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 선생님이 이끄는 국민당에서 며칠 전 성명서로 ‘해당(解黨)’ 용의를 밝혔습니다. “민족전선의 전면적 완전 통일정당의 결성이 진취된다면”이란 조건이기는 하지만, 국민당처럼 큰 정당이 해당 용의를 밝힌다는 데서 결연한 의지를 느낍니다. 정당 난립을 걱정하는 시민들도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운형 선생을 위원장으로 인민당이 결성되었지요. 해방 당일부터 건준을 두 분이 함께 이끌던 것이 석 달도 안 된 일입니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인공 수립을 앞두고 건준을 떠나 국민당을 이끌어 왔고, 여 선생은 건준과 인공을 계속 대표해 오다가 이제 정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건준에서 두 분 선생님은 깊은 신뢰를 나눴고, 선생님이 건준을 떠나면서도 그 신뢰는 변함없다고 하셨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 선생이 이끄는 좌익정당 인민당에 대해 우익정당 국민당 지도자로서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지요?
안재홍 : 세간에서는 좌익과 우익을 가리기에 바쁘지만, 여 선생과 나 사이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습니다. 설령 취향의 차이가 조금 있더라도 막중한 건국 대업 앞에서는 그 차이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 선생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내가 말하는 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말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을 좇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 선생과 나만이 아니라 지금 이 나라의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해방’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본인의 억압 대신 조선인의 억압을 받는다고 해방이 됩니까? 일본인을 몰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억압체제의 철폐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인권을 받드는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를 충실히 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적용해야 합니다.
모두 같은 마음인데도 이런저런 오해 때문에 힘을 제대로 합치기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좌익과 우익 사이의 불신이죠. 초년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해 온 여 선생은 좌익에서 성망이 있는 분이고, 나는 신간회와 물산장려 운동 등을 우익 인사들과 함께 하면서 꽤 많은 신뢰를 나눠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건준을 함께 할 때 좌우익을 둘이 분담해서 건준 참여를 설득하기로 한 것이었죠.
지금은 자주 만나 서로 확인하지는 않지만 그 역할 분담은 끝없이 계속되는 일입니다. 전에는 건준 안에서 하던 일을 이제 그 밖에서 하게 된 것일 뿐이죠. 사소한 이해관계나 오해 때문에 민족의 대의를 등지는 사람이 없도록 살피는 것이 여 선생과 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건준의 이름으로든, 인민당과 국민당의 이름으로든.
김기협 : 지금 인민당 만드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여 선생을 지도자로 모셔온 이들이죠. 그들이 해방 전부터 ‘건국동맹’이란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도 여 선생과 뜻을 함께 해 왔는데, 왜 건국동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나요?
안재홍 : 그런 조직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가입했을 텐데, 난 몰랐어요. 나는 여 선생과 의기투합하는 줄 알았는데, 내 짝사랑이었나?
해방 전 몇 해 동안 여 선생과 자주 만나며 거리낌 없이 흉금을 털어놓고 지냈어요. 그분이 내게 그런 일을 감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아마 해방 후 활동을 하려니까 주변 분들이 작은 모임 있었던 것을 좀 과대포장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분도 그런 일에는 좀 대범한 편이라서...
김기협 : 선생님께서는 인민당에 있는 어느 분 못지않게 여 선생의 마음을 잘 아는 분입니다. 인민당을 통해 여 선생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안재홍 : 아까도 말했듯이 좌익의 설득입니다. 민족 대의를 등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설득이지요.
좌익 사상에는 민족을 소홀히 할 요소가 있습니다. 계급관계를 극단적으로 중시해서 민족, 가족 등 다른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사례를 각국 공산주의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죠.
여 선생과 나는 그 관점을 아주 틀린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시의성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의 용어를 써서, 지금은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중시되는 상황입니다. 민족주의의 표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당면의 지상과제이고, 계급 문제는 일단 최소한의 조치만 취해 놓은 다음 서서히 극복해 나갈 장기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시 그들의 용어로, 지금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김기협 : 선생님의 ‘신민족주의’ 담론이 바로 민족주의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기 위한 노력이군요. 기존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요?
안재홍 : 내게 민족주의의 의미를 깊이 일깨워준 단재 선생께서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말씀했죠. 외람되지만 나는 이것이 식민지 상태 민족주의의 역사관이고, 독립민족의 민족주의는 이와 달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년 전 출옥 후 대외활동을 아예 없애다시피 줄여버리고 역사 공부에 매달려 지냈습니다. 중일전쟁의 양상을 보며 일본의 패망을 필지(必至)의 일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패망하면 민족이 독립할 텐데, 그때를 위해 민족주의 사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단재 선생의 민족주의는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관계만을 본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전체 인류 사이의 관계가 없습니다. 지배민족인 일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독립이 되면 우리 민족이 전체 인류, 다른 모든 민족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투쟁만이 아니라 협조의 관계, 경쟁의 관계도 맺게 됩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다양한 대외관계 속에서 민족의 입장을 적절히 세우기 위해 역사를 더 넓게, 그리고 더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기협 : 독립민족의 민족주의가 식민지시대보다 포용성과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로 해방 시점에서는 어땠을지요. 당시 민족정기 수립의 실패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쉬워하면서 무엇보다 친일파에 대한 단호한 처단이 안 된 사실을 통탄합니다. 그 시점에서는 포용성과 유연성보다 추상같은 민족주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안재홍 : 그렇게들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실패한다면 투쟁성과 선명성의 부족이 아니라 포용성과 유연성의 부족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흑백론에는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만을 구분하는 흑백론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양심적인 일본인과 비양심적인 조선인에게 어떤 자리가 주어집니까? 매국적 친일파까지 우리 민족이라고 끌어안으면서 선량한 일본인까지 적이라고 박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친일파를 어느 범위로 규정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큰 문제입니다. 표 나게 심한 친일 행위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수십 년 지속되는 식민지 상태에서 나름대로 선량한 자세를 지켜온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통치에 협조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고급 직종에 종사한 사람들,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이 애매한 문제 때문에 불신이 생깁니다. 좌익에서는 친일파를 넓게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요. 교육 수준과 재산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최대한 배제하면 진정한 인민 주권의 낙토가 앞당겨 이뤄질 것으로 믿으니까요. 이로 인해 유산계층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갖게 됩니다. 좌익이 주도권을 쥐면 죄 없는 사람들까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몇몇 선배, 동지들을 포함해 식자층의 많은 사람들이 한민당에 몰리는 것도 이 의구심 때문입니다. 원칙은 국민당의 것이 옳지만 현실에 대처하는 힘이 한민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덕분에 한민당은 군정청과의 유착관계에 더 힘을 가지게 되고, 좌익은 좌익대로 불안감과 적개심을 더욱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김구 주석 이하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목마르게 기다려 온 것도 이 까닭입니다. 민족주의의 최고 권위인 임정과 김 주석이 민족주의의 표준, 친일파 처리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주면 불필요한 불신을 제거하고 적대감의 악순환을 막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임정과 김 주석의 권위를 빌리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되기 바랍니다. 교육과 재산을 많이 누린 사람들은 적극적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식민통치의 혜택을 누린 사실을 인정하고 특권을 양보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겠지요. 또, 구체적 친일 행위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충분히 반성하고 민족사회를 위해 봉사할 자세를 보인다면 용납할 수 있겠지요. 과거의 행적보다 현재의 자세를 중시하며 화합의 폭을 최대한 늘리는 길, 이것이 여 선생과 내가 함께 찾는 길이고, 내 ‘신민족주의’도 여기에 보탬이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 선생님 말씀 고맙습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으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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