양도 고하(송진우)도 긍인(허헌)도 나도 각자의 관점에서 상황을 설명해 드리는 것이 그저께 회담의 목적이었지요. 이 단계에서는 설령 그분에게 어떤 복안이 있다 하더라도 상황을 먼저 충분히 파악하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민당의 절대 지지와 비교해서 내가 생각하는 임정의 보강 필요에 관해 주로 말씀드렸습니다. ‘절대 지지’가 지지의 뜻을 강하게 표현한 것뿐이라면 좋지만, 글자 그대로 임정을 ‘절대화’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임정을 고립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말씀드렸죠. 그러니 한민당의 지지를 받아들이시더라도 한민당의 입장이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선생님께서 지도해 주시면 좋겠다고 권해드리기도 했습니다.


한민당의 독단적 성향이 갈수록 걱정됩니다. 고하에게 그렇게 간곡히 권했는데도 건준을 외면했죠. 인공 수립은 내가 누구보다 반대한 일인데, 바로 고하 같은 사람들이 건준에 참여했어야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인공도 쓸데없는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는 있지만, 아낄 만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 한민당이 임정을 진심으로 지지해서가 아니라 인공과 사회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절대 지지’를 내세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런 말씀들을 백범 선생께서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계셨습니다. 간간이 짤막한 말씀이나 표정에서 그분 생각을 짐작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해도 그것을 서둘러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신 뒤에 중요한 말씀을 스스로 분명하게 해주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기협 : 여 선생도 송 선생도 선생님과 같이 김구 선생의 적극적인 말씀이 별로 없었다고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허 선생은 “전국적으로 지방조직까지 완료했다는 것은 훌륭한 성과라고 찬양해 주셨다.”느니, “국외국내에서 서로 해방을 위해 싸워온 우리가 굳게 제휴하여 나아가자고 말씀하였다.”느니, “전폭적으로 협력해나가자고 자못 열렬하게 부탁하셨다.”느니 김구 선생이 인공에 적극 협력할 뜻을 보였다고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이상하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제 임정 기자회견에서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의 인공 입각을 부정하는 발표를 했더군요. 회담 기사를 보고 경교장에서 허 선생을 불러 따졌는데 태도가 시원찮으니 입각 부정으로 대응한 모양입니다.


안재홍 : 안타까운 일입니다. 긍인이 참 깨끗하고 착한 사람인데, 생각이 너무 외골수예요.


인공 수립을 앞두고 내가 건준을 떠날 때, 부위원장 자리를 긍인이 넘겨받아 줬기 때문에 기대가 컸어요. 나는 무능해서 견디지 못하고 떠나지만, 긍인은 좌익 인사들에게 영향력이 큰 사람이니 건준이 너무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잘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앞장서서 건준과 인공을 극단으로 끌고 갈 줄이야...


"천하의 걱정을 앞장서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을 뒷전에서 기뻐하는 것, 그것이 선비"라는 송나라 때 범중엄(范仲淹)의 말을 나는 늘 생각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앞뒷면이 늘 있는 것이니, 아무리 기쁜 일에도 걱정거리가 따르게 되어 있으며 그 걱정을 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해방이라는 이 큰 기쁨이 자칫하면 이 민족에게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소심익익(小心翼翼)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도리입니다.


어떤 좋은 이념이라 하더라도 실천하는 길에서 인간적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를 받드는 사람도 자본주의를 받드는 사람도 공유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대동단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십 년간 억압받아 온 이 민족이 우선 제 발로 선 뒤라야 평등이든 자유든 마음껏 추구할 수 있다는 도리입니다. 민족국가들이 부단히 경쟁을 벌이는 이 세상에서 민족국가를 제대로 세워놓지 못하고는 제대로 된 자유와 평등을 온 백성이 두루 누릴 길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민족의 앞길이 막연한 상황에서는 서로 다른 이념은 접어놓고 공유하는 도리를 앞세워야 합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를 최대한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당장 중요한 일입니다. 긍인처럼 자기 길만 옳다고 여겨 신뢰를 함부로 해치는 짓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공산주의 실현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한민당의 극단적 인공 배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인공의 행적이 그런 빌미를 열심히 만들어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김기협 : 선생님 세상 떠나신 후에 나온 말로 ‘적대적 공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북의 분단국가들이 상호 적대관계를 핑계로 극단적 독재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죠. 1945년 상황에서도 극좌와 극우 사이의 관계를 ‘적대적 공생’으로 볼 만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안재홍 : ‘적대적 공생’! 내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신뢰 파괴를 목표로 하는 전략이 그런 데서 나올 수 있죠.


지금 인민의 대다수는 ‘민족’이라는 ‘대아(大我)’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대다수 인민의 뜻에 따라 민족국가를 세워 독립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민족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집단을 더 중시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산당에는 혁명의 영광에 도취된 영웅주의자들이 있고 한민당에는 기득권에 집착하는 수구파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민족의 대의를 등질만큼 ‘소아(小我)’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극좌와 극우도 있지요.


극좌건 극우건 민족보다도 더 큰 ‘대아’를 내세우기는 합니다. 전 세계적 노동계급 해방. 인간의 정체성을 노동자로 세운다는 것, 좋은 얘기입니다. 전 세계적 자본 질서 확립. 이것도 대다수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념의 실현에 앞서 필요한 기본과제가 지금의 현실 속에서는 민족의 독립입니다. 이 과제를 외면하면서 각자의 이상을 앞세우는 것은 지나친 책략이 아니면 지나친 우둔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밤낮으로 전술과 전략만 논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다 완성해 놨다고 생각해서인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한민당 일각에도 권모술수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일파로 몰릴 사람들이 자기네 곤경을 면하기 위해 민족국가 건설이 어려운 쪽으로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올바른 사상이 아니라 돈과 주먹, 현실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기 바란다는 점에서 그들 사이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인공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말 적대적 공생관계가 되어 왔습니다. 9월 8일 인공을 극렬히 비난하는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가 나왔을 때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나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인공이 부서를 만들고 말도 안 되는 ‘조각’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보니 그 대립을 통해 한민당은 군정청의 환심을 사고 친일파를 결속시켰으며, 공산당은 좌익 속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시작된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