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의 네 가지 형태로 기계, 건물, 토지와 함께 '인간 자본'을 꼽았다. 훈련과 교육으로 획득한 기술과 능력은 물질 자본과 마찬가지로 생산 활동을 통해 원래 획득에 든 비용을 회수하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자본'은 인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공헌하는 인간의 능력만을 추상화하여 물질 자본의 속성에 유추한 것이다. 인간을 물질에 유추해 이해한다는 점에서 물질 중심 관념이지만, 인간의 가치를 살필 실마리를 남긴 것이 스미스의 '인간 자본' 개념이다.

 

인간이 육신과 영혼으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에도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이 합쳐져 있다. 한국가톨릭교회사의 대가 최석우 신부님 계실 때 교회사연구소에서 뮈텔 주교에 관한 열띤 토론에 함께 참여한 일이 있다. 교회의 역사를 보는 데도 세속적 기준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학구파와 교회사는 신앙의 영역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앙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최 신부님의 한 마디로 봉합되었다. "주교님은 조선인의 육신보다 조선인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던 분 같습니다."

 

근대세계에서는 자본주의 관점이든 공산주의 관점이든 인간의 물질적 측면에 관점이 쏠렸다. 근대세계의 건설과 유지에 공로가 크면서도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한 "노동자"의 모습도 그 관점에 휩쓸렸다. 노동자를 착취 대상으로 여기는 입장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의 권익 확대를 촉구하는 입장에서도 노동자를 물질적 이해관계 안에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자의 육신만 바라보는 관점이 근대세계를 휩쓴 것이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읽으면서도 한국 노동운동의 전개를 보면서도 이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에 늘 박혀 있었다. 노동 가치의 보상을 제대로 받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야? 미국의 노동운동이 새 이민집단의 박해에 한 몫 맡은 것은 현재의 노동자의 이익만 내세운 까닭이었다. 트럼프의 당선에 백인 노동자의 분노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도 그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노동운동은 "노동귀족" 문제를 가져왔고, 노동운동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출범한 민주노총도 비정규직과 관련해 배타성 문제를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심상정의 대선 출마 소식을 들으며 그와 노회찬의 업적을 되새겨본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한 그들의 정치활동은 노동운동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단순한 양적 발전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의미를 확충한 질적 발전이라고 나는 본다. "노동운동"을 "노동자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발전이라고 본다.

 

전통적 노동운동은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입장을 세우기보다 상품으로서 노동의 가치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다. 그래서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직접 걸리지 않는 의제를 소홀히 하고 노동계의 이익에 배타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심상정과 노회찬 등은 노동자의 입장을 지키면서도 노동자가 속한 이 사회 전체를 시야에 담는 정치적 노력을 해 왔다. 노동자의 물질적 이득에 단선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불리한 위치에 몰아넣는 사회의 틀을 바로잡기 위해 애써 왔고, 그것이 노동자의 존엄성을 키우는 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동의 존엄성" 같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재의 보람을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길이었다고.

 

촛불 민심이 모처럼 만들어준 정치 쇄신의 계기 앞에서도 나는 한국 정치의 큰 발전에 대한 희망을 걸지 못한다. 그러나 심상정과 그 일당이 이룩해 온 업적에는 큰 경의를 품는다. 그런 훌륭한 정치인들이 열세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정치 풍토에 새삼 환멸을 느끼면서, 그런 풍토 속에서 그만한 업적을 일궈온 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어려운 여건을 잘 이겨낼 것을 기대하며 그가 대통령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40여 년 선거권 갖고 있는 동안 가장 크고도 확실한 희망을 거는 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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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