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자 <해방일보>에 김태준의 회견기사가 실렸다. <조선가요집성>(1934), <청구영언>(1939), <고려가사>(1939) 등 뛰어난 업적을 낸 국문학자 김태준(1905~1949)은 경성제대 강사로 있다가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11월 연안으로 탈출, 항일운동에 참가했다가 이제 막 귀국한 것이었다. 후에 남로당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지리산 유격전에 연루, 체포되어 1949년 11월 총살당했다. 학술계와 문화계에서는 걸출한 소장 학자인 그를 살리기 위해 이례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태준의 회견을 통해 독립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입국한 독립동맹은 중경 임정 다음으로 중요한 해외 독립운동이었지만 역사가 짧아서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식민지시대의 해외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은 가장 적당한 장소였다.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할 거대한 교민사회가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침략에 함께 저항하는 입장이었다. 상당한 규모의 교민사회가 있던 러시아나 미국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무관심한 것과 대비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정치적 사정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대표 격인 상해-중경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지만 그 대가로 좌익 방면의 발전이 어려웠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대결 상황에서는 공산주의자는커녕 웬만한 사회주의자도 임정 참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공 합작이 명목상으로라도 자리 잡은 상황에서야 임정에도 좌익의 참여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임정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밀착관계, 그리고 중국 국-공 간의 실질적 대결 상태로 인해 중국에서 한국인의 독립운동 역량이 임정으로 결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임정이 수렴하지 못한 운동 역량이 모이는 제2의 초점이 중국 공산당 방면에 형성되었다. 1941년 초 북중국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로 결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이 만들어졌다. 1938년 이래 김원봉이 조직하고 키워온 조선의용대도 1942년 봄 쪼개져 일부는 임정 휘하의 광복군에 편입되고 일부는 독립동맹에 합류했다.
독립동맹의 간판 격 영도자였던 김두봉(1989~1961?)의 거취가 임정과 독립동맹 사이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시경의 수제자로 꼽힌 한글한자 김두봉은 임정 내부의 야당 위치를 지키던 사람이었다. 김규식, 조소앙, 김원봉 등과 보조를 함께 한 일이 많았다. 그런 그가 1942년 초 중경을 떠나 연안으로 향했다. 임정의 포용력에 한계를 느끼고 임정 밖의 활동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김두봉의 이탈을 당시의 임정은 ‘배반’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있었을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관용적인 태도였다. 이것은 김두봉의 사상과 인격에 대한 존중과 함께 임정 외의 독립운동에도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임정 내에 많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독립동맹의 활동 내용을 아직 세밀히 살피지 못했지만, 김두봉 같은 진중한 영도자의 존재가 극단적 노선을 삼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독립동맹이 활동한 북중국(화북) 지역은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많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어서 교민들도 일본군을 배경으로 진출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독립운동은 지하활동과 유격활동의 양상으로, 임정에 비해 현실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중국의 교민 현황에 대해 임정 재정부장 조완구는 12월 9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 있는 우리 교민이 약 400만이 있다. 그중 약 300만이 山海關 이외 즉 東三省에 있는데 間島에 있는 100만 교민은 오랫동안 있어서 거기에서 토지소유권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바 아마 이것은 소수민족으로서 해결될 줄 믿는다. 그리고 그 외의 교민들은 日軍의 제1선 공작을 담당하였고 또 거기에 협력하여 왔으니 중국 정부로서는 결국 放逐하게 될 줄 압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09일)
이 이야기는 며칠 전 북경 지역 교민들이 중국군에게 포로로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관련해 나온 것 같다.
[北平1日發國際] 第11戰區 政治部主任 周 少將은 北平地區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용에 관하여 一日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第11戰區司令部는 北平地區에 거주하는 조선인 2만의 수용을 개시하였다. 조선인 측에서는 '우리는 중국의 우호국민이 아니냐'라는 항의를 제출하였는데 본부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점령 후 華北에서 일본인과 협력하였던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3일)
해방 전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농토를 찾아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특히 두만강 북쪽 일대에 정착했다. 식민지가 된 후 일제 통치를 피해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이 범주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항일운동의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 하나의 범주는 1920년대 이후 만주와 중국에 대한 일제 침략의 강화에 의지해 이주한 사람들이다. 일제 침략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 지역에 많이 자리 잡은 영세농민들의 경우도 중국인 주민들과 대립하는 상황이 흔히 형성되었다. 일제의 보호와 지원에 의지하는 입장 때문이었다. 만보산사건(1931) 같은 것이 전형적인 사례였다. 농민의 비중이 적은 관내의 일본 점령지역 교민사회는 일제와의 밀착이 더욱 강했다.
화북 지역은 중일전쟁 발발 후 식민지 비슷한 일제 통치 아래 들어갔다. 일본의 위협이 적은 상해에 자리 잡고 있다가 전쟁이 나자 후방으로만 옮겨다니는 임정에게 열혈 항일투사들이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대 문제로도 볼 수 있는 갈등이 일어났다.
중국 관내에서의 좌우 충돌에는 세대간의 사상적 갭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층은, 19세기 후반 또는 19세기 말경에 유년, 청년시기를 보내고 전통적인 지적 성장을 하여, 일면으로는 위정척사파적인 기질도 갖고 있는 원로들로서, 양반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근대교육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선배에 대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측의 원로들은 김원봉 등이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고 언행이 너무 편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한테 싫증을 내면서, 그들을 ‘봉건영수’, ‘민족 파시스트’, ‘신비적 국수주의자’로 간주하였고, 국수주의를 배격하자고 외쳤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74-175쪽)
중국에서 독립운동의 좌우 분열에는 이념의 차이보다 이런 성향의 차이가 더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운동의 입체적 조직을 통해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승작용을 기대할 수 있는 성격의 차이였다. 그런데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는 중국의 상황이 독립운동의 입체적 조직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적 성향의 임정과 진취적 성향의 독립동맹의 병존을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분업 형태로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전통을 배운 것일까? 독립동맹은 조선의용군 4개 대대와 함께 9월 3일 연안을 출발, 4천7백리 길을 걸어 11월 말 신의주에 도착,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입국했다. 독립동맹은 조선신민당을 거쳐 노동당 연안파를 이뤘고, 김두봉은 1949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맡았다.
독립동맹의 입국으로 해외 독립운동 주요 세력의 국내 무대 입장이 끝났다.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임시정부, 만주 유격항쟁을 대표한 김일성 집단, 그리고 중국 공산당을 배경으로 무장항쟁을 최근까지 벌여 온 독립동맹. 미국 교민사회를 이승만이 제대로 대표했는지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더 효과적인 대표를 따로 보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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